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신을 기다리며
박래여
생각이 많다. 이대로 남은 나날 산 듯 죽은 듯 살다 가야 하는지. 뭔가 마지막 남은 과제를 찾아 혼신을 다하다 죽는 것이 나은지. 문제는 그 혼신을 다할 과제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소설이 쓰고 싶다.’ 단순하게 한 문장에 꽂혀 있는 의식 세계다.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가. 그냥 물 흐르듯 마음의 여로를 따라 쓰는 것이 소설이 될까.
수필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수필, 나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 탁 접어버리고 살던 공모전 사이트를 열어본다. 그 공모전에 도전하기 위해 치열하게 문학 혼을 살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한 때 나도 그랬다. 공모전 사이트를 기웃거렸다. 출품한 작품이 당선되기를 빌면서.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주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돈이 귀한 농촌, 애들은 쑥쑥 자라고, 암담할 때면 글쓰기에 매달렸다. 그 덕에 적지 않은 상을 탔고 상금을 받았다. 좋아하는 일 하면서 대가를 받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공인으로 인정받으면서 공모전을 접었다. 팔십이 넘은 작가도 공모전 도전을 하는 것을 보며 나는 너무 일찍 발을 뺀 것이 아닌가. 후회할 때도 있다. 내 작품을 인정받는다는 것이 욕심일까.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독자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작품, 시인은 시를 통해, 수필가는 수필을 통해,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그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접기가 참 어려웠다. 이순을 넘기면서 그런 욕망도 접게 됐지만 글쓰기는 여전하다. 내 삶을 돌아보는 나날이다.
어떤 때는 내가 참 한심하다. 노인의 자리에 오른 나, 여전히 주부의 자리, 삼시세끼 챙기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씻고 널고 개는 일상을 살고 있다. 여자의 평범한 일상이다. 그 평범함은 남이 준 것이 아니라 내가 택한 길이다. 내게 주어진 일에 몸과 마음을 다하는 것, 혼신을 다해 살면 남는 것이 있을까. 해마다 봄여름가을겨울을 거치면서 내게 남는 것은 나이테고 늙어가는 모습이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 인간계다. 앞을 바라보면 막막하고, 뒤를 바라보면 쓸쓸한 심회다.
노 수필가의 수필집을 받았다. 물끄러미 바라본다. 참 대단한 어른이다. 꾸준히 글을 쓰고 쓴 글을 모아 1년에 한 권씩 작품집을 출간하는 열정이 대단하다. 그 수필가의 개인 작품집 열 몇 권을 쭉 나열해 본다. 작가라면 누구나 개인 작품집을 내고 싶다. 작품집을 엮고 싶으나 자비출판은 엄두도 못 냈던 나도 창작기금 덕에 책을 냈다. 수필집 한 권과 소설집 한 권이다. ‘이제 창작기금 받아 시집 한 권만 더 엮을까?’ 농부에게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누가 읽지도 않을 책 난발하지 마라.’ 따끔한 충고였다.
가끔 나는 서재의 책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다. 나 죽고 나면 저 책들도 모두 쓰레기가 되지 않을까. 고서로서의 가치가 있는 책이 몇 권이나 될까. 장식용으로 전략한 책들이다. 먼지가 시커멓게 묻은 책들을 참 애지중지 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딜 가면 읽을 책부터 찾았었다. 그 책들이 무용지물 같다. 작가로 살겠다는 딸은 내 서재의 책을 버리고 싶으면 버리라는데 교사인 아들은 가만히 두란다. 내 글이 실린 책도 참 많다. 사후에라도 내가 세상에 내 놓은 시와 소설과 수필 중에 명작이 될 만한 작품이 단 한 편이라도 있기나 할까.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잠이 없다. 깊은 잠을 못 잔다. 생각조차 내려놓아야 숙잠을 잘 것 같은데. 생각을 내려놓기가 참 어렵다. 남은 나날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에 초점이 꽂혀서 그럴까. 내 명이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내가 죽을 날을 알 수 있다면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정리정돈 할 수 있을까. 잠신이 긴 여행을 떠났나보다. 언제쯤 돌아와 숙잠을 청하게 해 줄지. 기다리다보면 끝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