#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태종•이방원 제204편: 대마도 정벌군 개선하다
70년 묵은 때를 한 방에 보내다
대마도 정벌군이 개선했다. 태종 이방원은 병조참의 장윤화로 하여금 조강 어귀에 나가 동정군(東征軍)을 영접하라 이르고 세종 이도를 대동하여 친히 낙천정에 거둥했다. 낙천정은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하고 만년을 보내기 위하여 한강변에 지은 하계 별장 겸 이궁이었으나 중요 국사를 구상하는 산실이었다.
대마도에 출정했던 야전군 총사령관 이종무 장군을 필두로 우박, 박성양, 서성재, 임상양, 이징석이 상왕 태종과 임금 세종에게 승전을 보고했다.
“제장들의 승전으로 백성들의 걱정을 덜어주었고 나라의 근심을 씻어주었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오늘날의 계획으로는 병선을 더 만드는 것보다 나은 일이 없다. 함길도와 평안도에 명하여 각각 병선을 더 만들게 하였는데 강원도에는 소나무가 많을 것이니 강원도로 하여금 배를 만들게 하여 경상도로 보내어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수군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환관 최한으로 하여금 장수들에게 술을 치게 하고 주연을 베풀었다. 전투에 참여했던 장수들을 위로한 태종은 선양정으로 삼도도통사 유정현을 초치하여 별도로 주연을 베풀었다.
연회는 흥겹게 베풀어졌다. 우의정 이원과 최윤덕이 각기 적군을 방어하는 계책을 토론했다. 영의정 유정현이 태종에게 술을 올리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창업의 어려움과 수성(守成)의 쉽지 않음을 날마다 생각해야 하실 것입니다.” “내가 할 말을 영상이 하는구려.” 흡족한 미소를 띠우던 태종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세종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수성이란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주상은 잘 들어 두어라.”
이러한 태종의 소신은 유시(諭示)가 되어 세종14년, 함길도 북변에 김종서를 보내어 4군과 육진을 설치함으로서 현실화되었다.
태종은 연회가 파할 무렵, 유정현과 이종무에게 각각 말 한 필과 안장 한 벌씩을 하사했다. 최윤덕 등 일곱 사람에게는 각각 말 한 필씩을 하사하고, 병마사 이하 군관 중 정벌에 나가서 공이 있는 자에게는 차등대로 상을 내리게 하였다. 또한 동지총제 이춘생에게 술을 하사하여 동정군중(東征軍中)에 나아가 제장들을 위로하라 명했다.
승전보에 고무된 조선 조정은 잔치가 벌어졌다. 이종무를 의정부 찬성사, 이순몽을 좌군 총제, 박성양을 우군 동지총제로 승차 임명했다. 정벌에 참여한 여러 절제사는 모두 좌목(座目)을 올리고 전사한 병마부사 이상은 쌀과 콩 각각 8석, 군관은 각각 5석, 군정은 사람마다 3석을 위로품으로 내려주었다. 동정(東征)에 공을 세워 상직을 받은 자가 2백여 명이었다.
전쟁이 끝났다. 대마도 도주 도도웅와(都都熊瓦)가 조선의 정치 질서 속에 편입되고 부하 시응계도(時應界都)를 보내왔다.
“섬사람들을 가라산(加羅山)에 주둔하게 하여 밖에서 귀국(貴國)을 호위하도록 하겠으며 조선의 영토 안의 주·군(州郡)의 예에 의하여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또한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생활이 곤란하오나 백성들이 섬에 들어가서 안심하고 농업에 종사하게 하고 그 땅에서 세금을 받아서 우리에게 나누어 쓰게 하옵소서.”
도도웅와의 청을 가납한 태종 이방원에게 경상도 관찰사가 장계를 보내왔다.
“일본국왕이 보낸 사신 화자·양예와 구주총병관(九州摠兵官) 사인(使人) 등 다섯 행차가 도두음곶(都豆音串)에서 사로잡혔던 전 사정(司正) 강인발과 대마도를 정벌하러 갔을 때 포로가 되었던 갑사 김정명 등 4인을 데리고 부산포에 도착하였습니다.”
조선 수군의 대마도 정벌은 섬나라를 흔들었다. 강진이었다. 조선은 승전을 만끽하고 있는 사이 규슈를 비롯한 일본열도는 여진이 계속되었고 일본 국왕이 바짝 움츠러들었다. 13일간의 점령이 아쉬웠지만 고려 말부터 70여 년간 우리나라를 괴롭혔던 왜구 문제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태종•이방원^다음 제205편~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