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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도피성
수 20:1-9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
3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4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5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
6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7 이에 그들이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
8 여리고 동쪽 요단 저쪽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 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구별하였으니
9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수 20:1-9 / [도피성]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러주라고 여호수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3) `내가 모세를 통하여 이미 너희에게 말하였던 것처럼 도피성을 마련하여라. 그래야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떤 이의 목숨을 빼앗은 사람, 곧 의도적으로 목숨을 빼앗지 않은 사람이 그곳으로 몸을 피할 수 있을 것 아니겠느냐? 도피성으로 도망하여 죄값을 꼭 갚아야만 하는 가장 가까운 친족의 손에서 벗어나야 할 것 아니냐? 4) 고의로 사람을 죽이지 않고 갑자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비의도적으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여러 도피성 가운데서 어떤 성읍이든 그곳으로 몸을 피할 수 있다. 우선 사람을 죽인 사람은 도피성의 문 위에 있는 마을회관으로 가야 한다. 재판받는 장소인 성문 위 마을회관으로 올라가서는 성에 살고 있는 마을 지도자들에게 사건이 이러이러하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몸을 피하게 되었노라고 일일이 밝혀야 한다. 그러면 마을의 지도자들이 그 사람을 성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머물 곳으로 안내할 것이다. 5) 비록 죽은 이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 피로 꼭 복수를 해야만 하는 사람, 곧 죄의 복수자가 이 사람을 뒤쫓아온다 할지라도 도피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피의 복수자에게 넘겨 주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이 이웃을 죽인 까닭은 의도적으로 그랬다거나 또는 그에게 앙심을 품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죽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순간적인 실수로 그의 목숨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도피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도망 쳐 온 그 사람의 목숨을 반드시 보호해야 한다. 6) 무의식 중에 살인을 저지른 그 사람은 성에 살고 있는 공동체 식구들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 도피성에 머무를 수 있으며, 또한 대제사장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성읍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살인을 저질렀던 그 사람은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집으로,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성읍으로, 자기 집안 식구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도망쳐 왔던 그 성읍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7)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도피성을 다른 성읍과는 다르게 특별히 구별하여 두었다. 납달리 산악시대의 갈릴리에 있는 게데스, 에브라임 산악지대에 있는 세겜, 유다 산악지대에 있는 기럇아르바라고도 불리는 헤브론, 8) 또 여리고 동쪽 요단강 건너편에는 다음과 같은 성을 도피성으로 지정하였다. 르우벤 지파가 살고 있는 지역 가운데서는 평원 곧 광야에 있는 베셀, 갓 지파가 살고 있는 지역 가운데서는 길르앗라못, 므낫세 지파가 살고 있는 지역 가운데서는 바산에 있는 골란. 9) 이상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피성으로 지정한 성읍들이다. 이 성읍에는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실수로 이웃을 죽인 이스라엘 사람이나 그들 가운데 몸붙여 살고 있는 나그네 또는 뜨내기가 몸을 피할 수 있다. 이 성으로 몸을 피한 사람을 그 누구도 죽여서는 안 된다. 성의 공동체 식구들 앞으로 나아와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에게 손대어서는 안 된다. 피의 복수자가 그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도피성은 일종의 보호 감호소입니다. 고의성이 없는 살인자들을 보복자(피해를 당한 사람의 가족이나 친척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피난시키는 신성한 구역이었습니다.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1-3) 하나님께서는 도피성을 정하게 하여 우발적으로 살인한 사람을 보호하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가족이나 친척 중 누가 살해를 당하면 보복은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었습니다. 고의가 아닌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유가족들은 보복을 해야만 죽은 사람에 대한 예우를 다 갖춘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칫하면 보복이 새로운 보복을 낳는 악순환이 될 수 있었습니다. 도피성에 대한 규례는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경우 이 보복의 고리를 끊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보복자가 따라온다 할지라도(4-5) 실수나 사고로 사람을 죽인 자는 도피성에 이르러 성의 장로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들의 허락에 따라 성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살인자가 일단 도피성에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도피성 사람들의 보호를 받습니다. 훗날 도피성의 장로들은 이 사람을 정식 재판에 회부하게 됩니다. 그러나 살인자가 찾아와 도피를 요청할 때 고의성이 명백할 때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을 도주한 곳으로 돌려보내 자신이 흘린 피에 대해 응징을 받게 하였습니다(신 19:12).
