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계 고교 시험을 보지 않고 안양예고에만 응시한 나는 운 좋게 합격을 했다.
부모님이 충남 보령에 사시기 때문에 나는 안양의 어딘가에 살아야 하는데 하숙을 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기로 했다.
나도 자취는 싫었다.
천호동에서 중학교 다닐 때 자취하던 친구 이동희 녀석 집은 정말 개판이었다.
여자 애들이 넘치는 것은 물론이고 술과 담배 심지어 가스에 본드 까지 정말 지랄 맞은 탈선의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곳이었다.
딱 한번 그 집에 놀러 갔는데 영숙이란 날라리 캡짱 여자애가 날 부르더니 내 입에 지가 처먹던 사탕을 밀어 넣은 것이다.
그냥 얼떨떨 있다가 바보가 되었다.
너무 당황해서 혼자 한없이 암사동 거리를 돌아다니는 바람에 나는 성당 예비자 교리 마지막 출석을 못하게 되었고
영세를 받지 못했다.
아이리스에서 이병헌이 김태희에게 사탕 키스 하는 것이 화재가 되었는데 영숙이 년이 생각나서 토할 뻔 했다.
암튼!!!
난 하숙집에 들어갔다.
박달동의 어느 연립 주택이었는데 열악한 환경이었다.
연탄가스가 너무 심해서 고생했다.
세탁기도 없어서 엄마가 짤순이 하나를 사주기도 했다.
근데 내가 담배를 피운다고 쫓겨났다. (연탄가스나 담배나)
두 번째 집은 정말 좋았다.
인하대 화공과를 나와 화장품 회사 다니는 형과 함께 살았는데 즐거웠다.
바퀴벌레가 하숙집 쌀통의 쌀 숫자보다 많은 것이 흠이었다.
밤에 화장실 갈 때는 바퀴들이 숨으라고 헛기침부터 하고 나갔다.
그 집이 이사를 가는 바람에 나는 학교 앞 한화 계열사 직원들이 많이 사는 깔끔한 프라자 아파트로 옮겼다.
후배 한명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이게 뭔 복인지 시청 프라자 호텔 양식부 계시는 분 집이라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담배피고 밤마다 커피포트에 라면 끓여 먹는 꼴통들에게 너무 잘해 주신 그분들이 지금도 죄송하고 고맙다.
그 후 나는 대학에 들어가고 후암동 수도여고 뒤편 하숙촌에 들어갔다.
그 곳은 엄청난 동네였다. 한 집에 2백 명이 하숙하는 집도 있었다.
나는 일본식 집에 1층 한 방. 2층에 5개의 방이 있는 곳에 혼자 하숙을 했는데
앞방은 도피중인 건달 형이 살았고 옆방은 재수생들이었다.
아래층에는 김영상 이라는 형이 살았는데 밤마다 나를 데리고 이태원의 어느 호텔 나이트를 데려갔다.
그곳 bar에서 ‘블랙러시안’ 이라는 칵테일을 많이도 사줬다.
학교에서 일찍 돌아올 내가 아니기 때문에 밤마다 살벌한 쇠 철조망을 넘어 방에 들어갔고
친구들이 끊이지 않게 데리고 갔다.
겁나 목소리가 큰 아줌마는 내게 맨 날 소리를 쳤지만
나는 이미 꼬리 아홉 개 하숙의 달인이 되어 버려서 눈 하나 꿈쩍 하지 않았다.
심지어 주인집 밥 먹을 때 들어가서
“반찬 나랑 뭐 다른 거 먹는 거 아냐?” 소리 친 적도 있었다.
그 집에서 개그맨 되고도 한참을 더 살았다.
그 후 전세방으로 옮기고 군대 가고 세월 흐르고 월세 전세 이사 총 16회 만에 집을 사고
결혼하고 배에 기름 끼며 살았다.
명절에 딸 보령이와 아내와 후암동 하숙집을 찾았다.
절을 드리고 예전에 너무 괴롭혀서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고 나왔다.
집은 신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숙은 그만 하신단다. 하긴 나 때문이라도 못할 것이다.
새 학기다.
대학가는 하숙집 구하는 전쟁이 한판 지나갔다. 아!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처음 하숙 하는 애들이 주인집과 마찰로 옮기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신세대의 자유의지에 부응 하고자 하숙보다는 원룸이 느는 추세다.
그러나 부모 마음이 어디 그러나. 밥은 먹는지.
우리 자식이 애는 착한데 혹시나 나쁜 년놈들이 꼬셔서 집에 와서 자빠져 자지는 않는지 얼마나 걱정이 되겠는가.
하숙집은 일단 안전함과 건전함을 어느 정도 유지하게 해준다.
확 닥친 자유를 어느 정도 제어하게 하는 좋은 장치다.
대학가 주변 개발로 인해 새로 짓는 집은 거의가 원룸 다세대 주택 위주로 세운다.
그 덕에 기숙사 구하지 못한 애들은 보증금 구하는데 죽어나고 있다.
새 학기 하숙집 전단지가 줄어드는 게 안타깝다.......내 첫키스를 망친 영숙이 나쁜Xㅠㅠ
첫댓글 요즘 하숙집 관련 문제를 쓰려고 한 글인데 일간스포츠에서 제목을 '첫키스를 망친 영숙이'로 써서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