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에서 추사체, 의문당까지
완당선생 제주 유배기
실학 사상이 제주도에 소개된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 추사 김정희에 의해서였다. 임금이 완당에게 내린 벌은 “대정현에 위리안치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위리안치”란 유배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추사가 대정현에 위리안치되도록 명받은 것은 1840년 9월 2일이다. 위리안치는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가두는 중형이다. 위리안치는 보통 탱자나무 울타리로 사면을 둘러 보수주인(감호하는 주인)만 출입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탱자나무 울타리는 전라도와 제주도에 많았기 때문에 위리안치를 받으면 이쪽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세도 정치 초기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일족 간에 권력 장악이 심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된다.
추사는 그 많은 유배 중에도 절도(絶島)이자 원악지(遠惡地)인 제주도, 그중에서도 서남쪽으로 80리 더 내려가야 하는 대정 현에 위리안치 되었다. 유배행로는 해남을 거쳐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 화북진 항구로 들어가 여기서 다시 80리 떨어진 제주도 최남단 대정 현으로 가는 것이다. 당시의 교통수단으로는 쉬지 않고 가도 한 달은 걸리는 일정이다. 추사의 유배 길에는 의금부 관리 김오랑 형관이 대정까지 동행했다. 추사가 제주에 도착한 항구는 화북진이었다.
오늘날 화북진은 더 이상 항구라 할 수 없지만 고깃배가 있고 해녀가 변함없이 바닷 일을 하고 있다. 화북진에 도착한 추사는 우선 배에서 만난 한 아전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배가 정박한 곳에서 제주성까지는 10리길이었는데 도착한 날은 화북진 아래 민가에서 유숙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성으로 들어가 아전인 고한익(高漢益)이라는 이의 집에 주인삼아 있었다. 이 아전은 전직 이방(吏房)이었으며 배에서부터 고생을 함께했다.
제주에서 대정을 가자면 서쪽 해안을 따라 애월, 한림, 협재를 거쳐 갈 수도 있으나 그 길은 해안선을 돌아야 하므로 산 중간 마을을 잇는 지름길을 택했던 것 같다. 그래서 추사는 한라산 자락의 이국적인 풍취를 느끼며 귀양길을 재촉했다. 남녘의 정취, 이국의 풍취가 물씬 풍기는 그 길을, 돌아갈 기약 없는 유배 객 신세로 가는 추사의 마음은 처량하기만 했을 것이다.
그런 쓸쓸한 가을날의 서정을 가슴에 안고 추사는 1810년 10월 2일 대정 현에 도착했다. 추사가 대정에 와서 처음 집을 잡아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유배지로 삼은 곳은 대정읍성 안동네(安城里 1682번지) 송계순의 집이었다.온돌방은 한 칸인데 남쪽으로 향하여 가느다란 툇마루가 있고, 동쪽으로는 작은 정주가 있으며, 작은 정주의 북쪽에는 또 두 칸의 정주가 있고 곳간 한 칸이 있다. 이것이 바깥채이고 또 한 채가 이와 같은 것이 있어 주인은 안채를 쓰고 추사는 바깥채에 기거했다.
추사는 반드시 가시울타리 안에서만 운신해야 했고, 여기는 죄인이 머물고 있는 곳이라 표시되었다. 귀양살이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외로움이라면 육체적으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음식과 질병이었다. 추사가 앞으로 살아갈 제주도 유배생활의 터전은 이렇게 마련되었다. 이후 추사는 무슨 사연에서인지 거처를 대정현 안성리 강도순의 집으로 옮기고, 또 유배가 끝날 무렵에는 식수의 불편 때문에 안덕 계곡이 있는 대정현 창천리로 한 번 더 옮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지고한 선비정신을 함축한 조선시대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국보 180호
세한도(歲寒圖)
제주도에 유배온지 벌써 5년(1844년) 추사 나이 59세 때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세한도(歲寒圖)를 그리게 된다. 세한도는 그의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 이다. 귀양살이에 고생하는 스승에게 연경에서 가져온 책을 드렸고 이에 추사께서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세한도를 그려주었다.
천지가 백설로 덮인 납작한 토담집 안팎에 네 그루의 소나무가 그려진 단출한 꾸밈새나, 고고한 구도와 노건한 선화의 고졸한 격조가 넘치는 자화상이다. 그림 속에 시가 있고 도가 스며 정이 넘실거린다. 이는 높은 학문과 남다른 견문과 타고난 대수가 아니고는 다다르지 못할 절경이다.
물론 소나무는 의표의 상징이요, 토담집은 적거의 실상이요, 혈창은 고고의 숨통이다. 안의 노송은 자기의 표상이니 아름드리 밑그루의 대담한 용사는 지뻗다가 갈라진 안산한 일지와 대비가 된다.
