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일 [제13주간 월요일]
마태오 8,18-22
말을 하는 게 좋은가, 하지 않는 게 좋은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이들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에게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하십니다.
편안함이나 돈, 명예 따위를 보고 당신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장례를 먼저 치르게 해 달라는 다른 사람에게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하십니다.
세상 애착을 끊고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길이 절대 쉽지 않다고 미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기도 사실 쉽지는 않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말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며 십일조도 내야 한다고 예비자에게 미리 말을 하면 그들은
주저할 수도 있습니다.
차근차근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지만, 오늘 복음은 아예 처음부터 말해주는 게 낫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정원 씨의 일가족이 유영철에게 몰살당한 후 고정원 씨는 아내가 다니던 성당에서 혼자 울고 있었습니다.
범인이 잡히면 자살하겠다는 그에게 예비자 교리를 받아서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말해주는 게 쉬울까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어서 고정원 씨는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고 유영철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체조 유망주였던 이승복 박사가 척추가 망가져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때 어떤 선교사가 와서
이것도 다 하느님의 계획 일부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움직일 수 있었으면 주먹이 날아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해주었습니다.
이승복 박사는 그 말을 믿고 운동을 포기하고 의사가 되기로 하여 유명한 재활의학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만약 이들에게 용기 있게 주님을 따르는 법을 알려준 은인들이 없었다면 그들이 자기 힘만으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저도 어떤 이야기들은 주저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의 반대와 비판에 직면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결국엔 말을 합니다.
그때는 욕을 먹더라도 말하지 않는 것보다
말해주는 편이 더 후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백종원 씨가 진행하는 골목상권 살리기 프로그램을 보면 가끔 전문가로서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가게들을 만나게 됩니다.
전문가들 처지에서는 100% 망할 수밖에 없는 가게들입니다.
그리고 백종원 씨는 욕먹을 각오하고 그렇게 할 거면 장사 집어치우라고 합니다.
자신이 처음 장사를 할 때는 명확한 기본규정을 알려준 사람이 주위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해서 그 규정들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백종원 대표는 그들에게서 자기 사진이나 이름을 지우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자기 이미지가 그렇게 보이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전문가일수록 자신을 따를 것인지 아닌지를 명확히 합니다.
김유신 장군은 18세 때 이미 삼국통일의 꿈을 꿉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그 꿈을 퍼뜨립니다.
어머니는 기생집에 드나들며 무슨 통일을 이루겠느냐고 나무랍니다.
이에 김유신은 다시는 기생집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술을 마시고 말에서 잠을 자다가 깨어난 곳이
기생집이었을 때 김유신은 자기가 이끼는 말의 목을 칩니다.
‘중간 정도만 해도 도움이 되겠지’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중간 정도는 해를 입힙니다.
명화에 일반인이 덧칠하면 명화를 망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아버지처럼 완전해질 결심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광야에서 인간적인 면을 완전히 죽일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도 신앙을 가지려는 이들에게 돈과 육욕과 교만을 끊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아예 미리 포기하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정쩡하고 이도 저도 아니고 미지근한 신자가 많이 생기는 것보다 적더라도 신자다운 신자들이 있는 교회가 건강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완전한 그리스도가 되어야 함을 미리부터 알려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8,18-22
진정으로 살아 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 있지만 영혼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태오 복음, 마지막 대목이 계속 제 마음 안에서 메아리 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치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치르도록 내버려 두라니!
이런 얼토당토않은 궤변이 다 있나?
대체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건가?
죽은 이들은 더 이상 육체도 없는데 염은 누가 하고, 상여는 누가 들고?
조문객 접대는 누가 하고, 음식은 누가 만들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죽은 이 안에는 육체적으로 죽은 이도 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이도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죽은 이도 있고 심리적으로 죽은 이도 있습니다.
따지고 보니 빛이요 진리이신 예수님,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요 구원의 보루로 오신 예수님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역시 죽은 이들입니다.
생명과 구원의 길을 뒤로 하고 어둠과 죽음의 길을 선택한 이들 역시 죽은 이들입니다.
