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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가장 쉽고도 어려운 길인가? '내가복음'식 기도가 많은 이유...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 14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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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맺는 이웃과의 모든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핵심가치는 친밀함입니다. 친밀함이 있을 때 실제로 일이 풀려나갑니다. 그러나 친밀함이 깨어지면 될 일도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밀한 관계가 있을 때 일상 속에서뿐만 아니라 직업 차원의 여러 중요한 일에서도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경우가 실제로 많습니다.
관계가 바로 서면 실제적인 유익이 따라옵니다. 이게 참 희한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잘 하는 말이 있지요. “야, 어떤 사람과도 헤어질 때는 인상 쓰고 헤어지지 말아라. 헤어지더라도 나중에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모르는 거고, 어떤 일로든 얽혀서 그 일을 풀어야 할 때 관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니까 꼭 명심해라.”
물론 이기적인 마음에서 그렇게 하라는 건 아니지만 실제로 관계가 인간사에서 이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과도 틀어진 그대로 분노한 채, 앙숙이 되거나 원한에 맺힌 관계인 상태 그대로 헤어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지혜에 속하는 일입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창조질서로서의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친밀함이 기초가 되어야 내 삶의 문제나 실제적인 일들이 풀려나갑니다. 친밀함이 없는데 하나님에게서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관계에서 무엇이 정말 중요한 기초인지를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할 수 있는 길을 어디에 묻겠습니까? 세상 철학이나 사상, 종교에 묻는다고 해서 그들이 대답해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책인 성경만이 그 대답을 온전하게 전해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무엇보다 하나님이 누구시고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를 어떻게 맺고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주는 유일한 가이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인생사용설명서라고들 하지요. 전자기기 같은 걸 사면 그 기기 사용설명서를 잘 챙겨 봐야 그 기기를 잘 사용해서 원하던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이 부분에서도 성경의 가이드를 잘 따라야 실제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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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편 145편 18절 말씀에는 하나님과 친밀해질 수 있는 아주 결정적인 길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바로 하나님께 간구하되 진실하게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친밀하게 가까이 다가와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전반부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간구한다’는 말은 원어적으로 ‘말을 건다’는 뜻이 있고요, 더 기본적으로는 ‘부르다’,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다’라는 뜻이 있고, ‘자신을 드러내다’, ‘외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간구한다’는 단어의 뜻에는 기도와 간구의 중요한 요소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께 말을 거는 대화이기도 하고, 때로는 간절히 부르짖어 외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이 말씀에서 ‘진실하게’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문자적인 뜻을 보면 ‘진리 안에서’라는 뜻이 있는데, 영어로 보면 실제로 ‘in truth’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위선적이지 않은 신실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을 참된 진리의 신으로 예배하면서 신실하게 그분의 은혜를 얻고자 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달리 표현하면 진리 안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가운데 신실한 예배자의 자세와 경건한 순전함으로 나아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이러한 진실한 간구의 자세를 가진다면 그 열매로 반드시 누리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 부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실하게 간구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를 묵상해보면, 실은 하나님과 진짜로는 진실하게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떨어져 있길 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진실하게 간구하지 못합니다.
사실 이건 잘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에 속한 마음일 수가 있습니다. 이게 워낙 오래 묵은 건데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 때부터 시작해서 내 속에까지 잠재해 내려오는 원초적인,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어색함이나 서먹서먹함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친밀함이 확 열리는 것인데요, 바로 이것 때문에 기도로 나를 드러내고 내 두려움과 염려를 드러내고, 어색함을 드러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타고난 것으로 이미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진실하게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싶지 않고 친밀함을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 마음이 있는 거라서 우리가 기도를 잘 하지 못하는 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나 신학자나 성도들을 막론하고 누구나 기도에 대해 하는 얘기가 있지요. “기도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어렵다. 쉬운 것 같은데 제일 어렵다. 쉽고도 가장 어렵다” 이런 말을 합니다.
왜일까요? 그 기도라는 것 안에 신앙생활의 총체적인 실체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잘 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이뤄지면 그게 구원의 목적에 정확하게 부합되는 일입니다. 사실 구원의 목적이 이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회복이 구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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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친밀하다는 것이 죄인의 입장에서는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려는 것이 내가 힘들 때 그냥 위로가 되어주는 나 중심의 친밀함을 추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죄인 된 이기적인 본성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이러저러할 거라고 해석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그렇게 해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기도의 정석을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기도도 자기가 위로받기 위해 자기 식으로 해버리고 마니까 기도를 많이 하는데도 하나님과의 진정한 친밀함은 부족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복음’식 기도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기도를 바르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기도가 잘 안 되고 기도하는 시간을 제대로 못 가지고 있다면 사실은 지금 신앙생활에 실패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제대로 안 되는 겁니다.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가 없으니까요. 이 친밀함의 굳건한 기초가 없이는 아무리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고 세상을 다 바꾸는 큰 일을 한다 해도 그 자신은 얼마든지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에서도 이기적인 나 중심의 친밀함을 구하면 하나님과의 진정한 친밀함을 못 누리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려고 노력하다가 얼마 못가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해봐도 잘 안 돼요”라고 말합니다. 지속적으로 기도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어쩌면 목숨을 걸고 도전해야 하는 겁니다. 사탄은 기도의 모가지를 딱 틀어쥐고 기도를 못하게 합니다. 기도 시간을 못 내게 합니다. 기도하려고 하면 뭔가 없던 바쁜 일도 생기고, 잡념도 생기고, 기도 못할 이런저런 핑곗거리가 자꾸 생기고, 졸음이 옵니다. 이게 다 기도가 치열한 영적 전쟁이라서 생기는 일입니다. 다른 일 하거나 핸드폰을 볼 때는 졸음이 왔으면 해도 안 옵니다.
