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메밀꽃 필 무렵인가?
사실 나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라나서 메밀꽃을 사진에서나 요사이 보아서 알지 봉평에 가 본적도 없고, 저것이 메밀 꽃이로구나 하고 알면서 본적도 없지요. 다만 작가 이효석의 작품은 거의 다 읽어 알지만...
메밀은 무었에 쓰이는지도 모르고 다만 강원도 메밀국수니 봉평 메밀묵이니 하는걸 들은적이 있어 묵이나 국수 만들때 쓰이는구나 하는 정도일뿐.
수선화가 거의 평생 내 머릿속에 상상의 꽃으로 있었드시 메밀꽃도 마찬가지... 우리가 안다는 것이 얼마나 단편적인가 하는 증거 일테지.
그 먹고싶은 오징어라도 몇마리 더 가저오지 않고 그 무거운 책들을 낑낑 거리며 고생하고 끌고온 보람이 있어 지금도 당장 다시 읽을수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문고본엔 메밀꽃 필 무렵이 열 한페이지에 담겨 있는데 그 짧은 글속에서 우리에게 그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가의 재주가 정말 놀라울 뿐이다. 그럴수 밖에...
작가 李孝石은 우리 사촌학교의 졸업생입니다.
경성 제일고보(옛 경기 중학교) 출신이니까요.
경성 제일고보 학생들은 옷소매와 모자에 흰테를 하나 두르고 다녔고
평양 제이고보 학생들은 흰테를 둘 달고 다녔고
대구 제삼고보 학생들은 흰테를 셋 달고 다녔는데
무두 일제 강점기의 일들이라 일본의 도오쿄오 고등보통. 교오또 고등보통 등의 본을 따서 그랬던 것이지요.
백삼선의 유래가 그런데 요즈음 우리 후배들도 알기나 하는지...
작가 연보를 보면 1920년에 경성고보에 입학을 했는데 일년선배였던 유진오(헌법학자 였고 후일 고대총장을 지낸 玄民 兪鎭午박사,이건 필자의 주기)와 함께 건마수재로 알려졌다고 쓰여 있네요.
참고로 우리 학교의 기수로 말하자면 17회 졸업생 입니다.
우리가 중학교때 愚松 白慶基 교감 선생님이 우리 선배이셨는데 몇회이신지는 소재가 모르겠으나 대강 그정도가 아니었나 싶군요.
총 동창회보 같은것이 있나요?
또 한가지 궁금한것은 우리 개교 기념일에는 해마다 봉산동의 그 태백빵집 찹쌀떡을 주었는데 지금도 그 전통은 이어 지나요?
하나는 연분홍색, 하나는 연 초록색 두개씩담긴 그 상자.
그 태백빵집은 아직도 있나요?
서울명동의 태극빵집이 있는걸 보면(지금은 없어 졌을지도 모르지만)
있을것 같기도 하고...
동성로, 교동시장에 있던 고려당 빵집도 유명했었는데...
서울 대감들께
명동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에 오래된 만두집이 있지요.
소재가 옛날에 그집에 만두 먹으러 자주 갔었는데 87년에 한국에 처음 같을때 옛날 생각이나서 그집엘 들렸었는데 그 집 안주인이 나를 알아 보드라고요. 물론 중국여자 이지요만. 옛날에 문앞에 앉아서 꾸벅 꾸벅 졸던 그 노인이 자기 시아버지 였는데 돌아 가시고 자기도 얼마나 더 할지 합디다만... 어디서 뭐 하며 사느냐고도 묻고...그후 또 한국엘 들렸을때 그 집에 들렸는데 그 여자가 나를 못알아 보는것 같았고 손님들도 많아 그냥 나는 몇가지 만두를 사서 집으로 와 버렸는데 그 후에 또 들렀더니 그 여자가 안 보입디다. 그 여자가 하는지 그만 두었는지...
참 대감들 관심 있으신 분들은 www.dsseoul.org를 한번 찿아 보십시요.
이건 서울 독일 학교 홈 페이지 인데 서울에 있는 독일 대사관 직원들과 서울에 주제하는 독일상사 직원들의 자녀가 다니는 조그만 학교인데 독일어권의 스위스, 오스트리아 대사관 자녀들도 다니는 학교 이지요.
이 홈 페이지에 보시면 Schulchronik(학교연혁)이 있는데 이걸 클릭하시고 그기서 Urdss를 클릭 하시면 귀중한 사진자료가 두장 보입니다.
왼쪽 사진은 Johannes Bolljahn(요한네스 볼얀)교장님의 사진이고 오른쪽 사진은 그 교장 선생님과 학생들 사진인데 갓을 쓴 학생도 보입니다.
