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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_ 동살아래 도담다담 (1)
어느덧 노을이 질 듯 말 듯 파아란 청공을 바알갛게 물 들이고 있을 적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은 뒤집어졌다. 석강을 들으러 이미 오셔야 하셨을 세자저하가 오시질 않으니 세자를 모시는 궁인들은 물론이요,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의 동궁관, 거기다가 세자를 보필해야하는 익위사들은 죄다 죽은 목숨인 것이였다.
“애구머니나, 세자저하께서 또 석강을 빠지셨단 말입니까?”
“…크흠, 세자저하의 스승으로써 전하를 뵐 면목이 없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면 또 한바탕 시끄러울 것이니 최대한 조용히 저하를 찾아보게나.”
“걱정마시어요, 대감…. 익위사부터 나서서 찾고 있으니 곧 저하를 찾을 것이옵니다. 소인이 저하를 찾는데로
아뢸터이니 들어가 계십시오.”
알겠다는 듯 고개를 조금 끄덕이고 시강원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세자사는 세자시강원의 실직적으로 최고직인 정2품 관료였다. 비록 시강관으로 정1품 사, 부, 그리고 종1품 이사 직이 있었으나 세자를 가르치는 사람은 본디 좌빈객과 우빈객들이었다. 조선의 왕세자 이 준(李 儁)의 학문을 도맡은 좌빈객 강 헌은 군왕의 총애를 받는 충직한 신하였다. 영의정의 자리도 아깝지 않은 충신이였으나 시강원에서 왕세자 교육을 돕겠다는 간곡한 청에 왕은 기뻐하며 세자시강관의 직위를 하사하였다. 조선의 성군이 되시리라 뜻을 품으며 왕세자 교육에 힘 썼건만…. 아직 춘추 미령하시며 그렇겠지 하고 넘어간 것도 도무지 몇번째인지. 모든 것이 자신에게 세자저하의 배동(陪童)이 되게 해달라 졸라된 딸 아이 다온이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 잘아는 강 헌은 세자만을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홉살의 나이인 다온은 항시 궁 안에서 기거하는 것이 소원이라 하며 좌빈객으로 임명되어 배동으로 선발할 또래아이들을 택하고 있는 아비에게로 달려가 자신을 배동으로 뽑아달라 부탁했다더라. 비록 천방지축인 막내딸 다온이였지만 어미의 정을 채 받아보지도 못하고 어미를 잃은 불쌍한 아이였기에 아비로써 그 청을 냉담히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어쩔 수 없이 알았다 하였건만 항시 저리 세자저하와 석강을 빼먹고 놀러나가니 좌빈객으로써 아비로?그의 속은 타들어가기만 했다.
“아이고, 이 넓디 넓은 궁중 어디에서 저하를 찾는단 말인감.”
방금 전 까지만 하여도 좌빈객에게 생색내며 걱정말라던 상궁이 원망 섞인 투로 옹얼거렸다. 보모상궁인 그녀는 세자의 갓난아기 시적부터 보고 지내온 노련한 상궁이었지만 번번히 없어지는 세자저하 때문에 목숨이 떨어졌다 붙였다 한다.
“일단 자네들은 동궁으로 가보시게. 혹여나 전번처럼 이미 돌아와 계실지도 모르니. 우리는 향원정으로 가보겠네.”
“예, 마마님.”
세자궁 소속인 종6품 수규에게 동궁으로 돌아가라 한 뒤 몇몇 나인들과 향원전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보모상궁 단씨였다. 어둠 속으로 저벅저벅 바삐들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가 작아지자 세자시강원 뒷 쪽에 위치된 수풀이 바스락 거린다. 이내 붉은 곤룡포를 차려입은 어린 소년 준과 어여쁜 수가 놓아진 분홍빛 비단 저고리에 옥색 치마를 두른 소녀 다온이 은근슬쩍 모습을 들어내는 것을 보아하니 녀석들 보통 꾀가 아니다.
“저하, 이러다 야단 맞아요. 저 아버지가 좌빈객이신거 몰라서 이렇게 석강을 빼먹자 그러신거어요?”
“참. 웃기지도 않아. 너도 이제껏 내가 나올 때 마다 좋아라 같이 나왔잖어.”
“그렇긴 그렇지만….”
