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강 문 석
중국인 조각가의 작품 ‘이주노동자’는 나와 같이 조각예술에 어두운 사람이 보기론 부조화가 심해 현실감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작품은 시선을 붙드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관람객을 압도하는 덩치부터가 여느 작품과는 다르게 거대했다. 이미 초로에 접어든 사내지만 그가 걸친 옷들은 젊은 건달꾼처럼 보였다. 이제 복식엔 더 이상 노소가 따로 없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건설공사 현장에서 땀을 흘리다가 잠시 허리를 편 것 같은데도 안전장구라곤 머리 위에 얹힌 노란 플라스틱모자뿐이고 그마저도 턱 끈은 붙어있질 않았다. 발엔 의무적으로 착용해야하는 안전화 대신 구두를 신고 있었다. 중국인 노동자들이 클래식한 정장차림에 넥타이까지는 매지 않지만 구두 정도는 꼭 챙겨 신고 막노동에 임하는 건 이미 지구촌에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들은 아무리 하찮은 노동자라도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들이 구두를 고집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먹고 사는 일이 더 시급하다보니 안전화 같은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의 근육질로 뭉쳐진 몸매는 청년처럼 단단해 보였고 잠바를 반쯤 벗어젖힌 가슴팍과 복부엔 프로농구단 ‘시카고 불스’ 로고가 붙은 셔츠가 불룩한 배를 가리고 있었다.
분명 동양인이지만 공사장을 얼마나 떠돌았으면 피부색이 흑인처럼 변했고 얼굴 중앙으로 쏠린 작은 두 눈은 실제 사람처럼 리얼하게 느껴졌다. 2004부산비엔날레에 출품된 조각품들이 을숙도문화회관 마당으로 옮겨져 조각공원을 만들었고 ‘이주노동자’도 그 중 하나였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것일까. 얼마 전 차에 문제가 생겨 보험사의 긴급출동 서비스를 받았다.
차량을 견인해서 정비공장으로 향하면서 젊은 기사는 묻지 않은 말을 꺼냈다. “저기 짓고 있는 아파트 있잖아요? 저거 거의가 중국인 인부들이 짓는 건데 완공해도 오래 못가고 내려앉을 겁니다.” 기사는 십여 년째 짓고 있는 신도시 아파트단지 마지막 단계 공사현장을 대하자 생각이 나서 정보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실제로 많은 중국인들은 입는 옷보다 먹고사는 일이 더 급선무다.
한국에 와서 일하면 하루에 십만 원 정도는 거뜬히 받는데도 자국에선 한 달에 그 정도밖에 받질 못한다. 그런데도 한 달을 꼬박 시간제가 아닌 절대복종제로 밤낮없이 벽돌을 날라야하니 그들이 왜 한국을 동경하지 않겠는가. 20년 전 여름, 백두산을 찾아가느라 중국 대련공항에서 항공기를 내려 육로를 통해 이도백하로 향한 적이 있었다. 그때 중국의 동북지역인 그곳에서 우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에 찌든 생활상들은 우리의 6.25동란 직후를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비포장도로 먼지를 켜켜이 뒤집어쓴 허름한 집들은 중간 중간 흙벽이 떨어지고 싸리문마저 달아난 집들이 보였다. 그날 버스 안에서 연변조선족 현지가이드는 우리 일행에게 자신과 같은 젊은 세대인 중국인들의 생활실태를 알려주었다. 힘든 일은 남자들에게 맡기고 공주처럼 살아가는 여자들 이야기였다.
일터에서 돌아온 남편들은 집에서 다시 취사와 빨래 청소까지 맡아야 한다는 것. 아내들은 주로 영화나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서 도회지를 찾아가서는 여가시간을 만들어 뷰티 숍이나 안마시술소에서 몸을 꾸미고 피로를 푼다고 했다. 조각공원에 들어선 스무 개 작품 속엔 이탈리아와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터키와 중국 일본 작가들 것까지 들어있었다.
그렇지만 여자를 형상화한 작품은 한 점도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도 남자들의 고단한 삶을 그린 작품은 ‘이주노동자’ 말고도 네댓 점이 더 있었다. 친구의 앉은 모습을 촬영하여 컴퓨터그래픽으로 우스꽝스럽게 찌그러뜨린 ‘절망’과 머리를 기형으로 크게 만든 화강석작품 ‘불확실한 미래의 꿈’도 남자들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남자들의 시련을 그린 작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길바닥에 엎드려 두 손을 벌린 ‘걸인’을 지나자 목이 댕강 잘린 머리통을 무덤 앞에 처박아 놓은 '종말'이란 작품이 나타났다. 이 마지막 작품은 섬뜩함마저 안겨주었다. 그럼 우리의 이주노동 역사는 어떠했을까. 모진 가난을 떨치고 삶의 터전을 찾아 미주로 건너간 게 시작이었다. 그 생생한 기록을 인천 월미도 이민사박물관에서 만났지만 낯설기만 했다.
격동의 세월 속 사진까지 곁들여 그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농장에 심어진 사탕수수까지 실물로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세대에겐 파독광부와 간호사 그리고 중동 건설현장 근로자가 이주노동의 시작이었다. 그런데도 이주노동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노르웨이 라면 왕 미스터 리’다. 금년 여든인 그는 노르웨이에선 대통령보다 인기가 높은 성공한 사업가로 널리 알려졌다.
우리나라 사람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때도 코리아란 말 대신 ‘미스터 리의 나라’로 소개할 정도로 북유럽 노르웨이에선 그가 존경받는 인물이다. 동란 1년 뒤 다친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노르웨이로 건너가서는 화장실 청소부와 동물병원 잡역부 그리고 호텔 벨보이까지 온갖 궂은일을 마다않으면서 독학으로 요리전문대학을 마친 후 최고의 요리사가 되었다.
KBS '한민족 리포터'에 그가 소개되자 직접 노르웨이로 그를 찾아간 시청자도 있었다. 더 많은 이야길 직접 듣고 싶어 찾아간 젊은이였다. 그는 "이제까지 부모 덕분에 세상모르고 살아왔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인생을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는 심경을 직접 미스터 리에게 털어놓았다. "자네는 자신이 원하는 걸 깨달은 것만으로도 이미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라며 미스터 리는 그를 반겼다.
그러면서 인생에서의 성공은 돈을 얼마나 벌고 얼마만큼 풍요롭게 살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벌고 이름을 날렸다고 해도 그 일이 스스로 원해서 한 일이 아니라면 결코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 돈으로 성공한 건 단지 현시욕의 충족일 뿐이기에 사람은 꿈을 가지고 사랑하고 도전하며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
절망해야 할 순간에 절망하지 않고 살아온 그의 이야기는 여느 피눈물 나는 고생과 극적인 성공담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오로지 천진난만한 웃음과 누구를 대할 때나 한결같은 진지함과 소박함으로 살아온 그였다. 미스터 리의 이러한 충고를 자신의 삶에서 실천할 수만 있다면 ‘헬조선’이라며 절망하는 오늘날 많은 우리 젊은이들도 제대로 된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