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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시선 원문보기 글쓴이: 카페지기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미국 피츠버그의 한 가구점에 클레멘토 스톤이라는 점원이 있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가게 문 앞에서 어떤 할머니가 누군가를 가다리며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뛰쳐나가 잠간 들어와 불을 좀 쬐라고 하고는 자기가 대신 밖에서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얼마후 아주 멋진 자동차를 탄 신사가 오더니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신사에게 다가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더니 그 신사는 어떤 할머니를 찾고 있다고 말했습니다.그는 할머니 한 분이 자기 가게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신사는 할머니의 아들 이었습니다. 바로 그 신사가 피츠버그의 강철왕 카네기 였습니다. 카네기는 자기 어머니를 따뜻하게 영접한 그 가게 점원의 정성을 기억 했습니다. 얼마후 카네기는 그 가게 점원을 불러서 그에게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의 가게를 갖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카네기는 그에게 가게를 차려 주고는 회사 사무실 마다 모두 그의 가구를 들여 놓았습니다. 그의 가게는 카네기 강철왕이 애용하는 가구점이라는 소문이 났습니다. 드디어 클레멘토 스톤은 이름을 날리는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미움을 심으면 미움을 거두고 자비를 베풀면 자비를 거두고 사랑을 베풀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사랑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주위에 도움을 기다리는 이의 도움이 되주시지 않으시렵니까?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제 목 : 나눔과 받음 본 문 : 눅 6:37-38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신 교훈 중에서 가장 소중한 교육 내용은 산상수훈입니다. 이 산상수훈은 우리 신앙인들이 세상을 살면서 살아가는 방법과 모습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이를테면 신앙인들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살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디에 뜻을 두고 살아야 하는 가를 심도 있게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으로써 성숙하게 되면 가장 먼저 바뀌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생각의 변화입니다. 사람이 미성숙할 때는 무엇을 얻어 먹을까, 어떤 혜택을 받을까를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때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입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고 수지가 맞으면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그것이 어린 아이들의 의식입니다. 아직 어려서 그렇습니다. 미성숙해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성숙하게 되면 무엇을 얻어 먹을까를 생각하지 않고 무엇을 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숙한 모습입니다. 사람이 성숙한 사람인가 어직도 미성숙한 사람인가는 그 부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손해 보는 일을 많이 합닏. 또 그 손해 보는 일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성숙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모습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바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싱앙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성숙한 삶의 모습을 제시하신 말씀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이 두가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실수하게 되는 내용들입니다. 불평이나 비판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주 조심해야 할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비판하고 앉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만큼 무의식적으로 불평하고 남을 비판하는 일에 길들여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 비판이 좋지 않은 이유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에게 피해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비판은 대부분 부정적인 것입니다. 때로 건설적인 비판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남의 흉을 건드리는 내용이 더 많고 남의 약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비판은 좋은 것이 못 됩니다. 또 나쁜 이유는 상대방의 용기를 꺾는 경우가 생깁니다. 누군가 열심히 일하려고 하는데 비판하게 되면 그 사람이 용기를 잃습니다. 낙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 일할 때 비판하려거든 가만히 있어 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격려해 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격려만 하는 것보다는 함께 도와주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사람이 비판을 하다 보면 습관이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런 사람 곁에서 사람들이 다떠나 버립니다. 그것은 비극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아 놓으시고 이렇게 굣훈하십니다. “(눅6: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성숙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남들보다 열 배나 더 수고하고 열 배나 더 땀흘리는 말이 아니고, 나와 이웃간의 관계를 은혜롭게 이루고, 덕을 이루는 생각의 성숙이고, 삶의 방법의 성숙이고, 판단하는 의식의 성숙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전승을 보면 유대인이 높이 평가하는 “6가지 삶의 덕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6가지 덕목을 실행하며 살아가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생활로 여긴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공부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바라는 첫 번째 삶의 덕목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늘 배우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될 수 있으면 많이 배우고 또 배운 것을 가르치는 삶을 가장 좋은 생활의 덕목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환자를 방문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이웃이 필요하고 친구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건강하고 능력이 있을 때는 필요없지만 어려움을 당하거나 곤란을 당할 때는 이웃이 그렇게 필요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환자들을 찾아가서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이 아픈 것도 외로운데 꼼짝을 못하고 한 달 두 달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은 굉장히 답답한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찾아거서 위로해 준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입니다. 