말꼬리를 흐리는 다온의 모습에 준이 귀엽다는 듯 다온의 곱게 빗어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하라 부르지 말라 그랬잖아.”
“하지만 아버지께서 아시면 경을 치어요. 세자저하와 저는 신분이 다르다고 존대를 하라 그러셨는 걸요.”
“예전에는 나한테 잘도 반말 했으면서.”
“그러다가 아버지한테 얼마나 혼쭐이 났는데요. 이번에도 반말하다가 걸리면 저하께서 책임 지실거여요?”
다온의 말은 사실이었다. 한달 전쯤만 하여도 다온과 준은 반말하는 친한 친구 사이였다. 입고 있는 의복만이, 가지고 있는 신분만이 다를 뿐. 둘이 서로를 위하는 우애는 동등했다. 하지만 세자저하를 ‘준’이라 부르는 것이 아버지께 걸려 호되게 종아리를 맞아야 했다. 기어이 저하의 배동으로 삼아주었건만 왕실의 법도를 무너뜨린다고 말이다. 그 날만은 다온도 준이가 미웠더랬다.
“알았어. 그럼 이렇게 하자. 시강원 내에서는 나한테 존대를 해도 좋아. 하지만 이렇게 우리 둘만 있을때는 반말하자. 응?”
“음…….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해. 하지만 만약에 내가 아버지한테 걸리면 이번엔 준이 너도 나 보호해줘야되! 너가 울 아버지보다 높다고 들었어. 그니까 나 혼내지 말라고 하면 아버지도 나 안 혼낼거 아니야.”
“알았어. 하지만 좌빈객은 나도 무섭단 말이야.”
“준이 너는 하튼 겁쟁이라니까.”
자신들이 시강원에 있다는 것도 까먹은 채,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두명의 배동들과 좌빈객과 우빈객이 석강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도 까먹은 채, 시끄럽게 소리지르며 장난치고 있는 그때였다. ‘쾅’하고 창호문이 열리는 것은. 갑작스런 소리에 준과 다온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의 본원지를 돌아보았다. ‘차라리 그 때 돌아보지를 말껄’ 아무리 후회를 해보아도 암흑 속에 창호문 앞에 서있는 사람은 세자빈객 강 헌이었다.
“아…아버지.”
“좌, 좌빈객.”
흑단령을 차려입은 강 헌이 아무말도 않고 벙쩌있는 세자와 다온을 쳐다보았다. 두 아이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어쩔줄 몰라하였다.
“늦으셨습니다, 세자저하.”
“아…. 그것이…”
“어서 드시지요.”
변명을 채 하기도 전 툭하니 말을 끊는 강 헌이었다. 아무 변명도 못하고 그저 한번 다온을 쳐다본 뒤 띄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준. 준이 문턱을 넘어 시강원으로 들어서자 강 헌이 고개를 돌려 다온을 쳐다보았다. 세자저하에게 나쁜 영향만 미치는 우매한 딸의 행동거지에 화가 난 것은 분명하나 강 헌은 항시 자신을 절제 아는 이였기에 쉬이 자신의 분노를 밖으로 노출하지 않았다.
“너도 따라 들어오지 않고.”
생각했던 것 보다 지나치게 온화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다온은 찍소리도 못하고 따라 들어섰다.
들어가보니 이것이 왠일인가. 다온과 함께 배동으로 뽑혀온 시운과 아사가 무릎을 꿇고 벌을 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에도 다온은 아사가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아사. 권세있는 좌의정 도 해환의 여식으로 준이 좋아 배동을 시켜달라 좌의정을 이리 조르고 저리 졸랐댔단다. 겨우 배동으로 발탁되기는 하였으나 학문이 뒤쳐져 시강관들을 쩔쩔매게 하는 아이기도 하다. 다온과 아홉살 동갑내기로 자기보다 공부도 잘하고 준과 더 절친한 다온이 마음이 안드는지 시도때도 없이 처소로 돌아가면 짖꿎은 짓을 하는 아사였다.
“세자저하께서는 어찌하여 석강에 늦으시었는지 말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날씨도 좋고 하여 놀고 싶어…”
“언제까지 이리 철이 없이 구실 것입니까? 제왕학 공부를 하시는 저하께선 어찌! 어찌하시어 이리 백성들의 고민과 짐거리를 덜어 주시지는 못할 망정 익위사, 시강관에 모자라 궁인들까지 이리 고단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미안하오… 좌빈객. 내 생각이 짧았오.”
