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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씨>
오늘 복음은 어찌 그리도 제 가슴을 치게 만드는 복음인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바로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 같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은 짧고 간결하지만 때로 쌍날칼 같이 날카로워 우리들의 정곡을 찌릅니다. 예수님 말씀 한 마디에 가슴이 찔린 저는 하루 종일 고개를 푹 숙이고 반성할 수밖에 없지요.
강론대에 서서 제 입으로 선포하는 말씀은 고상한 포장지로 잘 포장된 상품 같지만 그 내용물은-구체적인 삶-은 형편없습니다. 유통기한이 지나도 훨씬 지나 썩은 냄새가 펄펄 나지요.
말로는 세상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모든 대상을 다 사랑하고도 남습니다만, 실제로는 제 한 몸 챙기기에도 바쁩니다.
글로는 마치 세상 이치를 다 깨달은 성인군자처럼 모든 것에 초연하고, 원수조차 사랑하지만 실제로 제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 저리 가라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이들은 원래 유대인들의 여러 부류 가운데 가장 잘 나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다 사회의 상류계층을 형성하던 지식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율법과 성서말씀에 정통해있던 사람들인 동시에 자타가 공인하던 성실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이토록 모범적인 신앙인들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장 첫 번째 가는 공격대상이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의 본질, 핵심, 근본에 대한 소홀 때문입니다. 결국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이십니다. 유일신이신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신앙의 핵심인 하느님에게서 점점 멀어짐과 동시에 부차적인 요소들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성스런 마음으로 제사상을 차리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면 그걸로 족할텐데...아주 하찮은 것들에 너무 신경을 썼던 것입니다. 제사상에 올릴 명태는 반드시 국산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중국산도 괜찮은가 하는 문제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루 종일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습니다.
또한 유대 신앙의 또 다른 핵심이자 축은 하느님께서 지니고 계신 가장 두드러진 속성인 "사랑과 자비"를 이웃들에게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입술로만 하느님과 이웃을 섬겼지 실제 삶이 전혀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지도자였던 그들은 가난한 백성들의 의지처가 되기는커녕 철저하게도 그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위선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귀신같이 꿰뚫어보시던 예수님이셨기에 그토록 철저하게도 이중적인 인간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악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내가 누군데" 하면서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던 그들, 입만 열었다 하면 하느님 사랑을 설파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지만 돌아서면 호박씨란 호박씨는 있는 대로 다 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들의 삶을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가장 위험한 일은 언행의 불일치, 위선임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 이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지만 또한 이것처럼 우리 신앙인들에게 시급한 일이 다시 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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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6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갈라5,1-6 루카11,37-41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오늘 말씀 묵상 중 떠오른 산상수훈의 행복선언 중 한 구절입니다.
마음의 순수할 때 하느님을 봅니다.
마음이 순수할 때 자유롭습니다.
마음이 순수할 때 열정도 샘솟습니다.
순수와 열정은 함께 갑니다.
마음이 순수할 때 지혜롭습니다.
마음이 순수할 때 자비롭습니다.
마음이 순수할 때 겸손합니다.
수도생활의 궁극목표도 마음의 순수며
수도승의 모든 수행도 마음의 순수를 지향합니다.
언젠가 어느 수도형제의 말도 잊지 못합니다.
“샘물도 계속 퍼내야 깨끗해지듯이
원장님도 계속 샘물을 퍼내듯이 매일 강론을 퍼냄으로
마음도 깨끗해질 것입니다.”
수도형제의 언급이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고정불변의 순수한 마음이 아닙니다.
계속 흘러야 맑은 물이고, 계속 퍼내야 맑은 샘물이요,
계속 닦아야 빛나는 그릇이요,
계속 가꾸고 돌봐야 기름진 옥토이듯 마음의 이치도 똑같습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거룩한, 깨어있는 반복의 수행 있어 깨끗한 마음입니다.
다음의 두 거룩한 반복 있어 마음의 순수입니다.
