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3년 02월 13일 익산 왕궁리 유적 인근 서동 생가 터에서 대형석축 저온 저장고와 가마터 등 다양한 유적이 발견되었다. 백제 시대 최대 사찰인 미륵사지와 백제 무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판명된 쌍릉, 왕실 사원으로 무왕 시기에 창건된 제석사지, 관방 유적인 익산토성 등 백제 시대 유적과는 1km 이내에 있어 백제 후기의 저장시설로 보이며 백제 왕실과 관련 있는 시설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조선의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익산’조를 보면 “마룡지(현 연동제 연못)는 오금사 남쪽 100보 자리에 있다. 서동대왕의 어머니가 축실(築室·집을 지은)했던 곳이라 한다.” 마를 태어 팔다가 용(龍·임금)이 된 맛동(서동)이 태어난 연못이라 해서 마룡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주변에는 서동의 설화가 담긴 지명이 많다.
서동의 어머니가 집을 짓고 살았다는 축실지(築室地)가 있고, 남쪽 기슭에는 서동이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오금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익산에는 오금사(五金寺)가 있는데, 서동이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고, 마를 판 땅에서 다섯개의 금덩어리를 얻었다”고 했다. 또한 생가터 위 쪽에는 오금산에서 흐르는 물이 고여 마룡지에 모이는 용샘이 있는데, 이 용샘이 있는 마을을 용골이라 일컫고 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설화나 야사의 모음이라 할 수 있다. 서동왕자, 즉 백제 무왕(재위 600~641)의 익산 천도 기록 자체는 <삼국사기>에는 없다. 그렇다면 서동 생가터에서 확인된 백제 냉장고는 서동과는 전혀 관계없는 유구가 아닐까.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그동안 백제를 한성백제(기원전 18~기원후 475)와 웅진백제(475~538), 사비백제(538~660) 등으로 구분했는데, 이제는 익산 백제도 당당히 포함되었다.
1953년 일본 교토 사찰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를 마키다 다이료(牧田諦亮·1912~2011) 교토대학 교수가 1970년 공개했다. 이 자료에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 목록에 공주(2곳), 부여(4곳)와 함께 익산(2곳·왕궁리 유적과 미륵사터)가 들어가 있다. 오래전부터 무왕 때 익산 백제가 신(新)수도 구상에 따른 천도였거나 혹은 별도로 조성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고고학 자료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중 왕궁리 유적을 보면, 역사기록은 없지만 왕궁리(王宮里)로 불린다. 그러다보니 고조선의 준왕이 해로를 따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설, 후백제 견훤 도읍설, 신라의 삼국통일 후 고구려 유민들을 위해 세운 보덕국의 수도라는 설 등 다양한 견해가 나왔다. 물론 백제 무왕의 익산 별도(別都)설이나 천도설을 입증할만한 주장은 아직 없다.
<관세음음험기>는 제석정사가 불에 탈 때 “탑 아래 초석 속에 넣어두었던 귀중품 가운데 불사리병과 금강반야경만이 기적적으로 무사했다”고 특별히 기록했다. 실제로 불에 탄 제석자의 부재들이 인근 폐기장에서 확인됐다. 그런데 1970년 마키타 다이료 교수가 10세기쯤 편찬된 <관세음응험기>를 찾아냈는데, 여기에 무왕의 익산천도 기사가 보였다.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금마)로 천도하여 사찰을 경영했다. 하늘에서 비와 함께 뇌성벽력이 내리쳐서 새로 지은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었다(정관 13년·639년)”는 내용이었다.
<관세음음험기>는 제석정사가 당한 피해사례를 언급하면서 “탑 아래 초석 속에 넣어두었던 귀중품 가운데 불사리병과 금강반야경만이 기적적으로 무사했다”고 특별히 기록했다. 그런데 1965년 왕궁리 석탑 해체수리 때 사리장엄구는 물론 금판 금강반야바라밀경 19매가 발견됐다. 백제인들이 제석사 화재 때 수습한 사리 및 금강경을 왕궁리 석탑으로 옮겨 봉안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렇다면 <관세음응험기> 기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다.
