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제봉 언저리
지난주 금요일 방학에 들었다. 고등학교 여름방학은 고작 이십일 남짓이다. 고3은 8월 9일 개학이고, 1·2학년은 광복절 직후다. 그런 속 관행대로 보충수업이 며칠 붙었다. 희망 학생들에겐 강좌가 개설되고 교과 담당이나 담임들은 마음이 쓰인다. 수익자 부담이지만 급식소 조리사들도 더운 날 점심 식단을 차려야 한다. 관리자는 식중독이나 전열기 과열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산천을 누비는데 폭염이 예사롭지 않다. 방학 이튿날부터 더위를 물리치려는 부적처럼 몇 자 글을 남겨도 소용없다. 지난 토요일 아침나절 용제봉 산기슭을 다녀온 산행후기 제목은 ‘극염(克炎)’이었다. 더위를 물리쳐 보기 위한 내 소박한 염원을 글에다 담아보았다. 그날 산행 후기를 지인들에게 메일로 보낼 때는 ‘더위야, 물렀거라!’고 호기를 부려보았다.
‘극염’ 이튿날 대학 동기와 영지 채집 산행을 다녀온 일기 제목은 ‘축염(逐炎)’으로 붙였다. 올 여름 폭염은 극복 대상이어야 하고 쫓아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오죽했으면 오키나와 해역에서 발생하는 태풍이 우리나라로 다가와 주었으면 싶을까. 이미 10호 태풍 암필은 상하이를 거쳐 중국 내륙으로 들어 사그라졌다. 이후 12호 종다리가 생겼다는데 우리 지역 더위를 식혀줄 지 미지수다.
극염과 축염 이후 이번 주 월요일 동아리 지도교사로 수도권 대학 탐방을 다녀왔다. 그간 담임에 비켜 있었는지라 학생들과 학교 바깥 행사에서 드물게 동행했다. 그날 학생들과 다녀온 탐방기 제목은 ‘몰염(沒炎)’이었다. 더위도 잊고 장차 대학 입시에 몰입한 우리 학생들의 일정은 하루해가 짧았다. 대단한 폭염 열기를 식혀보고자 ‘염(炎)’자 돌림 제목을 붙여보아도 효과는 별로다.
‘몰염’을 남긴 월요일은 냉방이 된 전세버스로 서울을 다녀와 폭염 기세를 느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강북 소재 두 곳 대학을 둘러오면서 점심나절 캠퍼스에서 느낀 더위였다. 이튿날 용추계곡으로 들어 진례산성 동문을 넘어 길고 긴 임도를 걸어 송정마을로 나갔다. 비로 아침나절이긴 해도 더위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한더위에 그런 여정을 도보로 걸었다면 믿으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제 송정마을에서 면소재지로 나가는 길목에서 지나온 진례산성과 노티재를 돌아보니 하늘엔 뭉게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그날 산행을 다녀온 기록 제목은 ‘뭉게구름’이었다. 여름 하늘에 뭉실뭉실 피어오른 적운은 예술 작품처럼 아름다웠다. 어제는 불모산 숲으로 들어 삼림욕을 겸해 자연산 땀을 흘리고 인적 없는 계곡 웅덩이에서 알탕을 감행했다. 삼복염천 더위를 잊을 만했다.
‘극염’, ‘축염’. ‘몰염’ 이후 염(炎)자 돌림 제목을 붙이지 않고 ‘뭉게구름’과 ‘불모 숲으로’로 달았다. 내가 한자어에 밑천이 달려서가 아니라 ‘염’자를 계속 쓰려니 기약이 없을 듯했다. 예전에 가뭄이 심하면 자연부락 단위나 고을 수령이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 기우제를 지냈다. 말 그대로 비가 오기를 천신에서 비는 의식이었다. 더위가 누그러지길 바리는 진염제(鎭炎祭)라도 지내야 하나.
창원 동쪽이고 김해 서쪽에 용제봉이 있다. 용제봉(龍蹄峰)은 용지봉(龍池峰)이라고도 한다. 해발 천 고지를 넘지 않지만 내가 사는 생활권에서는 제법 고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산자락이다. 지명 어원은 용의 발톱에 해당하는 산세라는 의미다. 인근 웅덩이에서 용이 하늘로 올랐다는 뜻도 담겼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가뭄이 혹심할 때 용제봉 정상부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폭염이 조금도 누그러질 기미 없는 칠월 하순 목요일이었다. 이른 아침 도시락도 곡차도 준비 않고 얼음생수만 챙겨 용제봉으로 향했다. 등산로 들머리는 새벽 산행을 마치고 나오는 이들도 간간이 보였다. 한 시간 반 남짓 걸려 산자락 품이 넓은 용제봉 기슭에 닿았다. 바위틈 흘러가는 계곡물을 아주 맑았다. 숲길을 걷다가 너럭바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겼다 하산했다. 18.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