첫째, 끊임없는 기도의 수행이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 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바오로의 희망은 바로 우리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게 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끊임없이 마음을 비움으로 성령으로,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매일 바치는 성무일도와 미사의 수행이,
매일 나누는 강론 묵상이,
매일 하는 렉시오 디비나의 수행이
마음을 비워 깨어있게 하고, 깨끗하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우리를 육욕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고
종살이의 멍에에서 벗어나 굳건히 서게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의로워지는 우리들이요
이런 끊임없는 기도의 은총이 우리 마음을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둘째, 실질적인 사랑의 나눔이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다음 주님 말씀은 비단 바리사이들만 아니라
위선적 삶을 살아가는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정녕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들지 않았느냐?”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겉의 행동이 아니라 속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겉이 깨끗해도 마음이 탐욕과 사악함으로 가득하다면
하느님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마음 관리에 소홀한 이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몸 관리, 재물 관리 등 외적 관리 이전에 마음 관리입니다.
계속 탐욕과 사악을 비워냄으로
마음 관리에 충실한 이들이 진정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새삼 마음을 잘 돌보고 관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마음 관리에 우선적인 것이 기도요 다음에 사랑의 나눔입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끊임없는 자선의 수행이
우리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사랑의 행동으로 검증되는 믿음이요,
이런 사랑의 행동이, 사랑의 나눔이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시며 사랑의 나눔에 충실하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 자애가 저에게 이르게 하소서.”(시편119,41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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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갈라티아 5,1-6
복음 루카 11,37-41
작년에 책을 출판한 뒤에 아는 분들께 책을 한 권씩 보내드렸습니다. 특별히 생각되는 분들에게는 당연히 제 부족한 책을 보내드려야 한다고 생각이 들어서였지요. 그러나 대부분이 책을 받으시고도 아무런 대답이 없더군요. 물론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싶어서 책을 보내드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받고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원하지도 않은데 괜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과 함께 조금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떤 상대방의 응답을 바라는 마음은 진정한 나눔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나의 입장에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베풀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응답이 없어도, 또한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부정적인 말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무조건 실천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람들은 ‘형편이 넉넉해지면... 시간이 많아지면... 조건이 충분해지면...’ 등의 나눌 수 없는 이유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 같습니다. 즉,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나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줄 것이 없다고 생각되면 나눌 수 없다고, 그래서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나눔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랑’의 관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점에서 상대를 바라보고 소통을 하다보면 자신이 가진 것이 없어도 나눌 것들을 발견할 수 있지요. 다시 말해서 따뜻한 미소, 좋은 말 한 마디, 남에 대한 배려 등등 할 수 있는 것들이 할 수 없는 것들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눔에 있어서 조건을 바라는 것, 또한 나눌 수 없는 조건만을 찾아나서는 것. 어쩌면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주님께서는 제일 싫어하는 원치 않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의 모습을 이야기하시지요. 겉으로는 깨끗한 척, 고상한 척하고 있지만 사실 속은 너무나 더럽고 지저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라고 말씀하시지요.
참된 자선을 베푼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조건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무조건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실천을 계속한다면 당연히 마음 역시 깨끗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깨끗한 마음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간절하게 원하고 있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나의 자선에 대해 반성하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나의 이웃들에게 나누고 있었을까요? 너무나도 나눌 것이 많은데도 나의 욕심과 이기심에 나누지 못하는 속이 지저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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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간 화요일>(2012. 10. 16. 화)(루카 11,37-41)
<자선, 사랑, 회개, 보속>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9-41)."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이라는 말은,
'겉보기에만 깨끗하다.' 라는 뜻인데,
이 말은 사실상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한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라는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하고 거룩하지만
속은 탐욕과 이기심 같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위선자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은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속이려고 하는 '어리석음'입니다.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라는 말은,
'하느님은 만물을, 즉 겉과 속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겉모습에 속지 않으시고,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신다.' 라는 뜻입니다.
