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와 생원
진사와 생원
“건너마을에 최진사댁에 딸이 셋 있는데....”라는 노래가 있고,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고 소견이 좁은 사람을 놀리는 표현으로 ‘꽁생원’이라는 말도 있다. 진사는 뭐고 생원은 무엇일까? 막연하게 조선시대의 관직명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진사(進士)나 생원(生員)은 벼슬이 아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시대 직사(職事)가 있는 실직(實職)으로 양반이 등용될 수 있는 관직은 문관과 무관을 합쳐 총 5,605과(窠)였다. 문관 동반직(東班職)이 1,779과, 무관 서반직(西班職)이 3,826과였다. 그 중에서도 녹봉을 제대로 지급받는 정직녹관(正職祿官)은 2,400과뿐이고 나머지는 교대로 근무하며 근무 때만 녹봉을 받는 체아직(遞兒職) 이거나 아예 녹봉이 없는 무녹관(無祿官)들이었다. 정직녹관 중 수도인 한양에서 근무하는 경관정직(京官正職)은 각기 문관이 541과, 무관이 319과로 모두 합쳐 860과였고 나머지는 모두 지방에서 근무하는 외관직이었다.
▶실직(實職) : 직무(職務)가 있는 관직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직무가 없는 관직인 산직(散職)도 있었다. 관직의 수는 제한되어 있는 데 반하여, 관직에 진출하려는 사대부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의 관직에 대한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조정에서는 상황에 따라 직임(職任)이 없는 명목상의 직위인 산직을 내렸다. 산직은 대부분 무급이 원칙이었다. ▶과(窠) : 관직(官職)의 정원(定員). ▶체아직(遞兒職) : 정해진 녹봉이 없이 1년에 몇 차례 근무평정에 따라 교체되며, 복무 기간에만 녹봉을 받는 관직. |
이러한 관직에 관리를 등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과거(科擧)였다. 과거는 중국 수나라 때 처음 시행된 제도로 당시의 명칭은 '과목별선거제’였다가 이후 당나라 때 줄여서 과거제로 불리게 되었다. ‘선거(選擧)’는 거인(擧人) 또는 거자(擧子)를 가린다(뽑는다)’는 의미로 거인(擧人)은 옛 중국에서 관리에 추천되거나 등용시험에 응시한 자 또는 그 합격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지금 정치인을 뽑는 행위를 ‘선거’라고 부르는데 그 말의 기원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시대의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雜科)의 3종류가 있었다. 이외에 소과(小科)로 불리는 시험이 있는데 이는 정식 과거는 아니고 말하자면 문신(文臣)을 뽑는 과거시험인 문과(文科)의 예비시험 성격을 띠고 있다.
소과는 바로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라 성균관 입학을 위한 시험이었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엘리트 선비와 관료를 양성하는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이자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체계는 초등교육은 사설 교육기관인 서당에서, 중등교육은 전국의 모든 군과 현에 설치된 관립(官立)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울에서는 학당으로 불리던 국립교육기관인 사학(四學)에서 이뤄졌다. 성균관은 이 교육기관의 최정점으로 전국에 하나뿐인 국립대학이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원(書院)은 16세기부터 발달한 교육기관으로, 지방에서 성균관과 유사한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사립기관이었다. 『경국대전』에는 이 소과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300일 이상 수학한 자에게만 문과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도록 규정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선비들의 유일한 사회진출 수단이자 직업이었던 관직에 나가기 위해서는 소과가 1차 관문인 셈이었다. 율곡 이이나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한 많은 학자와 문신들이 성균관 유생 과정을 거쳤다. 유생들은 성균관에서 생활하면서 식사는 물론 공부에 필요한 종이, 붓, 먹까지 모두 국가에서 제공받았다.
이 소과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가 있었다. 소과를 감시(監試), 사마시(司馬試), 생진과(生進科),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라고도 하는데, 관리를 선발하는 진짜 과거시험인 문과와 무과를 대과(大科)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소과(小科)로 부르게 된 것이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인 사서삼경에 관한 지식인 경학(經學)을, 그리고 진사시는 시문의 창작 능력인 사장(詞章)을 평가하는 시험이었다. 다 같이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두 단계의 시험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각기 100인을 뽑아 생원 또는 진사의 칭호를 주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평생도 10폭 병풍 中 3폭 <소과응시> , 국립중앙박물관]
소과는 식년시(式年試)라 하여 3년에 한 번씩 자(子), 묘(卯), 오(午), 유(酉)자가 들어가는 해에 정기적으로 실시되었다. 그 외에 나라에 큰 경사가 있거나 작은 경사가 여러 번 겹쳤을 때에 임의로 실시되는 증광시(增廣試)가 있었다.