대제사장이 죽기까지(6-9) 실수로 사람을 죽여 도피성에 머물던 사람은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 안전하게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인 대제사장의 죽음에 대속적인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는 참 대제사장이신 예수가 속죄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피성은 가나안 동편에 세 곳, 서편에 세 곳 모두 여섯 곳이 있었습니다. 어느 지역에서든 실수로 살인한 자가 하룻길에 도착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께 피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기회는 누구에게든 열려 있습니다.
적용: 참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실수로 지은 죄뿐 아니라 알고 지은 죄까지도 우리가 진심으로 돌이키면 용서하십니다. 오늘 이 은혜의 팔에 안기십시오.
바다를 흔히 지구의 정화조라고도 합니다. 육지에서 흘러들어온 온갖 더러운 쓰레기와 오물을 바다는 흡수하고 정화해 다시 깨끗한 해수로 돌려줍니다. 주변을 보면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품어 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도 마음 속에 바다가 있었을 것입니다. 수없이 부서지고 씻겨 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에는 바다 같은 포용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는 어느 깊이의 바다가 있습니까?
< 설 교 >
도피성의 의미
수 20:1-9
1. 하나님은 인간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가인이 아벨을 광야로 유인해서 쳐 죽일 때 하나님은 아벨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가인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아무도 그를 쫓는 사람이 없는데도 누가 자신을 쫓아 보복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의 동쪽으로 도망칩니다. 스스로 자존하기 위해서 방황의 땅에 성을 쌓고 자기의 두려움을 감추면서 새로운 시작을 알립니다.
하나님은 그 이후로 율법을 주시면서 “살인하지 말라.”고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분명하게 천명하십니다. 출21:12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 것과 같은 고의적인 살인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생명으로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사람이 같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가장 사람답지 못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서, 성적으로 잘못된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일에 앞장서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답지 못한 죽음을 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한 경우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일을 행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일어나는 사고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도피성이라는 제도를 마련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수아서는 1-11장까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2-19장까지는 그 땅을 분배하는 이야기입니다. 23-24장은 여호수아의 유언과 고별사입니다. 그렇다면, 20-22장은 왜 있을까요? 그것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하나님은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에 누차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출21장, 민수기 35장, 신명기 19장에 도피성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차 강조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말씀들 가운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꼭 실천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 바로 이 도피성이라는 것입니다.
정복과 분배의 중요한 일은 이제 다 끝났습니다. 늙은 여호수아는 이제 좀 쉬기를 원했고, 이스라엘도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많은 말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말씀들 가운데 도피성에 대한 제도를 꼭 실천하되 너희를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너희를 위해서 라는 말씀이 마음에 닿습니다. 도피성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서로 보호받고 피의 보복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바로 도피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피의 보복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도피성에서 자유롭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를 원하셨습니다.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매우 잘 정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곳곳에 도피하라, 도피하라는 표지판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도망자들을 안내하기 위해 길을 따라 교통수단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골짜기로 도망가지 않고 가능한 지름길을 택해 도피성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필요한 곳에 다리를 건설해 놓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이 도피성은 전국에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7-8절을 보면 이 도피성들은 요단 서편의 게데스, 세겜, 헤브론에 또 요단 동편에는 베셀, 길르앗라못, 골란에 건설했습니다. 이 성읍들은 이스라엘 어느 곳에서나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신19:3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봄과 비온 후에 도피성으로 가는 도로를 보수 공사하는 일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갈림길마다 도피성으로 가는 도로 표지판을 세웠습니다. 어디서고 쉽게 찾아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도피성의 문은 항상 열어놓았습니다. 식량도 넉넉하게 보관해 두었습니다.