조선의 왕세자에게 이리 소리치며 잔소리 할 수 있는 이는 좌빈객 강 헌 뿐이라. 시강원 관원들은 강 헌 같은 배포가 없어 세자 준에게 벌써부터 아부하기에 바빴다. 비록 시강원 만은 청렴한 관원들을 뽑으려 하였으나 이미 이 구중궁궐에는 좌의정 도 해환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었다. 인사담당인 이조판서까지 좌의정의 편을 들어주고 있으니 미래의 국왕인 세자에게 잘 보이려 시강관의 자리를 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임금이였기에 그는 세자 준을 가르칠 참된 스승으로 강 헌을 삼은 것이다. 간사한 무리로부터 세자를 보호하고자 본디 관직이 있는 자들이 겸직을 하여야하는 좌빈객자리를 관직에 뜻이 없다한 강 헌에게 냉큼 내주신 이유이기도 하다.
“저하께서 이리 학문에 관심이 없으시니 이것은 모두 스승된 저의 불찰이 아니겠사옵니까? 다온아. 밖에 나가 튼튼한 회초리 열개를 가지고 들어오너라.”
“아…아버지. 저가 잘못했사와요. 용서해주셔요. 세자저하는 잘못이 없어요. 다 제 잘못이니 저를 혼내시어요.”
“다온아, 무슨 소릴 하는거야. 석강 가지 말자고 졸라댄건 나잖아! 좌빈객. 이것은 모두 나의 잘못입니다. 허니 나를 벌하세요.”
“어허…! 다온이 너는 어서 회초리를 대령치 못하겠느냐!”
아비의 지엄하고도 무서운 명령에 어찌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다온은 울며 밖으로 나갔다. 시운과 아사 또한 무언가 큰일이 나겠구나 생각하며 숨을 죽이고 가만히 상황만을 지켜보았다. 세자 준 또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다온이 회초리를 가지도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훌쩍… 여기, 여기 가져왔습니다.”
“세자저하. 저하께서는 이리와 회초리를 드십시오.”
올것이 왔구나 생각하며 두 눈을 질끈 감는 준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단 한번도 회초리를 맞아보지 못하고 자란 귀한 몸이라 열개의 회초리를 다 맞고 견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줄 준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좌빈객이 내리는 벌이라면 다 받으리 생각하며 조심스레 자리를 옮겨 회초리를 들었다. 자신이 벌을 받는 당사자인데 어찌 자기보고 회초리를 들라 하나 하는 생각에 갸우뚱했지만 지엄하신 스승의 명이었다.
강 헌이 조심스래 일어나더니 자신의 바지끈을 풀어 걷어올리더니 종아리를 내비쳤다. 강 헌의 뜻밖의 행동에 세자는 물론 다온, 그리고 조용히 앉아있던 시운과 아사까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세자저하, 소신이 세자저하를 잘못 가르친 듯 싶사옵니다. 전하와 저하에 대한 불충을 어찌 씻으리오. 저하를 이런 길로 인도한 소신의 잘못이 크오니 오늘 벌을 받아야 할 자는 바로 신이옵니다.”
“좌…좌빈객. 이러지마세요. 그대는 나의 스승입니다. 어찌 나에게 천륜을 어기는 죄를 범하게 하련단 말입니까. 부디 거두어주세요. 차라리 스승께서 나를 치세요. 내가 다 맞겠습니다.”
“저하! 어찌 이리 유약한 모습을 보이시옵니까. 잘못을 하였으면 벌을 받는 것이 사내대장부의 도리라 일러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신이 저하께 내리는 벌이오니 치십시오!”
“좌빈객… 날 용서하세요. 하지 못합니다. 난 하지 않습니다.”
백번 매를 치는 것보다 이것이 심성이 고운 세자 준에게는 더욱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미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눈물을 뚝뚝 떨구는 아홉살난 아이란 그 아무리 지위 높은 세자저하건 천한 노비아이건 다 똑같이 순진한 영혼들이었다. 이제 되었다는 듯 바지끈을 다시 동여매고 자세를 낮추어 세자를 바라보았다.