이후 왕궁리에서는 공주 공산성이나 부여 부소산성 등 백제 도성에서나 볼 수 있는 상급의 유물들이 계속 나왔다. 한반도에서는 한번도 확인되지 않은 최고급 중국제 청자 조각 등도 출토됐다. 또 ‘5부명’ 인장와와 ‘수부(首府·군주의 거처 및 중앙정부가 있는 수도) 명문 인장와’는 이곳이 도성이었음을 암시하는 결정적인 증거다. <삼국사기> ‘잡지’는 “백제는 오부(五部)를 두어 37군, 76만호로 나누어 통치했다”고 했다. 또 <주서> ‘이역전·백제조’는 “수도에 1만가가 있어 이를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 등 5부로 나누었다”고 했다. 왕궁리에서는 <주서>에 등장하는 5부 중 후부(後部)를 제외한 4부의 명칭이 모두 발견됐다.
그렇다면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사랑과 미륵사 창건 설화는 어떨까.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무왕(서동)과, 왕후(선화공주)가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못가에서 이르렀을 때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이 때 부인(선화공주)이 “이곳에 큰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했다. 무왕의 명을 받은 지명법사가 하룻밤 사이에 3탑3금당을 갖춘 절을 세웠다 그것이 미륵사다.
그것을 뒷받침하듯 미륵사는 ‘중앙탑+강당’, ‘서탑+강당’, “동탑+강당” 등 3탑3강당으로 조성된 것이 확인됐다. 연못과 같은 습지에 조성되어 있다는 것도 확인됐다. 절터의 주춧돌이 다른 절과 달리 높게 세워진 모습인데 이것은 늪지라는 특수성 때문에 주춧돌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산을 헐고 연못을 메워 절을 조성했다”는 <삼국유사> 기록과 일치한다.
지난 2009년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설화가 거짓일 수도 있다는 식의 발굴결과가 나와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미륵사 서탑에서 ‘탑을 세운 이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명문금판이 나왔다. 그러나 만약 무왕의 부인이 1명이 아니라면 어떨까. 서탑이 사택적덕의 딸이라면, 중앙탑은 선화공주, 그리고 동탑은 또다른 무왕의 부인일 수도 있다.
굳이 ‘서동왕자과 선화공주’ 설화를 버릴 필요가 없다. 또하나 익산 쌍릉의 주인공을 두고도 논란이 벌어졌다. 그런데 최근의 재발굴 결과 대왕릉의 주인공은 사실상 무왕으로 확정했다. 대왕묘에서 확인된 102개의 인골분석 결과 인골의 키가 161~170㎝, 나이는 50대 이상의 남성 노년층, 연대는 620~659년으로 추정됐다. 게다가 주인공을 안장한 나무관이 무령왕릉처럼 일본산 금송으로 밝혀졌다. 또 그 시대에 이만한 크기의 무덤을 조성한 인물이라면 무왕이 틀림없다는 견해가 정설이다. 물론 소왕릉의 주인공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다. 그러나 그 주인공이 선화공주일 가능성은 아직 남아있다.
백제 냉장고 확인지점은 서동의 어머니가 집을 짓고 살았던 곳과 겹친다. 향후 백제 시대 초석과 기와 등이 출토되고 있는 서동생가터를 발굴하면 유의미한 성과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냉장고 확인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서 1980년대부터 기와 및 토기편이 계속 출토되었다. 2011년에는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와 같은 종류의 토기편(뚜껑)이 연못(마룡지)둑에서 수습되었다. 그런데 그 인접지역에서 새롭게 냉장고 시설이 확인된 것이다.
냉장고가 별견된 주변의 유기물을 연대측정 해보니 6~7세기 정도로 추정되었다. 무왕의 생존 연대(재위 600~641)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번에 확인된 냉장고 역시 무왕과 선화공주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두 분이 드신 곡물과 과일, 채소, 음료를 보관한 왕실의 냉장고일 수 있다. 1400년 동안 무왕과 관련된 갖가지 설화가 전해졌는데 이번에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