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거라 나는 간다..." 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대전역을 배경으로 이별의 아픔을 그리며,
끈적한 블루스 리듬과 애절한 가락으로
헤어지는 사람들의 비통한 심정을 잘 담아낸,
“대전 블루스” 라는 대중가요이다.
이 노래의 가사 중에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0시 50분)" 이 부분이
유명하여, 흔히 "대전발 영시 오십분(0시 50분)“
이라고 지칭하기도 했으며, 이 노래의 가사로, 이야기를 엮어 1963년에 영화가 만들어졌을 때도《대전발 영시 오십분》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1959년 어느 날 밤 12시40분경.
산책 나온 듯한, 한 사내의 시선이 대전역 내
플랫폼 가스등 아래 머문다.
청춘남녀가 두 손을 꼭 잡고 눈물 글썽한
시선으로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다.
북쪽에선 남자를 떠나보낼 목포행 0시50분 증기기관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사내는 곧바로 여관으로 되돌아가 시를 쓴다.
‘대전블루스’ 가사였다.
사내는 당시 신세기레코드사 사업부
직원이었던 ‘최치수’ 씨로 지방출장을 위해, 대전역 인근에서 유숙하고 있었다.
최씨의 가사를 받은 작곡가 ‘김부해’씨는 블루스로 리듬을 정한 뒤, 3시간여의 작업 끝에 ‘대전블루스’ 를 완성했다.
가수는 블루스를 잘 부르는 ‘안정애’ 씨로 정해 녹음에 착수했다.
출반 3일 만에 서울 지방 도매상으로부터 주문이 쇄도했다. 대전블루스는 야간작업까지
강행, 창사 이래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고, 작사. 작곡가, 가수에게 특별 보너스와 월급
인상 혜택이 돌아갔다.
십 수년이 흐른 뒤,
이 노래는 ‘조용필’ 씨의 리바이벌로 세상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모임이 있을 때, 술이 몇 순배 돌아가면 누군가 좌중을 헤치고 비척비척 일어나, 소주병이나
막걸리 병을 입에 대고 목청껏 부르는 노래가 대전블루스다.
피서 철이면 대전역 광장에 몰려드는 젊은이 들이 한 잔의 술과 함께 야간열차를 기다리며 즐겨 부르기도 한다.
술이 뒤따라야만 제 목청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노래는 우리의 전통적 정서를 잘 담고 있다.
아리랑 관동별곡 진달래처럼 만남과 이별,귀향과 가출, 생성과 소멸의 상반된 이미지를 내포한 역(驛)을 내세워 60년대 어려웠던
소시민의 애환을 달랬다.
기다렸던, 혹은 오지 말아야 할 막차가,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오는 역의 실루엣은, 작가들의 단골 소재다.
80년대 나온 ‘곽재구’의 시 '사평역 에서' 와‘임철우’의 중편소설 '사평역' 은, 해방과 6.25, 조국 근대화에 멍든 민중들의 아픔을 역의 대합실을 통해 서정 적으로 그려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 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곽재구’의 이 시는, 당시 대전 발 0시50분 열차를 기다리는
대합실 분위기를 묘사한 듯하다.
1959년 2월 제33열차로 탄생한 이 기차는 밤 8시 45분에 서울을 출발, 대전에 0시40분 도착, 다시 목포를 향해 0시50분에 출발했다.
지금은 서대전역을 통해 호남선이 다니지만 당시에는 대전역을 거쳐 갔다.
이 열차를 이용한 사람들은 대전역 인근 시장에서 광주리 물건을 팔던 농사꾼이거나 술에 얼큰히 취해 막차를 기다리던 지방 사람들이었다.
방학 철에는 캠핑이나 귀향하는 학생들로 새벽열차가 북적대기도 했다.
대전 발 0시50분 열차는 지금은 없다.
1년만인 1960년 2월, 대전 발 03시05분발 차로, 시간이 변경되면서 짧은 수명을 다했다.
레코드사 사장에까지 올랐던 ‘최치수’씨와 ‘김부해’씨는 이미 운명을 달리했고, 가수 ‘안정애’씨만이 과거 영광을 뒤로하고
생업에 전념하고 있다.
대전역 부근 허름한 선술집에선 지금도 쉰 목소리의 대전블루스가 흘러나온다.