2. 도피성에 들어가는 규정
그런데요? 이런 도피성에 들어가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고의적으로 살인한 경우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 것과 같은 고의적이고 악질적인 살인은 도피성과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다만 부지중에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일어난 사고의 경우에만 해당되었습니다. 부지중에 라는 말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살인을 한 사람이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도입니다. 그 살인이 고의적인 살인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니고, 실수로 부지중에 일어 난 것만 해당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친구를 슬쩍 밀었는데 죽거나, 산에서 나무하다가 도끼가 날아가서 옆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전혀 의도하지 않은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도피성이란 바로 이렇게 부지중에 살인자가 된 사람들이 피의 보수자를 피해서 도망치는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세계의 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 보복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피의 보수자”가 되어서 성급한 복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억울한 죽음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사고인데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피의 보복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피해자가 사회적으로 힘이 강한 사람일 경우 불의한 보복을 할 수 있습니다. 또 보복은 보복을 낳아서 사회가 피의 보복으로 잘못된 수레바퀴가 굴러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 잘못된 피의 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성급하고 과도한 복수를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신 장치가 바로 도피성이라는 제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도피성에 들어간 사람이 언제까지 도피성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도피성의 죄인을 위해서 하나님은 두 가지 법칙을 정해 주셨습니다. 민수기 35장에는 타인을 살해한 사람에 대해 피의 보수자가 죽일 수 있는 경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 사람이 도피성에서 밖으로 나올 경우(민35:26-28절)입니다. 이 경우는 오늘 본문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과실치사가 아닌 의도적인 살인인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도피성에서도 보호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 경우에 피의 보수자는 개인적인 보복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우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피성에 남아 보호를 받는 것은 언제까지입니까?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서 살아야 합니까? 이 문제는 도피성으로 도망한 사람들, 즉 오살이기는 하지만 사람을 죽인 죄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5-6절과 9절을 보십시오. 그 살인자가 회중 앞에서 “재판을 받기까지” 일단 머물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재판으로 그가 고의로 살인한 것이 드러나면 내쫓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지중에 오살한 것이 입증되면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도피성에 거하다가 죽은 뒤에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대제사장이 죽어야 돌아갈 수 있다는 규정입니다.
일단 여기까지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고의로 다른 사람을 살해 한 것에 대해 분명한 원칙을 주십니다. 그러나 부지중에 오살한 경우에는 보호를 받도록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피의 보수자가 과도한 보복을 하지 못하도록 도피성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도피성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에 있지 않습니다. 도피성의 진정한 의미는 대제사장이 죽어야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도피성의 진정한 의미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대제사장이 죽으면 여섯 개의 성읍에서 도피성에 피신해 피의 보수자로부터 도망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해방의 날입니까? 대제사장의 죽음은 도피성에 살고 있던 수많은 도망자들에게 그 불편한 유배생활을 끝내고 다시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소망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도피성에서 나와 자유를 되찾은 사람들은 20년 이상을 도피성에서 보낸 사람부터 며칠을 도피성에 머물렀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모든 사람들이 대제사장의 죽음을 기점으로 자유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도피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유일한 소망은 무엇입니까? 대제사장이 죽는 것입니다.
도피성에 죄를 범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살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도 스스로 도피성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유일한 길은 대제사장이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의 경중이나 도피성에서 머문 기간과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무조건적 사면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월절과 흡사한 그림을 발견합니다. 유월절 때 문 인방과 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사람은 모두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있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도피성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는 무조건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대제사장이 죽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이 역설적 상황은 바로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의 주제는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현재적인 안식과 저 안식, 즉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말씀을 결부시키고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결부시킨다는 말은 말씀 앞에 벌거벗겨지기를 기꺼워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안식과 구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안식을 누리는 것은 결국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히4:14절에서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도전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기 때문입니까?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잡으라고 할 때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인 것입니다.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생활,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적용하는 생활은 14절의 표현으로 하면 대제사장이신 예수!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굳게 잡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예수라고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장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제사장에게로 넘어갑니다.