기도는 사실 신앙생활의 승패를 판가름짓기도 하는 엄청난 영적 전쟁입니다. 그만큼 기도는 중요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린다는 것은 신앙생활의 모든 총체적 실체가 집약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무엇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깨트려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바로 그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지속시키고 끊임없이 그 관계를 성숙시켜 나가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의 기초가 희미하고, 기도에서 기쁨과 감사와 친밀함을 누리지 못하고, 거기서 성령충만함의 은혜를 맛보지 못한다면 무슨 동력이 신앙생활을 이끌어가겠습니까?
신앙생활을 교회 오래 다닌 경력으로 한다고 해서 이 친밀함이 확보될까요? 그건 어쩌면 허울 좋은 모래성과도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 그 친밀함이 필요합니다. 날마다의 일상에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유진 피터슨은 일상 속에서까지 기도가 자라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골방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까지 기도가 자라서 계속 쉬지 않고 기도하는 상태로 사는 것, 그렇게 살 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이 완성된다는 뜻이었겠지요.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그러한 삶의 중심에 있다는 거지요.
그러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일상에서도 계속 지속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바로 그 친밀함의 기초가 무엇으로 이뤄지는지가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 주제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되 진실하게 간구하는 것으로부터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의 문이 열린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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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친밀해지려면 그에게 내가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다가가야 합니다. 친밀해질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진실하게 다가가지 않습니다. 진심을 털어놓을 생각도 안 합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하게 간구한다는 것은 솔직하게 숨김없이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기도로 그 존재에 의탁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구하는 것조차 솔직하게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 자신이 정말 하나님께 구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하는 부분을 좀더 묵상해보게 되었습니다.
진실하게 간구하는 상태를 저는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것이 필요한 줄 알고 계실 경우 내가 정말 진실하게 간구한다면 나 또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그것을 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진실하지 않게 구한다는 것은 내가 솔직하지 않게, 정말 구하고 싶은 게 따로 있는데 그걸 구하지 않고 딴 걸 구하는 것을 말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있는 그대로의 진실과 진리 안에서 구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정말 구해야 할 것을 진실하게 구할 때 하나님과 가까운 친밀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간구한다’는 말이 가진 본래 뜻 그대로, 나 자신의 상태를 진실하게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그것을 드러내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가운데 나의 부족함과 진정한 갈망과 갈급함을 주께 아뢸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통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과의 진정성 있는 영적 연합을 이루게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웃의 누군가와 친밀하게 되는 것도 사실은 그 사람과 마음이 통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통하려면 진실하게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로 그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기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내가 그에게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나도 그에게 마음이 열리지 않고, 그에게 나를 올바로 전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일상적으로 느끼는 거지요. 이런 진정한 소통 없이 그냥 보여주기 위한 ‘쇼통’만으로는 참된 친밀함을 이룰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뭔가를 구하는 일에서 진실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친히 가까이 다가와 친밀함을 보여주시겠다는 게 사실 얼마나 고마운 약속인가요?
우리 주위에 보면 하여튼 기도 시간도 잘 지키고 맨날 새벽기도도 잘 나간다고 하는데 하나님과는 그렇게 친해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간구는 하는데 진실하게 하지 않고 형식적으로만 간구하니까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한 간구가 열릴 때 일상생활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이렇게 하다가 사람들이 안 보면 무심코 다르게 하게 되는 것과 같은 그런 이중적인 마음자세를 갖게 되는 것은 그의 삶속에 진실한 기도가 트이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는 속일 게 없습니다. 거기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을 훈련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골방에서 내가 진실하게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데 익숙한 사람이 모든 이웃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진실한 기초를 닦게 됩니다. 사람들이 볼 때나 안 볼 때나 항상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골방에서의 기도라는 삶의 무게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의 중심으로 인해 진실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 진실한 간구가 안 되는 사람은 자기 이익을 따라 순간순간 거짓말도 해가면서 카멜레온처럼 그렇게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간구하며 나아가는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기억하고 붙잡는다면 막혔던 기도가 뚫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의 핵심가치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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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경험에 비춰볼 때도 진실한 간구는 곧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의 가장 분명한 표시가 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어디에다 무엇으로 표현하고 살 거냐 하는 문제를 고민해야 합니다. 삶으로 믿음을 표현하며 산다고들 하지만, 그 삶이 기도를 기초로 한 삶이 아니라면 자기 생각과 경험대로 살아가면서도 말만 삶으로 믿음을 표현한다고 착각하며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토록 기도를 강조하시는가 돌아보면, 그 기도가 바로 우리의 믿음이기 때문이고, 그 믿음의 가장 분명한 표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진실한 간구를 하지 않고 살아가는 신자들은 실은 진정한 믿음, 진실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 진실한 간구를 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불신인지 모릅니다.