식년시는 보통 전 해 가을에 각 지역에서 초시(初試)를 치르고, 식년이 되는 이듬해 봄에 한성에서 복시(覆試)를 치렀다. 지방에서 치르는 초시를 향시(鄕試)라 하고 서울에서 치르는 초시를 한성시 (漢城試)라고 했다. 향시는 8도에서 도 단위로 실시되었다. 경기도 향시는 임진왜란 후에 폐지되고 한성시로 통합되었다. 향시의 시험 장소는 일정한 곳에 고정시키지 않고 소속 읍중에서 윤번으로 정하였다. 보통 진사시를 보고 하루 뒤 생원시를 치렀는데 둘 다 응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초시에서는 생원과와 진사과에 각각 700명씩을 뽑았다. 선발인원의 숫자는 『경국대전』에 도별로 그 정원이 정해져 있었다. 복시는 초시를 통과한 이들 1,400명에다 한양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에서 수학과정을 통하여 선발된 소수의 인원들이 더하여 치러지게 된다. 복시는 대개의 과거시험과 마찬가지로 두 장소에서 치러지는데 1소(所)는 예조, 2소(所)는 성균관의 비천당(丕闡堂)에서 치르는 것이 관례였다.
시험이 끝나면 양소(兩所)의 시험관들이 입궐하여 빈청(賓廳)에 모여 양소 합격자를 한 사람씩 맞바꾸어 가며 등급을 매기어, 진사시와 생원시별로 각각 1등 5인, 2등 25인, 3등 70인으로 등급을 나누어 100인을 뽑는다. 이들에게는 급제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입격(入格)이라고 했다. 급제는 대과 합격자들에게만 사용되는 용어였다.
합격자 명단은 성적순으로 정리되어 왕에게 보고하고, 방을 만들어 발표하였다. 또 조정에서는 사마방목(司馬榜目)을 인쇄하여 합격자와 관련 관청에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길일(吉日)을 택하여 궁궐 뜰에서 창방의(唱榜儀)라는 의식을 거행하여 생원과 진사들에게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술, 과일을 하사하였다.
이 의식이 끝나면 생원과 진사들도 대과 급제자처럼 유가(遊街)를 하였다. 유가는 과거급제자(科擧及第者)들이 스승, 선배, 친척 등에게 인사를 갈 때 광대를 동원하여 풍악을 울리며 거리를 행진하는 것을 말한다. 과거급제자들에게는 사흘 동안 유가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3일유가'라는 말이 나왔다.
▶창방의(唱榜儀) : 합격한 사람을 방목에 적은 뒤 호명하는 의식. 방방의(放榜儀)라고도 한다. 방목(榜目)은 과거(科擧)에 급제한 사람의 성명(姓名)을 적은 명단을 뜻하는데 과거급제자에게는 성명, 자(字), 생년간지(生年干支), 본관(本貫), 거주지, 관직과 부모, 형제, 외조(外祖)의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시관(試官)의 관직, 성명, 초시(初試) 연월일, 장원(壯元) 성명, 시제(試題)를 부기(附記)하여 방목을 나누어 주었다. ▶3일유가 : 유가(遊街)를 3일 동안 허락했기에 붙여진 명칭. |
[김홍도 <평생도> 中 삼일유가. 국립중앙박물관]
[작자미상 <삼일유가>, 20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입격한 생원과 진사들은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것이 정상이지만, 실제로 생원 또는 진사로서 성균관에 입학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성균관의 운영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문과 시험제도가 처음부터 원칙대로 운영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즉, 생원이나 진사로서 성균관에 들어가 300일간의 수학을 마치지 않아도 문과에 응시할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생원이나 진사가 아니면서도 유력 가문의 자제들은 바로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예외적인 길이 처음부터 열려 있었다. 이들을 유학(幼學)이라 불렀는데 조선 초기에는 과거시험에 이러한 ‘유학(幼學)급제자’들의 비율이 15% 미만이었으나 영·정조대에 이르면 70%대에 가까웠다고 한다. 따라서, 생원진사시를 설치한 본래 의의는 후기에 내려오면서 거의 상실되었다. 그런데도 시험은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종전보다 더 자주 실시했고, 뽑는 인원도 더욱더 많아졌다.
