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된 겨레, 임금의 사제단, 거룩한 민족, 하느님 백성
1베드 2,2-12; 마르 10,46-52 / 연중 제8주간 목요일; 2024.5.30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만나신 눈먼 사람이 두 사람 나옵니다. 하나는 8장에 나오는 벳싸이다의 소경이고 다른 하나가 오늘 복음인 10장에 나오는 예리코의 소경입니다. 벳싸이다의 소경은 이름 없는 무명씨이고 예리코의 소경은 바르티매오입니다. 벳싸이다의 소경은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이러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 탓으로 그는 눈을 뜨기는 하지만 똑똑히 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두 단계에 걸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마르 8,22-26 참조). 반면에 예리코의 소경 바르티매오는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는 아주 적극적으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원하였습니다. 그의 외침이 시끄럽다고 사람들이 꾸짖었지만, 그는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렇게 두 단계로 자발적인 치유 청원을 한 덕분에 예수님께서는 단박에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에게는 눈에 손을 댈 필요도 없이 오직,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충분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벳싸이다의 소경은 그저 자기 집으로 돌려 보내졌지만, 예리코의 소경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를 수 있다는 특별 배려를 받았습니다.
마르코가 이렇게 소경 치유 기사를 배치한 이유는 8장의 말미에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하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는데 베드로가 펄쩍 뛰며 만류하다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하는 야단을 맞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써 묵시적으로 베드로에게 동조하던 나머지 제자들도 군중과 함께 예수님께로부터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려면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야 한다는 특별 교육을 받았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이 말씀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만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으며, 또한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삶이야말로 부활의 은총을 입고 있다는 보증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이 믿음과 의지를 북돋아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시고 타볼 산에 오르시어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기적까지 보여 주셨습니다(마르 9,2-10 참조). 부활에 대한 믿음과 십자가를 짊어지려는 의지에 있어서 왜 믿어야 하는지 하는 이유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 목표를 보여 주셨다고 하겠는데, 그 목표가 바로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요, 그 이유가 바로 거룩한 변화입니다.
눈먼 처지에서 눈을 뜨게 된 바르티매오는 이 목표와 이유를 깨닫게 된 사도를 상징합니다. 벳싸이다의 무명씨 소경은 비록 눈을 뜨기는 했으나 처음에는 희미하게만 보다가 나중에야 뚜렷이 보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데리고 다니시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마르코는 독자들로 하여금 벳싸이다의 무명씨보다 예리코의 바르티매오가 되라는 편집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부활과 십자가의 진리에 눈을 뜨라는 것이지요. 이는 복음선포의 공리입니다.
복음선포의 목표요 이유가 되는 부활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께서 변화시켜 주실 미래를 미리 보는 눈을 뜨게 해 줍니다. 이 전망의 근거는 과거에도 그렇게 이끌어 주신 섭리에 대한 역사의식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려는 의지는 하느님께서 변화시키라고 우리에게 명하시는 사회를 멀리 보게 해 줍니다. 나와 우리의 이해관계나 관심사에 갇히지 않고 공동의 선을 볼 수 있는 사회의식과 사명의식에 눈을 뜨는 것이지요. 그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는 늘 사회악에 물든 사람들이 이익을 더 얻기 위해 다투고 갈등하는 모습이 끊이지 않는데, 이런 현실에 대해서도 쉽사리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열어 주실 공동선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안목도 열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느님께서 열어 주실 미래를 보고, 이 미래를 함께 열어 갈 공동선도 볼 수 있는 눈을 뜨기를 바라셨습니다. 미래를 보는 눈은 역사의식에 근거한 부활 신앙이요, 공동선을 보는 눈은 사회의식과 사명의식에 근거한 십자가 의지입니다. 우리가 눈을 뜨면 예수님께서 비추어주시는 세상의 빛이 보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기대를 제대로 교육받았던 베드로 사도는 자기 자신의 체험에 바탕하여 신자들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갓난 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1베드 2,2) 그리고 이어지는 권고에서,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1베드 2,3) 한 내용은 자기 자신의 고백을 겸한 것 같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신원을 ‘살아 있는 돌’에 빗대어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투철한 자의식을 갖출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 2,4-5)
사도 베드로가 쓴 이 글은 분명히 평신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거룩한 사제단’이 되라는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아직 현재와 같은 교계제도를 갖추기 전에 이 편지가 쓰여 졌음을 감안하면, 사도 베드로의 이 표현은 초대교회가 이미 놀라울 정도로 성숙한 자의식을 갖추고 선명한 정체성까지 공유하고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은 평신도와 사제라는 교회 신분의 기능적 구분이 생겨나기 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사제직무 의식을 그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이 갖추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무려 2천 년만에 회복하자고 강조한, 평신도 사제직무입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직책이 있지만 그 사명은 오직 하나뿐이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성화하며, 다스리는 임무를 그리스도한테 받았다. 평신도도 또한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에 참여하며 교회와 세계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사명을 자기 나름으로 완수하고 있다. 평신도들은 복음 선포와 인간 성화에 힘쓰며,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며 현세 질서를 완성하는 활동으로써,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명백한 증인이 되고, 인간 구원에 이바지하므로, 이런 활동으로써 그들은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세속에 살면서 세속 일에 파묻혀 있는 것이 평신도의 특징이므로, 그들이야말로 그리스도교적 정신에 불타며, 누룩 같이 되어, 세속 안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평신도 사도직 교령, 2항)
공의회가 강조한 평신도 사제직의 핵심 내용은 이미 사도 베드로가 2천 년 전에 강조했던 바였습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ㄱ) 이렇듯 비상한 자의식의 배경에는 다신교 풍습에 물들어 황제 신격화를 자행하며 황제 숭배를 강요하던 당시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 죄악의 어둠과 진리의 빛을 날카롭게 대비하고 있는 사도적 안목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1베드 2,9ㄴ)
이 사목 서한의 수신인들은 ‘이방인과 나그네’로 살고 있지만, 로마제국의 세속적인 분위기가 조장하는 욕망을 멀리하라는 권고를 받고 있습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보다는 “바르게 처신하며 중상 모략을 이겨내고 꾸준히 착한 행실”(1베드 2,11-12)로써 하느님을 찬양하는 깨끗한 영혼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찬양을 드림으로써 그분의 영과 소통하는 혼이야말로 생기 있는 영혼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영적 현실과 진실에 눈을 뜨면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벳싸이다의 무명씨 소경처럼 단계적으로 또한 수동적으로 눈을 뜨기 보다는 이왕이면 예리코의 바르티매오 소경처럼 단번에 또한 능동적으로 눈을 뜨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베드로의 사도적 권고를 상기시켜 드립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첫댓글 늘 감사드립니다.
숨가뿐 일상안에서 지칠때도 있지만 이끌어 주시는 말씀으로 힘을 얻습니다.
바르티메오의 능동적인 자세를 택하는 일상으로 주님의 영광스러운 백성이 되고자 합니다.
잘 읽어 주시고 댓글을 달아주셔서, 제가 바라는 소통을 해 주시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