- 모셔온 글 -
♡허목 (許穆) 과 송시열 (宋時烈)♡
조선 효종 때 당대의 두 거물 정치인. 명의이자 영의정을 지낸 남인南人의 거두 허목 許穆과 학자이며 정치가이기도 한 효종의 스승인 노론의 영수 송시열 領首 宋時烈 이야기다.
당시 이 두 사람은 아쉽게도 당파로 인해 서로가 원수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그러던 중 송시열이 큰병을 얻게 되었는데 허목이 의술에 정통함을 알고 있던 송시열이 아들에게 "비록 정적일망정 내 병은 허목이 아니면 못 고친다. 찾아가서 정중히 부탁하여 약방문(처방전)을 구해오도록 하라!"며 아들을 보냈다.
사실 다른 당파에 속한 허목에게서 약을 구한다는 건 죽음을 자청하는 것이었다.
송시열의 아들이 찾아오자 허목은 빙그레 웃으며 약방문을 써주었다.
아들이 집에 돌아오면서 약방문을 살펴보니 비상을 비롯한 몇 가지 극약들을 섞어 달여 먹으라는 것이었다.
아들은 허목의 못된 인간성을 원망하면서도 아버지 송시열에게 그대로 갖다 주었다.
처방전을 살펴 본 송시열은 아무 말 않고 그대로 약을 지어오라고 하고서 약을 다려 먹었는데 병이 깨끗히 완쾌되었다.
허목은 "송시열의 병은 이 약을 써야만 나을텐데, 그가 이 약을 먹을 담력이 없을테니 송시열은 결국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허목이 비록 정적이긴 하나 적의 병을 이용하여 자신을 죽일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송시열이 완쾌했다는 소식을 듣자 허목은 무릎을 치며 송시열의 대담성을 찬탄했고, 송시열은 허목의 도량에 감탄했다.
서로 당파싸움으로 대적하는 사이지만, 상대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인정을 하는 허목과 송시열과 같은 그런 인물이 현세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은 믿음과 함께 젊어지고 의심과 함께 늙어간다.
사람은 자신감과 함께 젊어지고 두려움과 함께 늙어간다.
사람은 희망이 있으면 젊어지고 절망을 느끼면 늙어간다
나를 비우면 행복하고 나를 낮추면 모든 것이 아름답다.
항상 밝고 건강한 삶 영위하시길 바랍합니다.
현세의 국회의원 정치하는 사람들도 허목과 송시열의 관계처럼 정치를 해주면 좋으련만 서로의 주장만 앞세우고 양보와 타협이 없는 정치는 요원의 불길 일까요 ?!
허목:1595년 01월 10일 생으로 조선후기때인 후반 군주권 강화를 통한 정치 사회 개혁을 주장했던 문신 본관은 양천 자는 회보 문보 호는 미수 대령노인으로 1660년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당시 집권세력인 송시열등 서인이 주장한 기년복(만1년상)에 반대하고 자최삼년을 주장했다.
1675년 덕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의 처벌문제를 놓고 강경론을 주장하여 온건론을편 탁남과의 대립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직을 삭탈 당하고 고향에서 후진교육에 힘쎴다 1682년 6월 2일 임종했다.
송시열: 1607년11월21일 생으로 조선후기의 정통성리학자로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 호는 우암 주자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으며 17세기 중엽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렸을때 서인 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명을 존중하고 청을 경계하는 것이 국가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강상윤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서 국가 사회 기강을 철저히 확립 하고자 하였다 1689년 06월 08일 임종했다.
- 모셔온 글 -
《재미있는 유머》
ㅎ 취객 ㅎ
게시판에 국회의원 입후보자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술 취한 사내가 게시판을 한참 바라보더니 지나가던 경찰에게 물었다.
"경찰 아저씨!
여기 붙어있는 이놈들은 도대체 무슨 나쁜 짓을 한 놈들입니까?"
"여보세요, 이건 현상수배 사진이 아니라 국회의원 선거
포스터에요!"
그러자 술 취한 사람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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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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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앞으로 나쁜 짓을 골라서 할 놈들이구먼 ㅋㅋㅋㅋㅋ
첫댓글 줄거리보다 유모가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