돌아보니 저도 한때 죽은 이처럼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 숨은 쉬고 있었지만 거울을 들여다보면 영락없이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영혼 없는 얼굴, 총기가 사라진 눈동자,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느끼지 못하던 죽은 이의 나날이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은 붙어 있지만 죽은 이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위안이 되는 것은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기자단과의 인터뷰에서 당신도 죽은 이처럼 존재하던 순간이 있었노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저에게도 대단히 황폐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저도 매우 황폐한 시기, 어둠의 때를 지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미 제가 죽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저는 고해 사제였습니다.
그러나 패배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토록 견디기 쉽지 않았던 시기에 저는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보상을 받았습니다. 기도는 출구를 일러줍니다.”
죽음 전문가셨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여사께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지금 이순간을 살아가십시오.
삶에서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 아닙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십시오.”
그리 길지 않은 우리네 삶이기에 매일 되풀이해야 할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 삶의 질에 대한 지속적 반성과 성찰입니다.
오늘 나는 참으로 살아 있었는가?
열심히 숨 쉬고 삼시 세끼 제때 밥 먹으며, 분명히 살아있었지만, 이미 내 안에서 어떤 것들이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육체는 버젓이 살아있지만, 영혼이나 정신이 이미 소멸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그래서 더욱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들의 육체는 점점 노쇠해지고 소멸되겠지만, 우리들의 영혼과 정신은 더욱 견고해지고 강건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들이 아무리 열악하고 비호의적이라 할지라도, 또 일어서고 또 넘어서겠노라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 있지만 정신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육체도 살아 있지만 영혼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결국 주님 안에, 그분의 성령 안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강론>
(2024. 7. 1. 월)(마태 8,18-22)
<영적으로 죽은 이가 되지 마라.>
“그때에 한 율법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8,19-22).”
1)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뜻인데, ‘어디로 가시든지’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훌륭한 일’이고, 어떤 어려움이든지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는 ‘좋은 일’인데, 그는 예수님을 따를 때 겪게 될 ‘어려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는 말씀은, “나를 따르려면 대단히 고달픈 생활을 할 수도 있다.
그것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입니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는 “잠시 앉아서 쉴 곳도 없다.”, 즉 안락한 생활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힘든 생활’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16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도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일에 포함됩니다.
여기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왜 따르는가? 그 목적과 이유는 무엇인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온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고, 더 귀한 것입니다(마태 16,26).
그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온 세상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습니다.
가장 큰 것을 차지하려고, 작은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따르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오해하고서 따른다면, 금방 실망하고 떠날 것입니다.
희망이 잘못되어 있으면, ‘따르는 일’도 빗나가게 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도 당연히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만날 수도 있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도 ‘내가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강요당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원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게 됩니다.
2)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가지 마라.”,
또는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지 마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지 마라.”, 즉 “세속 일에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마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루카 10,4).
이 말씀에 대해서,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예수님 말씀은,
세속의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복음 선포를 하려고 떠난 사람은 복음 선포에만 집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씀도 같은 가르침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원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만 집중해야 하고, 세속 일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지 말고, 한눈팔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집에 가지 마라.”도 아니고,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지 마라.”도 아닙니다.
집에 가서도, 또 아버지의 장사를 지낼 때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고, 제자로서(신앙인으로서) 그런 일들을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3) 전승에 의하면, 그 제자는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였던 ‘필리포스’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였는데, 아마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마음이, 또는 믿음이 흔들려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는 말은, 집에 ‘잠깐’ 다녀오겠다는 요청이 아니라, 예수님을 떠나서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이고, 언제 예수님에게로 돌아오게 될지는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너는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권고’, 즉 집에 가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라,
제자의 삶을 포기하지도 말고 중단하지도 말라는 권고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못 가게 해서, 집에 가지 못하고 억지로 예수님 곁에 남아 있다면, 그것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몸이 남아 있어도 마음이 떠나 있으면, 그것은 떠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떠나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는 분이 아닙니다.>
필리포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집에 가서, 장사를 지낸 다음에 다시 예수님에게로 돌아와, 제자로서 충실하게 예수님을 따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