믿음이란 것은 달리 말하면 나를 구원해주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인생길을 인도해주신다고 약속하시고 실제로 그렇게 실행해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의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의탁하는 은혜의 방편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땅에서 내가 의지할 유일한 분이신데, 내가 그분께 의탁하는 간구를 드리지 못한다면 그분께 대한 내 믿음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내 삶에 베풀어주시는 모든 은혜에 대한 나의 올바르고도 적실한 응답이요 감사와 믿음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도저히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통해서는 그분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원래는 기도든 뭐든 어떤 통로로든 하나님께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죄인들이었지만,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지성소의 법궤 위 속죄소에서 친히 피를 뿌려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셨기 때문에 그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특권과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얼마나 뻔뻔한가 하면 그렇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엄청난 혜택을 주시려고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기까지 해주셨는데도 그 특권이 얼마나 귀한 줄도 모르고, 그게 귀한 줄 모르니까 그 특권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줄도 몰라서 기도를 안 한다는 겁니다. 실제로는 기도를 안 한다기보다 그 엄청난 축복과 은혜의 통로인 기도를 사용하지 않는 겁니다.
누가 나한테 신용카드를 주면서 “여기에 얼마가 들어 있으니까 네가 사용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쓰라”고 했는데, 그걸 사용하지도 않고는 맨날 돈 없다, 밥 벌어 먹고 살기 힘들다, 고생 된다고 불평하고 염려하며 살아가는 격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친히 허락해주신 은혜의 방편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큰 죄에 해당합니다. 좋은 걸 사용하라는데도 인간이 그것이 좋은 줄 모르는 그 무지도 큰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희생의 은혜로 주신 그 기도를 사용하지 않아서 실제로 그 은혜에 감사할 만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말로만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한다고 맨날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려면 이 기도를 사용해야 한다고 기도를 선물로 주신 거나 마찬가지인데 사용하지 않고 그냥 묻어두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 은혜가 감사하면 기도를 통해 은혜의 보좌, 곧 시은좌 앞으로 매일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에 정말 감사하는 자의 마땅한 도리이자 축복이며 신자에게만 주어지는 제사장적 특권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십자가 희생과 부활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말하자면, 그 관계 회복의 지속적인 통로인 기도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 그 목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제대로 안 하는 신자들이 너무도 많다는 겁니다. 기도한다 해도 찔끔찔끔 1분, 3분, 5분, 10분 정도로 때우고 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누리지도 못하고, 기도의 능력을 갖고 일상 속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하는데요, 이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는 말은 막연하게 나아간다는 게 아니라 기도로 나아간다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공인된 정상적인 통로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기도가 일상 속으로 옮겨져 대화의 기도가 되고, 말씀을 암송하면서 말씀과 함께 드리는 말씀의 기도가 되고, 그 밖에 여러 다른 형태로 응용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진실하게 간구하고 나서 우리가 일상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이 기도와 관련한 또 다른 형태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사탄은 실컷 기도만 하게 하고는 바로 이 믿음을 곧잘 빼앗아가 버려서 그 기도의 효능이 지속되게 하는 그 믿음을 무효화시켜버리곤 합니다.
기도하고 나면 기도할 때에 성령충만함의 은혜를 누리는 것만으로 그치지 말고 그 은혜의 경험을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늘 나와 가까이 함께 동행하신다는 그 믿음으로 계속 주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진실하게 간구할 때의 그 은혜가 일상 속에 계속 흘러가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목적 자체와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이러한 진실한 간구의 기도가 아무한테나 주어지지 않는 엄청난 특권이요 축복인 것만 제대로 알아도 아주 성숙한 것이고, 기도생활의 절반은 성공한 거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가까이 다가오신다는 것은 곧 우리가 그분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큰 특권이요 예수님의 크나큰 십자가 희생의 대가로 주어진 아주 희귀한 축복인 줄 믿고, 날마다 부지런히 기도함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누리며 일상 속에서 하나님나라의 열매를 맺는 그러한 가장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안환균, 수 년 전에 나눈 그말씀교회 온라인 수요기도회 한 구절 큐티설교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