'속에 담긴 것'은
일차적으로는 잔과 접시에 들어 있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 말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뜻합니다.
'자선을 베풀어라.' 라는 말은
여기서는 단순히 불우이웃 돕기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라는 명령입니다.
'자선'이라는 말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일로만 생각하는 것은
너무 좁은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됩니다.
사실 사랑 없이 불우이웃 돕기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어떤 이들은 '불우이웃 돕기나 자선 행위 자체가 사랑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사랑이 아닌 다른 이기적인 이유로
자선을 행하고 불우이웃을 돕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선'은
넓은 뜻의 '사랑'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사랑의 찬가'에서 말한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3)."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일 자체가 사랑이 아니라
그런 일을 할 때에는 사랑으로 해야 하고,
사랑 없이 하는 그런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바오로 사도의 말입니다.
또 이 말은 '사랑 없이' 그런 일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들은 자선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자비심을 과시하기 위한 위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마태 6,2)."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3-4)."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라는 말은
'사랑'만이 사람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또 '깨끗하다.' 라는 말은 '거룩하다.'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니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도 거룩해야 합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또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니(1요한 4,8)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함'은 곧 '사랑'이고,
'사랑'만이 사람을 거룩하게(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41절의 '속에 담긴 것', 즉 '바리사이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은
39절에서 말한 대로 '탐욕과 사악'으로 얻은 것들, 즉 범죄의 결과물입니다.
그렇다면 '탐욕과 사악으로 얻은 것들로 어떻게 사랑 실천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약속합니다(루카 19,8).
그것은 자기 과거에 대한 회개와 보속의 태도입니다.
도둑질한 것이라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탐욕과 사악으로 모은 재산이라면 당연히 사회에 환원해야 하고,
정당하게 모은 재산이 일부 있더라도
보속하는 뜻으로 그 재산도 사랑 실천에 사용해야 합니다.
만일에 회개한다면서도 그런 보속을 하지 않는다면,
즉 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 회개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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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풂과 정화의 관계 >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1993년에 만든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쉰들러는 독일인이고 나치 당원입니다. 1939년 독일에 점령당한 폴란드로 이주하여, 나치와 결탁해 임금을 줄 필요가 없는 유대인들을 공장의 인력으로 이용합니다. 그런데 유대인 회계사 아이작 스턴의 영향으로 마음속의 양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육백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하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그들을 구출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쉰들러는 돈만 알았던 사업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입니다. 나라도 다르고 민족도 다릅니다. 그러나 그들을 구해야겠다고 결정합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에 필요한 무기와 물자들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쉰들러는 이작 스턴이라는 유대인과 함께 군수 공장을 운영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색출해서 가스실로 보내는 임무를 맡은 아몽 커트라는 사람과 협상을 합니다.
유대인들을 그 군수 공장에 데려다가 일할 수 있게 해 주면 한 명당 얼마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돈을 주고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쉰들러가 자신의 전 재산을 계산해 보니까 850명의 유대인을 구할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유대인의 명단, 그것이 쉰들러 리스트입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1100여 명의 유대인들을 구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고 이제는 안전해진 유대인 노동자들에게 자유를 선언하고 떠나는 쉰들러를 위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금니를 뽑아서 반지를 만듭니다. 그 반지 안에는 히브리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한 자는 세상을 구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반지를 쉰들러의 손에 끼워 줍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동을 준 것은 그 다음 장면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 헤어지면서 쉰들러가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의 차에 오르기 직전 그는 후회의 눈물을 쏟아냅니다. 자신이 타고 갈 차를 보면서 ‘이 차를 팔았더라면 열 명은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고백합니다. 또 자신이 차고 있던 나치 당원 배지를 보며 ‘이 배지를 팔았더라면 두 명의 유대인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절규합니다.
[참조: 다음 카페, 주님의 시선, 예화말씀 묵상]
세리는 예수님 시대에 죄인의 대표적인 대상이었습니다. 그 세리인 자캐오가 예수님을 맞아들이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자캐오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씻는 좋은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왜 자선을 하는데 자신 안에 있는 죄가 사해지는 것일까요?
