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칼럼)
아! 이태원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35호(2022.10.15)
정연욱
공법85-89
동아일보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서울 이태원에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역원(驛院)이 있었다. 역원은 일종의 공영 숙소였다. 멀리 출장을 가는 사신과 관리들이 잠시 머물면서 말을 공급받는 곳이었다. 한양 근교에 숙소 네 곳이 있었는데 이태원은 남쪽에 있었다. 지금의 용산 고등학교 앞에 이태원의 유래를 짤막하게 알리는 비석이 서 있다.
오래전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던 만큼 이태원은 역사의 풍상을 겪어야 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군의 병참기지가 있었고,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구한말 임오군란 땐 청나라군이 주둔했다. 청나라와 러시아를 꺾은 일본의 군사기지가 들어섰지만, 해방 이후엔 주한미군이 자리를 잡았다.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상흔이 이태원 곳곳에 켜켜이 쌓여갔다.
우리들의 삶은 빛과 그림자를 아우르는 것일까. 그래도 민초들의 삶은 끈질겼다. 피란민들이 세운 이태원 시장엔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온갖 물건들이 거래되면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됐다. 서울시 관광특구 1호로 지정될 정도로 독특하고 이색적인 분위기 때문에 이태원은 일찌감치 젊은이들과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힙’한 성지가 됐다. 주한미군 기지가 평택으로 옮겨가면서 이태원 상권은 예전 같은 영화를 누리지 못하지만, 이태원의 독특한 매력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보니 그동안 이태원이 언론의 각종 사건 사고 소식에 등장하는 날이 많았다. 인파들이 이태원 클럽에 몰리면서 이태원은 코로나19 팬데믹 확산지로 지목되기도 했는데 이번에 핼러윈 참사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더욱이 희생자들 대부분은 주변의 어린 아들, 딸 같은 젊은이들이어서 착잡한 마음을 가누기 어렵다. 이태원을 찾은 머나먼 외국의 젊은이들까지 희생됐으니 외신들의 관심도 뜨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사 이후 세상을 떠난 이들을 조롱하는 혐오의 언어가 나돈다고 한다. 일부 커뮤니티 사이트를 중심으로 “누가 그런 곳에 가라고 했느냐”는 식의 글들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 익명의 그늘에 숨어서 벌이는 비겁한 ‘마녀사냥’이 아닐 수 없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황망한 참사를 접한 가족과 친구들의 쓰린 가슴은 정녕 헤아리지 못한단 말인가.
온 국민의 애도 속에서 사고 수습이 이뤄지면 이번 참사의 진상 규명은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될 것이다. 철저한 조사로 더 이상 후진국형 재난이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는 일은 없도록 엄정한 후속 조치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얄팍한 정치적 타산도 없어야겠지만, 이번 기회를 공공안전의 중요성에 대한 시민 의식도 제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태원 참사는 기나긴 팬데믹 터널이 끝나고 새롭게 기지개를 켤 무렵에 터졌다. 그래서 더 아련한 것 아닐까. 하지만 가을에 낙엽이 진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새 잎이 돋아나지 않던가. 슬프고 먹먹하지만, 언제까지 애가(哀歌)만 부를 순 없을 것이다. 이태원이 다시 자유와 젊음, 미래의 꿈을 얘기하는 공간으로 거듭나는 날이 올 것이다. 힘들더라도 우리 모두 그날을 차분히 준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유명을 달리한 분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