그 꿈틀거리는 용사, 창창한 침엽, 의연한 기상으로 해서 사뭇 안간힘이 시퍼렇다. 모진 풍설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조절(操節)하는 추사의 자존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스승으로부터 세한도를 건네어 받은 이상적은 이듬해 다시 이정응(李晸應)을 동지사로 하는 연행을 따라 연경에 건너갈 때 세한도를 행낭 깊숙이 지니고 있었다. 그해 정월, 추사의 시우였던 오찬의 연회에 초대받은 이상적은 연회에 참가한 16명의 문신들에게 추사의 근황을 설명하는 한편 행낭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세한도를 꺼내어 이들에게 자랑하여 보였다.
평소 추사와 깊은 교우를 맺고 있던 이들은 이상적이 꺼내 보인 세한도를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때 모인 사람들은 오친을 비롯하여 장악진, 조진작, 조동견 등 16명이었는데 이 자리에서 이상적은 죄객의 제찬을 칭하사 여러 사람들이 문과 시를 제하였던 것이다. 당대 최고의 문사들 16가의 제찬이 합장됨으로써 세한도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으며 마침내 귀국한 이상적은 다시 제주도를 찾아 완당에게 이를 보여주면서 자랑하였다.
그뒤 1848년 12월, 추사 김정희가 오랜 유배생활을 끝내고 방환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세한도첩의 성가는 더욱 높아져서 이상적 집안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추사체의 완성
추사는 학문에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독특한 추사체를 대성시켜 예서, 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한 학자이다. 그는 역대 명필을 연구하고 그 장점을 모아서 독특한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왕조의 새로운 문화 창조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추사의 예서는 일반적으로 현대 예술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고졸(고풍스럽고 졸박함)하고, 거칠고, 묵직함(重)의 요소를 지님과 아울러 예리하고 힘찬 운필에 의한 의경과 자체, 결구, 장법이 더욱 다양하고 풍부한 파격적인 변화에 따른 개성이 매우 강렬한 필묵의 정취를 지니고 있다.
추사는 서예가로서 뿐만 아니라 고매한 인품과 학덕을 겸비한 대표적인 문인화가로서 우리나라 남종문인화의 정착화에 누구보다도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 회화사에서 가장 뛰어난 묵란 화가였던 그는 문자향과 석권기가 충만한 전형적인 남종문인화의 고아한 경지를 보여주는 수많은 묵란과 산수를 남기어 대원군의 묵란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후학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서법과 화법을 구별하지 않고 예서 쓰는 방법으로 난엽을 그림으로써, 독자적인 경지에 이르렀던 그는 산수화에서도 중국 문인화의 필의를 담은 그림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서예적인 조형미의 구사에 치중하여 소재와 필치가 더욱 고담하고 간결하며, 개성이 강한 표현주의적 기법을 강조하였다.
특히 추사는 해동의 금석학을 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올바른 서법이론을 구체적으로 또 체계를 세워 계몽하다시피 자세히 소개한 것은 물론 문인화의 이론적 해석과 그 실천을 보여 그가 주장한 대로 후학들의 안목을 크게 하였다.
추사는 귀양살이를 하면서 그 외로움, 억울함, 쓸쓸함을 달래기 위하여 글씨를 쓰고 또 썼다. 한나라 비문체뿐만 아니라 각체를 익혔던 그가 여기에서 자신의 감정을 듬뿍 담은 개성적인 글씨를 만들어 내게 되어 추사체가 완성되었다.
추사체의 성립은 실로 이와 같은 단계적인 수련의 결과로서 그 글씨 는 조금의 위화감도 없이 혼연일체의 빛을 발하게 되는데, 그의 말대로 흉중에 만권 서를 담고 팔뚝아래 309비를 갖추었기 때문에 독자일문의 지고한 예술경지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의문당(疑問棠)이라는 현판
이 의문당은 추사선생이 제주도 유배 시절 후학을 양성하던 강당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대정 현에 유배되어 송계순의 집에서 기거하다가 지금의 적거지인 대정읍 안성리 강도순의 집으로 옮긴 후 현감의 배려로 위리안치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된다.
약간의 자유를 얻은 추사 선생은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자리 잡은 인근의 대정 향교에 자주 왕래하시면서, 어려운 유배생활에도 불구하고 후학 양성에 힘을 쏟게 된다.
유생들의 공부방에는 의문당(疑問堂)이라는 현판을 1846년 병오 11월에 써주었다. 의문당 마당에는 지금도 세한도를 닮은 나무 두 그루가 고색창연하게 우뚝 서 있다. 먼 제주 땅에 유배 와서 후학 양성에까지 힘을 쏟으신 추사선생이 한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학자임을 생각할 때 내 생애에 선생의 뜻을 새기며 이를 만인에 홍보하는 직이라는 점에 긍지를 느끼면서,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의문당 마당에 서 있으면 추사선생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