어떤 입원 환자를 찾아가니까 그런 말을 합니다. “제가 퇴원하면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을 열심히 찾아 다닐 것입니다.” 병원에 누워 보니까 얼마나 답답하고 외로운지 사람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퇴원만 하면 열심히 입원한 사람들을 찾아 다니겠다고 합니다. 내가 건강할 때 건강을 잃은 사람들을 찾아가 준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것을 삶의 덕목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손 대접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손님 대접하는 일을 하나의 의무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격언에 보면 “손 대접하라 그리하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전통입니다.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 그만 천사를 대접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유대인들은 삶의 덕목 가운데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을 그렇게 기쁨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뿐이 아니고 오늘 우리들에게도 아주 졿은 삶의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번째는 “기도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지금도 하루 세 번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만 되면 가던 길에 서든지, 일하던 중에라도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기도를 합니다. 이것은 그 옛날 바리새인들 때부터 계속되어 오고 있는 전통입니다. 길을 가다가도 그 시간만 되면 거룩하게 서서 두 팔 벌리고 기도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형식주의자들이라고 힐난도 받았지만 하여간 기도하는 일을 하나의 신앙인의 덕목으로 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기도 중에 도고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도고는 내가 남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중보기도이고 중재기도입니다. 남의 아픈 모습이나 고난 당하는 모습을 보고 함께 기도해 주는 것은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내가 남으로부터 기도를 받는 대상이 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내가 남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내가 남을 위해서 기도해 줄 때는 기 기도가 힘이 있고 기쁨이 있고 내 마음의 느낌이 다릅니다. 그래서 도고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로부터 은혜를 입고 사는 것도 중요하고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내가 누구를 사랑해 주고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 주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더 뜻 있는 일입니다. 사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와있는 비유처럼 내가 불한당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내가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구에게 도움이 되어 준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기도해 주어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주위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을 위해 조용히 앉아서 기도해 준다는 것은 먼저는 그 대상에게 사랑의 마음이 전달되고 동시에 내 마음속에는 행복이 임하고 보람이 임하고 기쁨이 임하는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섯 번째는 “자녀를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녀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생각합니다. 이 생각이 참 중요합니다. 자식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맡겨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부모의 소중한 역할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자식은 잘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는 일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말씀으로 잘 가르쳐 기르는 일이 참 양육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잠언서를 보면 그런 말씀들로 엮어져 있습니다. (잠4:1)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이것이 모두 그런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은 부모의 가장 중요한 책임입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대학 입시 때문에 자녀들의 교육에서 우선 순위가 바뀔 때가 있습니다. 불신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 신앙인들까지도 입시 교육이 신앙 교육을 제쳐 두고 순서가 뒤바뀔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고 3이 되면 교회 가는 일을 하나같이 중단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고 대부분 부모들의 뜻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나오면 그 나온 시간만큼 공부에는 지장이 있을 것입니다. 수학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시간 할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가지 말고 그 시간에 집에서 공부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다가 공부 못해서 학교 떨어지고 창피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교회 다니는 것을 잠시 중단하고 공부 잘해서 대학에 합격을 하고 다니면 얼마나 좋으냐,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고 3이 되면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 위험한 발상입니다. 우선 순위가 엄청나게 바뀌어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생활을 하고 열심히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은 모두 대학에 떨어지고 공부를 못합니까? 