이 학교는 왕립 덕국어 학교로 설립되어 한일 합병으로 1911년 폐교 될때까지 존립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학교 홈페이지에 보니깐 품질좋은 사진인쇄가 필요한 사람은 학교측에 연락하라고 전화 번호까지 적혀 있습디다만...
이조 말년에 군악대장도 독일 사람이었지요...
우리 방장님이나 얼쑤형처럼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 하시는 대감들도 싸이트구성을 어떻게 했는지 보실만 하지 싶어서 소개 합니다만...
여기서 다 얘기 할수는 없고 간단히...
여러 대감들도 소제가 어떻게 사랑방에 나왔는지 아시지요?
마찬 가지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이런 싸이트가 있는줄도 몰랐는데...
지금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 대학생은 내가 사랑방을 그리워 하듯이 한국 이태원의 그 학교시절이 그리워서 한숨 짓는다나요...
웃기는 것은 우리나라 코미디언 이주일씨의 죽음을 이 싸이트에서 한글로 읽고 그에 관한 기사를 읽었을뿐 아니라 옛날 선비들이 쓰던 갓과 망건에 대한 제작법과 도포, 선비정신을 독일어로 설명을 해 두었는데 내가 배울것이 있을정도 였지요.
내가 미국을 안가고 독일에 있게된 이유도 이런것 때문 이었지요.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만약 독일이 반대하고 나서지 않았다면 미국은 벌써 이락침공을 했었지요.
영국은 무조건 미국 편이고 프랑스는 조건부의 그런 태도지만 독일은 분명히 무력사용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지요. 그래서 미국 대통령은 외교관행인 당선축하인사도 안해온 무뢰한 이랍니다.
자질없는 대통령 이랄까요.
대감님들, 소제는 정말 親美주의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그런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제삿상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미국의 태도는 바람직스럽지 못합니다. 테러리스트가 원자무기를 가지면 위험해서 그런다지만 그 위험한 무기를 가지고 있고 사용한건 누가 했지요?
나는 가지되 너는 가지면 안된다는 그런 논리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국가간 외교의 기본인 호혜평등의 원칙에도 어긋납니다.
며칠전 독일 법무부 장관이 "미국 부시 대통령이 어려운 국내경제 문제를 괜히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자꾸 전쟁을 부추기며 이런 사실은 옛날에 힛틀러도 그랬다"고 말했다가 그것이 신문에 기사화되어 그것이 사실이니,그런뜻으로 말한게 아니니, 하며 옥신각신 하다가 장관이 사직서를 내고 말았지요.
그래서 미국과 독일의 사이도 지금은 별로 입니다.
난 지금도 우리나라가 핵 관련 산업을 포기한걸 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자원도 없고 작은 우리나라가 살아가야할 길은 기술우위의 정책을 펴는게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우리나라의 저자세 외교도 문제 이고요. 걸핏하면 안보문제 물고 늘어지는 미국의 행태는 눈꼴 사납다 못해...
제 나라에서는 쓰지도 않고 폐기되는 전투기를 차세대... 죽일 넘들...
미국에서 경제학 공부하고 국가경영의 요직에 앉아 한국경제를 실험장으로 생각하는 학자님들...
어떻게 피땀흘려 이룬 우리나라의 國富인데 외국인들이 손도 안대고 코푸는식으로 우리나라의 재산이 외국으로 빠져 나가는걸 알기나 하는지...
Adam Amith의 國富論(The Wealth of Nation)(독일어로는 Der Reichtum der Nation)을 못 배웠더라도 그정도는 알겠다.
우리 동기 金秀行교수가 이 책을 번역했다는걸 신문에서 보아 알고는 있지만 본 적도 없고... 이 친구 메일 주소를 몰라 알려고 찿아 보다가 백삼선을 보고, 사랑방 찿아가고...
노 교수는 말이 없다?
누가 이 친구 메일주소 좀 알려 주소. 내 메일 주소로 제발...
내가 말이 많아서 쓸 말이 적고...
할 말은 많고...
말을 아껴야 하는것은 알기에...
이율배반은 정말 이런걸 두고 하는말이제
깜빡 잊어서 또 글 수정해야겠네
김용서 대감은 우리 한반이었는데 그것도 모르나?
아마 2학년때 김옥진 선생님 반이었을 끼라... 이순국이 이성관이 이종익이 등이 한반이었제... 그라고 지는 정구 친걸로 아는데... 김수행이하고 맞제? 오금이 저릴끼다. 서울가면 한잔 사겠다면 가만있고...
정말 할 얘기도 많은데 자네 하곤...
김수행이는 그때 5반 이었는데 담임은 이을기 선생님 이셨고 두천 박중남대감도 그반인걸로 기억하는데... 오금이 저리나? 나는 알지...서울가면...이하동문
그라고 현지 인터뷰가 무슨 말고...
내가 슬쩍 한국 배행기 한번 타면 되는데...
나도 10월 6일날 잠실 운동장엘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