죄는 하느님과의 단절과 이웃과의 관계 단절을 초래하는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반대는 관계를 다시 이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고해성사 때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죄를 고백하는 것은 교만 때문에 하느님과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선은 끊어진 관계를 다시 맺게 하기 때문에 죄가 그만큼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에게 해 주는 것이 곧 당신에게 해 주는 것이라 하셨기에 하느님과의 관계도 다시 회복되게 됩니다.
쉰들러라는 사람은 자신만 알고 돈만 아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재산을 이용해 1100명이란 유태인을 살렸습니다. 그랬음에도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자동차와 배지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만큼은 깨끗해지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냉장고를 열어볼 때마다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저희 성당 분들은 농사지으시는 것들로부터 시작하여 몸에 좋다는 것을 매우 많이 가져다주십니다. 될 수 있는 한 나누려고 하지만 과일 같은 것은 상해서 버리는 것도 적지 않은 실정입니다. 내 마음이 냉장고라면 나누지 못한 것들 때문에 썩어가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위해 조금이라도 남겨 놓으셨다면 완전히 깨끗한 분이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체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도 남김없이 주시기에 그만큼 깨끗하신 분이고 그만큼 아버지와의 관계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은 내어놓는 만큼 깨끗해진다는 것, 깨끗한 곳에만 하느님이 머무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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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곳간이 채워질 것이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예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겉모양을 깨끗이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즉 자선을 베풀게 됨으로써 깨끗해집니다.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선을 되도록 많이 해야 합니다. 성베드로 솔로그는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올바른 지향으로 하느님을 위해서 자선을 행함으로써 마음을 거룩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외적인 더러움을 씻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거나 마시는 그릇을 깨끗이 씻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외적인 깨끗함보다는 내면의 정결이 더 소중합니다. 모든 불의와 부도덕한 행위에서 정화될 때 그 사람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깨끗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외적 정결함을 강조하고 중요시 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잘 가꾸지 못했습니다. 거짓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들, 안 보이는 속은 내버려두고 겉꾸미는 사람들,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은 그릇을 닦는 일보다 마음을 닦는 일이 우선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외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혼자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주 하느님은 속마음을 들여 다 보시니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을 향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선을 숨겨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마태6,4).
얼굴도 이쁘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 둘 중의 하나가 부족하면 천만다행, 둘 다 부족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마음을 잘 가꾸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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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겉으로는 의인처럼 행세하지만 속에는 탐욕과 사악함으로 가득 차 있는 그들의 위선을 간파하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정작 자신들은 말한 바를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남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운 채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내면의 추한 모습을 가리고자 겉만 화려하게 꾸민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기어(綺語)의 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기어’란 ‘비단 같은 말, 번드레하게 꾸며 낸 말, 교묘하게 꾸며서 겉과 속이 다른 말’이라는 뜻입니다. 진정성이 없는 말을 많이 해, 이 죄를 가장 많이 범하는 사람이 바로 종교인들, 그중에 지도자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인들이 이런 ‘기어의 죄’로 말미암아 죽은 뒤에 가는 곳이 있답니다. 그곳은 한시도 고통이 멈추지 않는, 혀가 뿌리째 빠지는 형벌을 받는 곳입니다. 비록 불교에서 말하는 이야기이지만 사제로 살아가는 저의 등이 서늘해지는 느낌입니다.
말로써 신앙을 고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으로 자신의 믿음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일 것입니다. 사제로 살면서 신자들에게 강론이나 훈화 등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자들에게 한 말을 제 자신도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고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 신자들에게 말은 그럴듯하게 하여 무거운 짐을 지워 놓고 정작 저 자신은 잘 실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저 자신의 모습을 냉정히 들여다보라는 말씀으로 아프게 다가옵니다. 사제인 저에게 위선과 이중적인 삶을 극복하는 것은 평생에 걸친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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