그러면서 4:15절에 대제사장이신 예수가 하시는 일들이 설명됩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이 하는 일은 백성들의 아픔이나, 문제, 어려움이나, 고통을 대신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 이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요’라고 기도하는 중보자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제사장이 누구냐? 백성들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대제사장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대 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옛날 번역에는 체휼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깊은 의미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 또는 함께 고난을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히브리서 가자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왜 예수를 굳게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 대제사장이신 예수는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고통을 느끼고 함께 고난당하기를 기꺼워하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대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5장에 우리의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5-10절)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는 어떤 분입니까? 그분도 사람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들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기 위해서 종의 형제를 가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사람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 경험해야할 고통과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8절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고 표현합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순종을 배워야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고 오는 세대의 연약한 사람들에게 순종이란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를 그렇게 고난 가운데 순종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과 애환이 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일반적으로 겟세마네 기도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순종과 고난은 그분이 사람인 우리를 동정하실 수 있는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분은 구약의 대제사장들처럼 완벽한 사람이 되셔서 사람이 겪어야 하는 고난, 순종을 배우신 것입니다. 왜요? 바로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을 위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사람으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사람의 모양으로 오게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사람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내용이 지향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들보다 더 본질적으로 흘러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안아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대제사장들이 감당했던 것보다 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이해하시고 품어주시는 대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와 같이 고난당하시고 우리처럼 순종하심을 배우신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구약의 대제사장들보다 더 우리를 이해하고 안아주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흘러 떠내려가는 마음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 안식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 다시 우리 주제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도피성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고 안식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게 되는 시점이 언제입니까? 대제사장이 죽은 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모든 대제사장들이 바라보고 있는 진정한 대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그 사건은 마치 구약의 도피성에서 모든 사람이 자유를 얻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참된 자유와 안식과 평안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6:18-20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면서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도 마치 도피성만을 생명의 유일한 소망으로 보고 그리로 피하여 가는 이스라엘처럼 거기서 큰 안위 즉 보호를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거기가 어딥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도피성은 휘장 안으로 앞서 들어가신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피성에 담겨진 대제사장의 죽음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으로 지불되시고 우리에게 주신 이 자유! 이 자유를 사랑의 종노릇하는 자유로 사용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이 자유, 이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도피성에서 자유를 기다리며 대제사장만 바라보던 도피성 사람들처럼 우리 삶이 그리스도를 바라고 믿고 따르는 삶이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도피성과 예수
수 20:1-9
우리 사회에는 학대 받는 여성들이나 학대 받는 아동들이 피신하여 생활할 수 있는 쉼터가 있다. 폭력 남편 또는 폭력 부모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피신처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의식주를 제공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돕는 기관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제도가 성경에 나와 있다. 도피성이란 제도이다.
도피성이란? 오살한 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지정해 놓은 성읍을 말한다. 오살한 자란? 고의성 없이 실수로 사람을 죽게한 자를 오살자라 한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과실치사”로 사람을 죽게 한 자를 뜻한다. 성경은 실제적인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데...
신 19:5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의 이웃을 맞춰 그를 죽게 함과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오살한 자가 도피성으로 피신하게 되면 피해자 가족의 보복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도피성 제도는 오늘 본문 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다(출 21:3, 민 35:11~, 신 19장). 그 만큼 이 도피성 제도를 중요시 여기고 있다는 것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라 할 수 있다.