생원이나 진사의 자격만으로 관직을 얻기는 어려웠다. 혹 얻는다 하더라도 하급직인 능참봉, 교수, 훈도 등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생원, 진사만 되어도 면역의 특권이 주어져서 사회적으로는 대우를 받았다. 또한 지방에서는 공인된 양반으로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향교와 서원 유생의 명부를 작성하고, 지방관의 진퇴에도 영향을 끼치는 위치가 될 수 있었다.
▶능참봉(陵參奉) : 조선시대 능(陵)의 일을 맡아 보던 종9품 벼슬. ▶훈도(訓導) : 한양의 사학에는 성균관 관원 중 6품 2인을 교수로, 7품 이하 5인을 훈도로 겸임 발령하여 사학의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지방의 경우는 목(牧)이상 고을의 향교에는 문과 출신 관원으로, 도호부의 향교에는 생원, 진사 중에서 각 1인씩을 교수로 임명하게 하였다. 지방 향교에는 종9품의 훈도를 임명하였는데 이 역시 생원과 진사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
소과 응시자 중에는 처음부터 벼슬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고 이러한 현상은 후기로 갈수록 더 심해졌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소과 응시자에 고령자가 많아져 70 또는 80대의 노인도 적지 않았고, 입격자들의 평균 연령도 문과 급제자보다 높았다 한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관직에 진출하거나 문과에 응시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참여한 것이 아니라, 생원 또는 진사라고 하는 지위 자체를 최종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생원이나 진사시에 입격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학식을 인정받는 증표가 되었고, 양반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때로는 벼슬을 멀리하는 탈속한 선비연 하는 데도 유용했다.
소과가 국가 시험제도로서 본래의 의의를 거의 상실한 뒤에도 계속 실시된 배경에는 이와 같은 사회 풍조가 바탕에 깔려있었던 것이다.
소과는 조선시대를 통해 모두 229회가 있었으며, 그 중 67회가 증광별시였다. 조선시대에 소과에 합격한 총인원은 생원 2만 4221인, 진사 2만 3776인이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생원보다 진사를 더 많이 뽑았음에도 생원보다 진사의 숫자가 적은 것은 초기 약 60년 동안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진사시 없이 생원만을 뽑았던 때문이다.
생원과 진사는 시기에 따라 그 인기도가 달랐다. 조선 초에는 생원시가 중시됐었다. 성리학자들이 세운 나라여서 사장(詞章)보다 경학(經學)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가 되면 다시 생원보다 진사를 높이 평가하는 풍조로 바뀌었다. 정약용도 1783년 생원시 장원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1789년 대과에 급제했음에도 자신이 직접 쓴 묘비명에는 진사 출신으로 적었다고 한다. 생원보다 진사를 높이 보는 풍조는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생원은 늙은 유생을 지칭하는 용어 정도로 격하된 반면, 진사는 지금까지도 뭔가 있어 보이는 양반 가문의 인물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남아있다.
‘최진사댁 셋째 딸’이라는 노래의 가사에는 “그 중에서도 셋째 따님이 제일 예쁘다던데...”하는 가사가 있다.
그래서 노래를 들으면 최진사댁 셋째 딸은 젊고 아리따운 처녀일 것만 같다. 조영남이 부른 이 노래가 앨범으로 발매된 것은 1968년이고 진사시가 마지막으로 치러진 것이 1894년이니 74년의 세월이 흘렀다. 혹 최진사가 15세에 소과에 입격했더라도 노래가 발매될 당시의 나이는 89세다. 터울이 있어 최진사가 25세에 셋째 딸을
봤다고 치면 조영남의 노래가 나왔을 때 셋째 딸의 나이는 64세다.
참조 및 인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진사와 생원 종심소욕
[출처] 진사와 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