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84)
1984년도 제작이니 우리나라에 '84, '85에 상영했으리라 짐작해본다
그당시 가족모두가 관람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기억나는 장면은 미국대사관에서의 어수선한 탈출분위기와 존레논의 'IMAGINE'이 흘러나오는 라스트씬..
1969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에선 20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킬링필드에 대해 대다수는 '폴포트'가 이끄느 크메르루즈가 공산주의 체제를 건설하기 위해 숙청한 것이라고
알고있다
'폴포트'의 크메르루즈는 1975년 4월에 집권한다
그러나 캄보디아에선 1969년부터 본격적으로 사망자가 발생한다
1965년부터 베트남전쟁을 시작한 미국은 '공산주의도미노효과'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베트남 주변국들까지
전쟁대상으로 삼는다
베트남 인접국인 캄보디아는 베트콩섬멸작전으로 시작한 미국의 폭격으로 '69 - '73까지 80만명이 희생된다
이후 캄보디아는 미국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고 결국 '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즈가 '75 - '79까지 캄보디아를
장악하게 된다
폴포트('98사망)
공산주의 이상향을 건설하기위해 '폴포트'는 30만명의 반대파를 숙청한다
미국은 폴포트 정권하의 캄보디아에 무역제재를 감행하고 결국 80여만명의 캄보디아인은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다
킬링필드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미국의 폭격으로 80만명이 사망하고..'폴포트'의 반대파 숙청으로 30만명..
미국의 무역제재로 인한 기아, 질병으로 80만명이 사망한 냉전시대의 대표적인 홀로코스트였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평가는 이 모든 책임을 '폴포트'의 크메르루즈에 집중되어 있다
킬링필드의 전범재판에서 미국의 어느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캄보디아 훈센총리는 '69 - '73까지 발생한 미국에 의한 킬링필드를 담보로 정치적 합법성을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는 대신 킬링필드를 오로지 크메르루즈의 전쟁범죄로 기정사실화 했다
2009년 2월 킬링필드의 전범들은 재판장에 섰다
그러나 정치적 합의에 의해 크메르루즈측의 전범들만 재판에 서게 되었고, 미국측 전범들은 이재판을 끝으로
면죄부를 받게 되었다
베트남전을 일으키고, 캄보디아를 폭격한 미국인배후에 '키신저'가 있으며 킬링필드를 주도한 '키신저'는
베트남과의 평화협정을 계기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다
미국의 뻘짓으로인해 캄보디아인들의 반미감정으로 탄생한 정권이 '폴포트'정권이다
첫댓글 이글은 제 개인블로그에 2010년도 작성한 글입니다.
체제가 어떻건 집권세력의 야욕으로 부역자 뿐 아니라 선량한 국민들도 피해를 입은 사례가 우리나라에서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지도자 및 양 그룹의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적폐'청산은 쉽게말하면 '숙청'으로 보면 큰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김대중, 노무현정부때..이걸 소홀히 해서....이명박때 많이 당했습니다
이걸 옆에서 지켜본 문재인대통이...이번엔 적폐청산(숙청)을 제대로 해야...
머...예단은 그렇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호주에 사는 베트남인들은 자신들의 나라 Vietnam이 공산화 되어서 나라를
잃은 피난민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걸 여러 베트남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확인하였습니다.
본인은 그들의 심중을 잘 모르고 호치민을 존경한다고 말했다가
봉변을 당할뻔 했는데 월남을 떠나 호주에와서 사는 이들은 대부분
친미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자리뱅기도 못타고 해상탈출을 감행한 "보트피플"들
말단 미제 끄나풀 매국부역자들이죠....
어릴적 발꼴통한테 머리제대로
세뇌 되었었죠!!
남한도 미국과 친일 매국노들에 의해 엄청난 죽임을 당했죠..
아마 파고 파면..아마 저 킬링필드는 껌딱지일지도...
동감 입니다.
1970년 미국의 키신저와 닉슨 정부가 베트남전을 확전시키려고 국왕 시아누크가 통치하던 중 외유를 나간 사이에 친미 군부의 론놀을 사주해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수립해 베트남전에 가담시킴.이에 시아누크는 키신저와 닉슨을 저주하며 군사정권 타도에 힘쓰고 크메르 루즈와 연합전선을 수립해 1975년 친미 월남정권 패망 때 캄보디아로 진격해 수도 프놈펜을 함락해 친미 군부정권과 그 협조자들을 처형하지요.
73년 이전의 미군폭격으로 60만, 그리고 종전 후 76~78년에
캄보디아 공산당인 크메르루쥬가 약 200만 정도 학살합니다.
대량학살 무덤이 약 2만곳이 확인됐습니다.
대량학살과 베트남-캄보디아 무력갈등이 함께 발생합니다.
시아누크공은 론놀 정권의 소수 책임자만 처형하기를 주장했지만
폴포트는 거부하고 학살의 범위를 확대합니다.
캄보디아 지식인계층을 철저히 학살하는데 이들이 하노이에서 공부한 친베트남 성향을 띄기 때문이었죠.
교사 95%가 학살당합니다. 한국전쟁 직전에 보도연맹학살처럼 예비검속과 학살 전략과 비슷합니다.
캄보디아 학살에서 매판보수는 미군의 학살을, 진보진영은 중공요소를 무시하죠.
개인주장 형식의 설명보다는 자료제시 형식에 설명이 더 좋지 않을까요.200 만이라는 숫자의 근거를 알고 싶음니다.
@살아봐 영문위키를 보면 6개의 각기 다른 조사결과와 크메르루쥬가 반박했던 내용이 나옵니다.
크메르루쥬의 반박은 200여만이 살해된 것은 베트남군의 위협과 침공 때문이라고 변명합니다.
여러 조사와 크메르루쥬의 반박을 취합하면 120~340만명을 학살한 것으로 보입니다.
베트남종전이후 베트남과 중공-캄보디아의 전쟁이 89년까지 지속된다는 사실을
빠뜨리면 올바른 이해에 실패하게 됩니다.
이러한 괴물은 미군 폭격과 모택동중공의 악행이 교차하면서 탄생했고 베트남의 지역패권은
부수적인 요인이죠.
@분석관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닙니다.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인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대문에 이말이 써있군요..
폴포트의 크메르루쥬는 이러한 200만명 학살은 베트남군의 군사위협 때문에 촉발됐다고 주장하지만
베트남의 소련 유착으로 캄란만 해군기지를 조차해주자 이에
대응하여 중공이 캄보디아에 무기공급하면서 적대화되고
3년동안 친베트남과 지식인,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학살이 캄보디아식 문화혁명 구호아래 진행되자,
베트남은 주력군사력을 동원하여 캄보디아 침공을 단행하게 됩니다.
예전에 캄푸챠에서 귀동냥 했던것이 있는데..
그들은 베트남인을 야비한 민족이라고 폄하했던 기억이 나네요..
다른 역사적 사실도 있겠지만 베.캄전쟁으로도
한 몫 했을거라는 생각도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