“훗날 조선의 성군이 되실 저하께옵서 이리 쉬이 눈물을 보이셔서 되겠습니까?”
“내가 다 잘못한 것이니 차라리 나를 치셔요.”
“잘못을 하셨으면 그에 따른 벌을 수용하는 것 또한 사내된 자의 도리이지요. 허나 저하께서는 이나라의 군주되실 분이신데 어찌 신하된 자로써 감히 주군에게 회초리를 들겠나이까? 법도대로 배동아이 하나가 저하의 매를 대신 맞는 것으로 하지요.”
왕세자와 함께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배동(陪童)들은 하나같이 고위관직을 가진 자들의 귀한 자제들이었다. 비록 좌빈객이라 하나 쉬이 함부로 회초리를 들 수 있는 아이들이 아니었기에 다온은 아버지의 말씀에 놀라 마르지도 않은 눈물을 떨구며 번쩍 고개를 들었다.
“허…허나.”
“다온이 너는 이리 나와 세자저하를 대신해 종아리를 걷거라.”
“좌빈객. 어찌 군왕이 될 자로써 나의 잘못을 남에게 미루겠습니까. 내가 맞겠습니다. 죄없는 다온이는 놔주세요.”
“이제 아셨사옵니까? 군왕의 자리란 그런 것이옵니다. 군주가 나라를 잘못 다스리면 비록 그 책임은 왕께 있지만 고통은 백성들이 겪는 것이옵니다. 저하께옵서는 이나라 성군이 되시려면 앞으로 어찌 하여야할지 다시 천천히 생각해보시옵소서.”
“………….”
“다온이 너는 아니 나오고 무얼 그리 꾸물대느냐!”
다온이 쭈삣쭈삣 앞으로 걸어나오자 강 헌은 자신의 여식임에도 불구하고 매섭게 회초리를 들었다. 찰싹거리는 회초리 소리에 아직 어린 배동아이들은 두 눈을 찔끔찔끔 감아댔다. 다온이 회초리를 맞는 것에 제일 기뻐해야할 아사까지도 부들부들 몸을 떨어댔다. 한번도 강 헌이 아이들에게 매를 든 적이 없기에 시운과 아사, 그리고 준 까지 어찌할 바 모르고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고저 다온의 훌쩍거리는 소리만 시강원을 울렸더랜다.
어느 새 다온의 종아리는 날카로운 생채기가 났고 꽤나 긴 시간 후, 강 헌이 ‘되었다. 들어가 앉거라’ 하자 눈물범벅이 되어 준을 쏘아보고 자리로 돌아갔다.
“석강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저하께옵서는 동궁으로 돌아가시옵고 이번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행하셔야 할것입니다.”
강 헌이 날카로운 충고를 던지고 먼저 시강원 밖을 나가자 준이 다온에게로 냉큼 달려갔다.
“온아. 괜찮은거지? 응?”
“훌쩍. 너 나빠. 내가 앞으로 너랑 노나봐라. 내가 그래서 나가지 말라 그랬잖아!”
훌쩍거리며 준을 쏘아보는 다온의 모습에 피식 소년이 웃어보였다.
“이리와. 동궁가서 약 바르자. 응?”
“싫어. 앞으로 너랑 안 논다니까!”
“누가 놀재? 약만 바르고 넌 니 처소로 돌아가면 되잖아. 응?”
“…싫어.”
“진짜? 너 좋아하는 다과도 준비해놓으라고 했는데.”
“거짓말. 흥.”
토라진 듯 준에게서 고개를 돌렸으나 준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방긋방긋 웃고있는 다온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시운과 아사는 이런 상황에 어찌 해야할 지 몰라 자리에서 일어나 준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 살금살금 나갔다. 아사는 자신이 나가는데도 돌아봐주지 않는 준에게 삐쳐 화가났는지 바닥이 부서지도록 쿵쾅대며 나갔고 시운은 시운또한 자신에게 눈길조차 않주는 다온에게 섭섭해 풀이 죽어 나갔다. 고저 준과 다온 두 아이들만 웃음꽃을 피었고 결국엔 다온이 다리가 아프다고 걷지 못한다 하여 아랫것들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준이 직접 동궁까지 업고 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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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무엇일까
누가 만드는 것일까
가끔 그런 의문이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