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미 앳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
최용현(수필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은 노도(怒濤)처럼 서유럽을 휩쓸고 다시 동쪽으로 눈을 돌려 불가침조약을 맺었던 소련으로 쳐들어간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던 독일군은 남부 코카서스 유전지대의 관문인 스탈린그라드(현재 볼고그라드)에서 결사항전에 나선 소련군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친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는 ‘문 앞에 있는 적’이라는 뜻으로, 소련군의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활약상을 그린 윌리엄 크레이그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프랑스 출신의 장 자크 아노 감독이 2001년에 연출한 영화이다. 영화의 제목은 바로 코앞에까지 쳐들어온 독일군으로부터 스탈린그라드를 지켜내야 하는 소련군의 절박한 위기감을 표현한 것이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라는 말은 고대 로마시대 때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의 성문 앞까지 진군해왔을 때, ‘한니발이 문 앞에 와있다’고 한 것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게르만족이 로마로 쳐들어왔을 때의 위기감을 나타낸 것이라는 설도 있다. 공성전(攻城戰)에서 수비 측이 위기감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군사적인 관용어가 되었다.
1942년 가을, 우랄산맥의 목동 출신 전사 바실리 자이체프(주드 로 扮)는 열차를 타고 와서 다시 볼가 강에서 배를 타고 독일군 폭격기의 공습을 피해 스탈린그라드 부두에 도착한다. 탄약 5발을 받아든 바실리는 총을 든 동료와 함께 총알이 날아오는 독일군 진지를 향해 돌격한다. 후퇴하거나 도망치면 아군 독전대(督戰隊)의 기관총에 사살된다.
뛰다가 분수대 안으로 들어가 시체들 틈에 누워서 죽은 척하고 있던 바실리는 선전 전단차가 전복되어 분수대로 들어온 정치위원 다닐로프 대위(조셉 파인즈 扮)를 만난다. 거기서 바실리는 다닐로프가 건네준 소총으로 귀신같은 사격솜씨를 발휘하여 부서진 건물 앞에 있던 독일군 장교 5명을 해치운다.
다닐로프는 스탈린그라드의 방어책임자인 흐루쇼프에게 저격수 바실리를 영웅으로 만들어 패배감에 젖어있는 소련군에게 희망을 주자고 건의하여 승인을 받는다. 이후 바실리는 저격수로 활약하고 다닐로프는 이를 군대신문에 대서특필하여 소련군의 사기를 드높이면서 동시에 두 사람의 우정도 쌓여간다.
어느 날, 구두닦이소년 사샤의 집에 따라간 바실리는 거기서 타냐(레이첼 와이즈 扮)라는 아가씨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모스크바대학에 다니던 타냐는 독일군에게 부모를 잃고 자원입대한 여군으로, 이곳에 기거하면서 사샤를 지도하고 있었다. 바실리를 찾아왔다가 타냐를 본 다닐로프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두 남자의 우정에 미묘한 균열이 생긴다.
독일군은 바실리를 잡기 위해 소련군에게 아들을 잃은 저격수양성학교의 교장 코닉 대령(에드 해리스 扮)을 투입한다. 그는 뛰어난 위치선정과 백발백중의 사격술을 지닌 최고의 저격수였다. 허물어진 백화점에서 그의 덫에 걸린 바실리는 동료 저격수들을 하나 둘 잃고, 그 자신도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 번 넘긴다.
코닉 대령은 고기와 초콜릿 등을 사샤에게 주고 바실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일부러 자신의 매복지를 알려주면서 바실리에게는 절대로 알려주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예상대로 바실리에게 코닉 대령의 매복지를 알려준 사샤는 두 고수의 대결을 보러 나왔다가 코닉 대령에게 잡혀서 급수탑 기둥에 목이 매달리고 만다.
타냐가 유탄(流彈)을 맞고 쓰러지자, 다닐로프는 타냐가 죽은 줄 알고 실의에 빠진다. 그는 바실리의 매복지를 찾아가 ‘우리의 우정을 회복하고 싶다.’고 말하고 죽음을 각오한 듯 ‘내가 대령의 위치를 알려주지.’ 하면서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가 코닉 대령에게 바로 저격당한다. 코닉 대령은 바실리가 죽은 줄 알고 매복지에서 나왔다가 바실리에게 사살된다. 독일군이 물러가고, 바실리가 병원으로 찾아가 타냐를 만나면서 영화가 끝난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상당히 잘 만들어진 세련된 저격수영화이다. 특히 앞부분 볼가 강을 건널 때의 독일군 폭격기의 기총소사 장면과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전투 장면은 리얼리티가 뛰어나 실전을 방불케 한다. 그러나 미국의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 전쟁영화는 흥행이 안 된다는 불문율을 증명이라도 하듯 흥행에는 실패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초반부에 탄약 5발만 들고 돌진하다가 총을 든 동료가 쓰러지면 그 총을 들고 싸우는 ‘우라돌격’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본 소련군 참전용사들은 ‘우리 정규군은 저렇게 거지처럼 싸우지 않았다.’며 분개했다고 한다. 특히 기관총을 후퇴하는 병사 처형용도로 쓴 것으로 묘사한 부분은 소련군을 비하한 것이라며 이 영화의 상영금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병사들이 함께 잠자는 군 막사 안에서 바실리와 타냐가 필요한 부분의 옷만 열고 숨죽이며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신빙성이 있는 건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또 다닐로프가 사샤의 죽음을 그의 어머니에게 차마 알리지 못하고 독일 쪽으로 넘어갔다고 말하는데, 그의 어머니가 체념하면서 안도하는 장면도 짠하게 가슴에 남는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자존심을 걸고 맞붙은 6개월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을 포함한 추축국의 군인 85만 명과 소련군 112만 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 투입된 소련군 보충병의 평균생존기간이 24시간도 되지 않았다고 하니 그 참상을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또, 당시 소련정부에서 스탈린그라드 주민이 볼가 강을 건너서 피난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피해가 커진 탓인지 민간인의 피해규모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런데 1942년 8월 23일 독일군 폭격기 600대의 스탈린그라드 공습으로 하루 동안 민간인 4만 명이 죽었다고 하니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민간인 희생자는 아마 수십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바실리는 신병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해군 부사관 신분의 저격수였다. 그는 스탈린그라드에서 242명의 독일군을 저격한 공로로 영웅 칭호를 받았고, 그의 총은 승리의 표상으로 오늘날까지도 스탈린그라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첫댓글 언젠가 본 듯한 영화입니다. 저격수들끼리의 신경전이 기억납니다. 독일 저격수의 행위가 좀 dirty했어요. ㅎㅎ
상당히 세련된 저격수영화죠.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터이다보니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월산거사 인터넷을 뒤지어 올려 놓았습니다만~~
@여정 감사합니다. 볼만한 가치가 있는 세련된 저격수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