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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친형님이 없다. 그러나 우리 큰집이나 작은 집에는 몇분의 형님들이 계신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유독 공부를 잘해 장래가 촉망되던 분이 한분 계시는데 바로 우리 집안의 종손인 큰집의 맏형이시다. 자유당 시절 3.15부정 선거 폭로의 배후 인물로 찍힌 7인 중 유일하게 붙잡히지 않고 도망다니시다 4.19의거로 세상이 바꾸자 드디어 숨어다니시지 않고 밝은 세상으로 나오셨고, 누구와 타협을 하지 않고 정의로운 세계를 꿈꾸셨던 우리 백부님 덕에 우리 집안은 망해버렸으며 그 덕에 그 똑똑한 형님은 변변한 직장을 찾지 못해 평생 남의 허드렛일이나 도와주며 번돈 몇푼으로 술을 드셨다. 그 때 우리 백부님을 찾아와 마당에서 무릎 꿇고 절을 올리던 사람들은 국회의장이나 국회부의장, 장관, 국회의원 등의 자리까지 올랐다. 김재순은 북한에서 우리 옆집에 사셨고, 김원기 등의 사람들은 자주 우리 백부님을 찾아 절을 올리던 사람들이다. 우리 형님이 가장 즐기시던 최고의 안주는 나처럼 순대국이다. 그분은 유난히도 나를 아껴주셨다. 만날 때마다 십만원, 2십만원, 3십만원 등 아무도 모르게 호주머니에 돈을 찔러 드렸는데, 아마 그돈도 금호시장에 있는 순대국집 아줌마 주머니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 형님께서 3일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국립의료원 호스피스 병동에 바짝 마른 모습으로 누워 숨을 헐떡이시던 형님은 내가 찾아갈 때마다 뭐하러 왔느냐고 꾸중을 하시면서도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형님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주기 위해 우리 어머니는 비싼 비로도 치마도 파셨다는데 그 조카는 우리 어머니보다 먼저 가셨다. 우리 어머니는 "아이고 불쌍해서 어쩌냐"고만 하고 계신다. 돌아가시기 전날은 산소마스크를 쓰시고 말을 못하시는데도 내가 왔다니까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온 줄 아시는 거였다. 병실에 있다가 늦게 들어간 탓에 깜박 늦잠을 잤는데, 조카가 곧 임종하실거라는 전화를 했다. 죽어라 달려 갔는데 이미 흰천을 덮고 계셨다. 맥박과 산소포화도가 완전히 떨어지는데 잠시 집에 간 아들이 달려오고 있다니까 얼굴이 시뻘개질 정도로 힘을 주시며 기다리시다 달려 온 아들이 손을 잡자 그때서야 숨을 놓아버리시더란다. 뒤늦게 달려 간 내게 조카들은 의사선생님께서 돌아가시더라도 청력은 3시간 동안 살아있으니 할말 있으면 하라고 하셨단다. 너무나 평온해진 얼굴에 아직도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형님 손을 붙잡는데 가슴이 턱 막히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형님 그동안 너무나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먼저 가신 가족들과 아들 얼굴 보실 수 있어 행복하시겠습니다."고 말씀드렸다. 듣고 가셨을까? 오늘 아침 6시 반에 용인 평온의 숲이라는 화장터에서 우리 형님은 한줌의 재가 되시었고 양지바른 곳에 묻히셨다. 우리 형님 이 누우신 곳의 묘석마다 고인에 대한 가족들의 절절한 그리움이 듬뿍 묻어있었다. "엄마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지? 힘들고 어려울 때 또 달려올게 엄마 그때까지 잘있어" 세상을 제대로 바꿔보겠노라고 노력하셨던 우리 집안 어른들은 죽을 때까지 가난과 싸우다 돌아가셨는데.......그분들이 개혁의 대상으로 보았던 자들은 너무나 호사스럽게 살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 실현되는 나라, 상식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기자 간담회를 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을 보며 너무나 억장이 무너지고 이 나라가 과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나라인가 싶어 절망하고 절망하며 TV를 꺼버렸다. 형님 저와 곧 만나시게 될 겁니다. 이 세상 고통 모두 놓으셨으니 부디 좋은 곳에 가셔서 기다리고 계세요. 형님이 있어 너무 행복했습니다. 형님과 소주 한잔 기울이던 시간들이 정말 행복했습니다. 힘들때마다 순대국 사들고 찾아가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여쭙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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