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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뛰어난 효자 가운데 서애 류성룡이 있다.
류성룡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30년 가까이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모신 것으로 유명하다.
류성룡은
“제아무리 글을 많이 읽어도 어머니께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일찍이 부모를 공경하는 효성이 없는 학문은 눈 뜬 장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라고 하며,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한때 왕인 선조의 지시에 의해 서울로 올라와 벼슬을 하였다.
그의 효성에 관하여 당시 왕과의 대화 내용이 담긴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울에 온 류성룡은 서재에 고향의 경치를 그린 그림을 걸어 놓고, 그곳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였다.
류성룡은 한번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면 그날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새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자주 뜬눈으로 지새다 보니, 류성룡의 얼굴색은 누가 봐도 병든 사람과 같았다.
류성룡
왕이 류성룡과 더불어 나랏일을 상의하다가, 그의 얼굴빛이 몹시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경은 혹시 무슨 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오?”
“전하,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잠을 좀 못 잤을 뿐입니다.”
“잠을 못 잤다고요? 그럼 무슨 마음의 병이라도 있는 것이오?”
“예, 전하. 마음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허, 그거 안 되는 일이지요. 이 몸이 도와 줄 방도는 없소?”
류성룡은 그렇지 않아도 오늘 같은 기회를 기다려 왔으므로 곧장 아뢰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인은 몸만 한양 땅에 있을 뿐이지 마음은 줄곧 고향의 어머니 곁에 가 있습니다.
어머니를 봉양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떨어져 있으니, 그저 밤잠을 설칠 뿐입니다.”
임금은 류성룡의 효성에 눈시울을 적시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동안을 생각하다가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주는 그대의 고향과 가까운 곳이니, 그곳 목사로 부임하여 소원대로 어머니를 봉양하도록 하시오.”
류성룡이 벼슬길에 오른 후 지방 근무를 하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조선시대는 국가에 대한 충성뿐만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도가 그에 못지않게 중시되던 시대였다.
왕과 류성룡의 대화에는 이러한 시대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부모님만큼 우리들을 보살펴 주고 도와주는 분은 없다.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효도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이다.
선비들은 효를 모든 행동의 근본이 된다고 보아 강조하였고 일상생활에서 이를 실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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