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요한 20,24-29
창조론을 믿지 않는 이유가 과학적 사고를 하기 때문이라고?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성 토마스 사도는 의심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사실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봤다고 하면 믿어야 할 텐데요. 그런 이유는 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직접 자기 손으로 예수님 상처를 만져봐야겠다고 말합니다.
증거가 확실해야 믿겠다는 사고입니다.
과학적 사고를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창조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진화론만 과학적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나 과학을 많이 이용하기는 하지만, 과학적이지는 않습니다.
진화라는 말 자체가 발전한다는 뜻이고 저절로 발전하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배워야 하고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흡수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퇴화하는 게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들은 유전자 변이로 설명하려고 하지만, 몸에서 유전자가 변이된 것을 암세포라 부릅니다.
더 완전해지는 변이는 없습니다.
개가 유전자가 변이되면 두 발로 걷고 말도 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제가 신앙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창조론도 이치를 따지는 과학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성적 사고를 한다고 자부하는 현대 젊은이들에게 하느님을 만나게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창조자는 자신이 창조자임을 피조물이 알아주는 것을 가장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녀를 키우기 위해 죽을 고생을 하는 아버지에게 자녀에게 바라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냥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영화 ‘블랙’은 헬렌 켈러와 같이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여 자신이 사람인지 동물인지도 모르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이 아이에게 엄마, 아빠란 말 한마디 듣기 위해 엄청난 돈을 써 가며 교육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이가 엄마, 아빠란 말을 했을 때 그들의 모든 고생은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은 원하기만 한다면 그 사람이 당신을 알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눈을 감아버리고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에서도 하느님을 믿었다가 점점 과학자가 되어가며 의심하고 하느님을 버렸던 이가 있습니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을 알려는 마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31세의 파스칼은 심오한 종교적 경험을 합니다. 그 경험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체험을 기억하기 위해 양피지에 써서 옷 안쪽에 꿰매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의 글을 보면 오늘 토마스 사도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 성령의 불!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철학자와 학자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확신,
확신,
감격,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그리고
너의 하느님.
너의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이 되리라.
하느님 이외에 이 세상과 온갖 것에 대한 일체의 망각.
하느님은 오직 복음서에서 가르치신 길에 의해서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인간 영혼의 위대함이여.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습니다.
환희,
환희,
기쁨,
환희의 눈물.
나는 당신에게서 떠나있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버렸습니다.
이제 나는 영원히 당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느님과 당신이 보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나는 당신을 저버리고, 피하고,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제 나는 절대로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오직 복음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일체의 모든 것을 기쁘게 포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지도자에게 전적인 순종.
이 땅에서의 잠깐의 노력을 통해 얻는 영원한 기쁨.
나는 당신의 말씀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
파스칼의 신과의 만남과 그에 따른 개종은 그의 유명한 작품 ‘팡세’를 포함하여 그의 철학적, 신학 저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조금은 잔인한 말이지만 지금 길을 찾고 있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면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냥 믿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믿기를 원하면 반드시 만납니다.
믿기 싫은 이유는 자기 뜻대로 살고 싶은데 창조자가 있다면 창조자의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가 있는 편을 택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사는 고통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사고를 하더라도 믿고 싶으면 반드시 믿어집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복음: 요한 20,24-2
홀로 어두컴컴한 회의와 불신의 동굴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던 토마스 사도!
전승에 따르면 토마스 사도는 성격이 조금은 내성적이었지만 마음이 무척이나 너그러웠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다른 그 어떤 제자들보다도 충실히 스승님을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받았던 심리적, 정신적 충격이 엄청나게 컸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토마스 사도의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그는 점점 자신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의지하고 희망할 대상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것입니다.
다른 열 제자들은 하나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는데, 토마스가 그 자리에 없었던 이유도 뻔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의욕이 완전히 상실되었습니다.
만사가 귀찮아졌습니다.
그 결과 아무도 만나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처박혀 있었을 것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그의 실망감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토마스 사도가 얼마나 실망하고 좌절했으면 예수님 부활을 직접 목격한 막달라 여자 마리아나 베드로 사도의 증언도 그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간 토마스 사도는 홀로 어두컴컴한 회의와 불신의 동굴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앞에 너무나 기뻐 환호하고 용약하고 있는데 토마스 사도 혼자 죽음과도 같은 절망감 속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토마스 사도는“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증언하는 다른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이런 토마스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여드레 뒤에 발현하셨는데, 토마스 사도가 그토록 바라고 있던
뚜렷한 증거를 하나 하나 보여주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그 순간 토마스 사도는 마치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순식간에 모든 저항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약한 믿음은 한 순간 크게 비약하게 되었습니다.
연못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폭우가 와서 진흙들이 많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당연히 연못이 흐려졌습니다.
원래 연못 안에는 크고 예쁜 비단잉어들이 살고 있었는데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잉어의 멋진 자태를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방법은 무엇입니까?
진흙탕 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부족한 우리들 영혼의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흙으로 흐려진 연못 같은 우리들의 눈이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뚜렷이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의 잡다한 걱정거리들, 유혹거리들로 우리의 영혼이 흐린 상태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진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작업입니다.
그 작업이 바로 침묵이요 기도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토마스 사도 축일 강론>
(2024. 7. 3. 수)(요한 20,24-29)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 주는 힘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4-29)”
1) 여기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토마스 사도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보이지 않는데도 믿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1,8-9).”
사도시대 이후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본 적도 없고, 또 거의 대부분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으면서도,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직접 뵐 수 있다면 좋고, 직접 뵙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 주는 힘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힘입니다.
<이 말을 “믿으면 보인다.”, “믿으면 깨닫는다.” 라고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니까 믿어야 한다.”가 아니라,
“믿으니까, 보이지 않아도 본다.”입니다.>
2) ‘본다.’, 또는 ‘보인다.’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에도 연결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이 말에서 ‘보이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 증명할 수 있는 것’ 등을 뜻합니다.
그리고 좀 더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현세적인 것, 허무한 것’ 등을 뜻합니다.
그런 것들을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하는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 증명할 수 없는 것,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을 뜻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얻기를 희망하기 때문에,
또 누구든지 자격만 갖춘다면 그것을 얻어 누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희망’을 ‘믿음’으로 바꿔도 뜻이 같습니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 나라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3) 바로 앞의 19절을 보면,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토마스 사도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문을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26절).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제자들이
박해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그들이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음을(마태 28,17)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다른 제자들이 토마스 사도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전한 것이었을 뿐이고, 자신들의 신앙을 증언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토마스 사도가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한 것에 대해서 토마스 사도만 탓할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증언’은 ‘말’보다 ‘삶’이 먼저입니다.
믿음 덕분에 ‘삶’이 완전히 변화되어 있어야만
‘말’로 하는 증언에 힘이 생기는 법입니다.
<변화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4) 우리가 하는 선교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활동은, 또는 복음 선포 활동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해야 하는 활동입니다.
‘믿음으로써 변화되어 있는 나의 삶’은, ‘나의 믿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믿기 전과 믿은 다음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없고
차이도 없다면,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전해 주지 못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