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만 친구, 가수 최백호
암울한 시절을 백년설 고복수 이난영 같은 가수가 없었다면 어떻게 견디어 냈을까?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당시 고복수 '타향살이'(1934), 이난영 '목포의 눈물'(1935)은 의욕을 잃은 국민들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1940)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 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
첫 구절부터 나라 잃은 설움에 백성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6· 25 직후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1953),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1954) 이런 노래가 없었다면 누가 전쟁의 상처를 어찌 어루만져 주었을까?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미스터트롯은 우리 것을 즐긴다는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트롯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는, 젊은이들까지 열광하는 장르로 금의환향한 것이다.
더욱이 '코로나 사태'라는 국가적 비상 상황 속에서 거둔 성과다.
거리두기 캠페인 영향으로 안방에서 TV를 본 시청자들로 부터, 미스터트롯은 힘들고 어려웠을 때 큰 위안이 되었다는 응원이 많았다.
14살 어리광 부릴 꼬마가 천연덕스럽게 아저씨들의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을 때 어라? 뭐여? 당찬 녀석이야! 하며 말문이 막혔다.
저마다 어려운 사연을 가진 출연자들이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이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미스터트롯'이 있어서 고마웠다.
출연자 김호중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처음 도전하는 트로트에서. '나처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용기를 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관중들에게서 위안을 받았다.
팬들이 붙여준 '트바로티'란 별명을 가장 사랑한다는 그는 이미 그들로 부터 '마음의 왕관'을 받았다.
김성주가 진행하는 미스터 트롯은 성악이건, 재즈건, 트로트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도전해보고 싶은 무대였다.
최백호 선배는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 같아. 제 롤 모델입니다. 저는 선생님처럼 노래하는 가객이 되고 싶어요. 저처럼 어두운 시절을 지내고 있는 아이들을 도우며 함께 노래하고 싶습니다.
가수 김호중이 존경하는 가객 최백호는 누구인가?
흰 머리조차 낭만적인 최백호는 스니커즈를 즐겨 신는, 소탈하지만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멋쟁이다.
낭만에 대하여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리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리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최백호의 음악 세계
저는 음악을 기초부터 공부한 사람이 아니에요. 36년 음악 인생, 오로지 노래에만 집중했어요.
제가 데뷔할 당시 카세트 테이프도 나오기 전인 LP시대잖아요. 노래를 부르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녹음을 하는 힘든 작업이었죠. 하지만 전 그 때가 좋았어요.
요즘 음악은, 연주나 녹음을 따로 하니까 너무 완벽해서 인간미가 없어요. 나중에 기회가 오면 아날로그 방식으로 하겠어요.
아쉽지만 저는 인생의 후반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요. 그래서 지금이 가수로서 전성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살기 보다는 자연의 순리대로 욕심 없이 살아요.
「낭만에 대하여」로 큰 인기를 누렸을 때도, 오랫동안 슬럼프를 겪었을 때도, 저는 환경에 쉽게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거든요. 오라는 대로 오고 가라는 대로 가고, 그렇게 살았어요.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어렸을 적에는 화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또한 시나리오도 쓰며 영화감독이 되려고도 했습니다.
근황을 물으니, 축구도 하고, 골프도 치고, 그림도 그리며 취미를 즐깁니다. 요즘에는 ‘나무’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어요.
낭만에 대하여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리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리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저는 가수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은 노래를 부를 때죠.
나이가 들면서 소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자꾸 생각납니다. 젊었을 때는 그 의미를 잘 몰랐거든요. 이제야 좀 알 것 같아요.
최백호의 음악 인생
최백호는 부산이 고향이다. 재대 후에는 부산에서 음악감상실은 전전하던 중 하수영을 만나 가수로 데뷔하였다. 곡은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그 곡은 3개월 만에 6,000장이 팔려 가요계에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연이은 히트로 데뷔 1년 만에 톱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인기가수 산울림, 김만준, 사랑과 평화, 전영 등과 함께 대학가에서 폭발적인 인기로 가요계를 휩쓸었다.
또한 그의 창법은 주류를 이루던 트로트 가요를 밀어내고 새바람을 일으켰다.
최백호의 인생은 다사다난했다.
전성기를 누비던 1980년, 국민배우 김자옥과 결혼을 했다.
영일만 친구로 TBC 방송가요대상 남자가수상을 수상하였다.
김자옥과 이혼, 손소인과 재혼, 인생의 냉탕과 온탕을 골고루 맛보았다.
아버지는 28살에 국회의원이 된 풍운아였는데, 최백호가 태어 난지 겨우 5개월 만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애비 잡아먹은 자식이라는 할아버지의 노여움 때문에 집을 나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대학 연극영화과에 합격했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진학을 포기하고 그림공부를 했다.
군에 입대를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결핵을 앓았다.
부산의 어느 해수욕장 인근을 전전하다가, 돈이 떨어지자 중고 기타를 들고 산속으로 들어가. 오두막집을 짓고 2년간 지독하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
기타를 치고, 노래도 부르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그를 따라다니던 방랑벽을 잡았다.
그의 노래에 쓸쓸함이 짙게 묻어나오는 것은 어린 시절을 힘들고 외롭게 보냈기 때문이다.
부산 서면에 통기타 라이브 클럽을 운영하는 매형의 권유로 가수 생활을 하다가,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짙은 음색으로 인기를 얻자 마침내 꿈의 무대인 서울로 진출했다.
절망적인 순간에 통기타를 들고 노래를 했다. 그런데 돈이 들어왔다.
노래를 부르면서 ‘좋다’, ‘즐겁다’ 하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다. 돈이 들어오니 밥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그는 먹기 위해서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1977년에 데뷔곡인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발표했다. 어머니를 여의고, 부산의 어느 황량한 해변을 거닐다가 쓴 가사다.
사람들이 제 노래를 왜 좋아할까? 억지로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부른다. 내가 살면서 겪은 삶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재혼한 부인 손소인은 콘트라베이스를 전공하던 악도였다. 부모들은 미국에서 산다. 최백호보다 10살 연하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잊겠냐마는. '낭만에 대하여'도 그 시절에 나왔다. 테이프는 꽤 많이 팔렸다. 지금도 계속 팔리고 있다.
제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가장 좋았던 시절은 50대였던 것 같다. 그때 돈을 많이 벌었거든요.
까꿍 아침산책 200330
첫댓글 대중가요에 미사여구가 심하면 현실성이떨어지죠~ 있는 그대로 표현한것이 가장진실 되게 와닿습니다
그래서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