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할미
사방 트인 작은 동산 쇠고삐 꼭 쥐고
긴 날을 소 먹이며 사색을 하던 아이
당산의 작은 집 하나 신전으로 품었다
성전의 장막처럼 당산나무 드리우고
찬 바람도 끄떡없이 당당한 그 당집
꼿꼿한 정령의 꽃대 가슴 깊이 세웠다
어릴 땐 늘 두려워 돌아가던 서낭당 길
이순도 한참 넘어 기어이 발길 닿은
당집의 할미 초상은 어째서 날 닮았나
가을날이 휘청인다
젊은 여인 눈길 주는 가을 하늘 산등성 위
무심한 구름도 다정하게 모여들어
아기가 옹알이하듯 고물고물 춤춘다
어느 결에 그녀는 발길을 돌리는데
어인 일로 오래전 마른 내 젖가슴에
감도는 유선의 찌릿함, 가을날이 휘청인다
구름은 조개처럼 번져가다 흩어지고
가슴에 얹었던 손 애틋이 내리는데
등성은 아무 일 없는 듯 외외하고 유유하다
양다래 한입 물고서야
신맛에 몸을 떨던 네가 유독 그리운 날
양다래 나도 한입 물고서야 깨닫다니
의연한 네 웃음소리 헛헛했던 이유를
언젠가 한 번쯤은 다녀가리라 여겼지만
나누지 못한 하직 인사 뭐 별거라고
신새벽 꿈결로 와서 '누!' 하고 호명하긴
그래도 왔으면 방에라도 들 것이지
얼굴도 내밀지 않고 문 앞에 섰다가는
속없이 가란다고 내빼는 건 또 무슨 심사일지
바람결 푸른 날
볏논의 이마를 바람결 스쳐 가네
찰나를 영원이라 여기고 속삭인 말
너에게 들킬 것같이 가슴 먹먹 푸른 날
- 시조집 『시인과 반야로차를 마시다』 책만드는집,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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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식 시인 시조집 『시인과 반야로차를 마시다』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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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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