그런 이론이 어디 있습니까? 그 결과 교회에 잘 다니던 아이들이 입시를 치르는 동안 멀어져서 그 길로 신앙의 길에서 멀어지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신앙의 길에서 멀어지고 난 후에 부모들이 이번에는 교회를 가라고 하니까 아이들이 반항을 하는 것입니다. “언제는 가지 말라 하고 또 언제는 가라 하느냐”하고 부모들의 중심 없는 신앙에 불신을 하고 순종을 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하면 부모들의 어설픈 신앙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물리적으로 시간을 재고 계산하고 숫자적으로 맞추려고 하면 안 됩니다. 신앙의 결실은 그렇게 계산하고 따져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내가 대학에 떨어질지라도 나는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내가 혹시 그렇게 하면 영영 대학에 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차라리 그 길을 택하겠다” 그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 마음이 이를테면 헌신의 삶이고 중심있는 자세이고 순교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교육을 하되 어떤 교육을 하는가 하면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덕목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백성들이 세상에서 실패를 하겠습니까? 한눈을 팔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민족이 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는 “타인의 장점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본문과 일치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비판을 받지 않으리라,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정죄함을 받지 않으리라, 서로 사랑하라 그리하면 너희도 사랑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눔의 생활이고 받음의 생활입니다. 주는 것이 있어야 받는 생활도 있습니다. 칭찬이 있어야 그 칭찬이 다시 내게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서 비판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비판이라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비판하려고 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말하다 보면 내가 남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남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비판은 사람들에게 길들여져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 명이 모여서 이야기를 해보십시오. 틀림없이 비판으로 이야기가 이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의 행복 가운데 하나는 타인의 장점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의 장점을 생각하다 보면 나 자신의 행복해지고 그러다 보면 남의 허물은 다 덮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의 단점을 보기 시작하면 한이 없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단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장점부터 보게 되면 나머지 일은 모두 다 덮어지게 됩니다. 채필근이라는 목회 신학자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딸기를 먹을 때는 먼저 못생기고 뭉개진 것부터 먹으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딸기를 먹을 때 예쁘고 좋은 것부터 골라서 먹습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못생기고 상한 것만 남는데 그때는 배도 부르고 해서 맛있게 먹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못생긴 것부터 골라 먹으면 나중에 남는 것이 예쁜 것만 남기 때문에 끝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사람들이 장점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면 오늘처럼 이렇게 갈등이 많고 불화가 많은 채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늘 이렇게 갈등과 불화가 많은 채 살아가는 것은 싫은 것이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부부 사이에 갈등이 많은 것도 알고 보면 그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너무 오래 살아가다 보니 좋은 점은 보이지 않고 결점만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투기도 하고 큰 소리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피차 정이 떨어지고 그래서 갈등하는 것입니다. 어떤 총각이 음악회에 갔다가 노래를 부르는 처녀가 얼마나 목소리가 아름다운지 그만 그 처녀에게 매료되어서 끈질기게 구애를 한 끝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해서 살다 보니까 아내가 목소리 외에는 볼 것이 없습니다. 잠을 자고 나서 날이 밝으면 그 얼굴 때문에 정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아침이 되어 잠이 깨면 즉시 아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빨리 일어나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내가 노래를 부르면 그 아름다운 목소리 때문에 그만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돌아와서 아내를 탓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점을 강조하게 되면 흠은 덮어지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별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살아지는 것입니다. 미인은 예쁘기는 하지만 자꾸 보면 식상하고 쉽게 싫증이 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추녀는 볼수록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그런 대로 볼 만한 얼굴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남의 장점을 생각하는 일을 삶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남의 아픈 부분을 덮고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넘어가 주는 마음,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이고 자상한 배려입니까? 그래서 그것을 삶의 덕목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모아 놓고 교육하시면서 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도 비판을 받지 않으리라, 남을 정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도 정죄함을 받지 않으리라,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도 용서함을 받으리라, 그리고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리니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에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