청년 시절, 교회에 출석한 이후로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알기 위해 성경을 읽는 중에 도피성 제도에 대한 내용을 읽고 크게 감동을 받은 기억이 있다. 오늘날도 세계 도처에 인권이 유린되는 나라가 많다. 얼마 전에, 다큐멘타리에 인도의 어린 소녀들, 미얀마의 어린 아이들이 노동력을 착취 당하고 있는데 모습이 방영되었다. 그러나 정부도 사회단체도 어느 누구도 그들을 돌봐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부터 약 3500년 전, 고대 사회에서 이와 같은 민주적 인권보호제도가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렇다면 이 도피성 제도가 단순히 오살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로서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인가?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도피성 제도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특별히 구약 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예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모형론”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모세가 그렇고, 출애굽 사건이 그렇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출하는 구원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을 감당한 인물이다. 그러니까 구약의 인물이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라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가 되시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도피성 제도도 역시 완전치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가?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도피성은 유일한 피난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 3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도피성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오살자의 유일한 피난처이다. 다른 곳으로 가면 생명의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도피성으로 가야만 생명을 구원받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유일하신 구원자가 되신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안상홍, 신천지의 이만희, 구원파의 박옥수, 통일교의 문선명, 몰몬교의 요셉 스미스와 같은 교주들은 도피성이 아니다. 위장된 도피성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예)2013년 부산 WCC 10차 대회, 그들의 신학은 보편구원론과 종교다원주의.
2. 도피성만이 안전한 장소
4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5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
율법의 규칙 중에 이런 것이다. 피해자의 가족 중의 한 사람을 “피의 보복자”로 삼아서 가해자를 죽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때 보복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는 도피성이다. 오살자는 속히 도피성으로 도망쳐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성읍의 장로에게 자초지종을 다 말하면 장로는 그 사람을 안전한 곳에 거주하도록 조처하게 된다. 만약 피의 보복자가 와서 오살자를 내달라고 해도 장로는 내주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오살자는 그 성 안에만 있어야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안전한 도피처가 되신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외쳤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오살자가 도피성 안에 거주해야만 생명을 보장 받는 것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안에 거해야만 한다.
요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3. 오살자의 자유
6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도피성으로 피한 오살자는 먼저 회중 앞에서 장로들에 의해 재판을 받아야 했다. 장로는 오살자의 사실 진위를 가려서 사실이 판명될 경우 오살자를 성읍에 거주하게 한다. 무조건 다 받아 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례 받았다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이름을 올렸다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거짓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여전히 죄 아래에 있고 사망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도피성 되신 예수께로 피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진실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 자유의 몸이 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이 말씀은 난해하지만 신약적으로 적용한다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인을 죄악과 사망에서 풀어주심으로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하신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히 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히 19: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오살자가 대제사장의 죽음을 통해 보복자에게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된 것처럼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자유를 얻게 한 것을 말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4. 도피성의 위치
7 이에 그들이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
8 여리고 동쪽 요단 저쪽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 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구별하였으니
도피성은 이스라엘 전국의 48개 레위인의 성읍 중에서 6개가 지정되었는데, 요단강을 기준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3개. 전국적으로 6개가 지정되었다. 몇 가지 특징이 있다.
1) 산지에 위치해서 잘 보이는 곳.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높이 달리심으로 모든 죄인들이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이(요 3:14, 12:32, 갈 3:1) 도피성 역시 높은 산지에 있다.
2) 잘 찾아갈 수 있도록 이정표를 세우고 길을 닦아둠.
신 19: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3) 전국 어느 곳에서든지 속히 갈 수 있도록 균형적으로 배치함.
그리스도의 복음이 누구에게나 파악되리 만큼 단순하고 평이한 것과 같이 (롬 10;6-8), 도피성 역시 어디서나 갈 수 있도록 편리하게 각처에 설치되어 있었다(신 19:2-3)
아무리 도피성 제도가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너무 멀거나 찾아가기에 어려우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주셨다.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도피성을 찾는 오살자처럼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은 찾기 쉽고 편하다.
5.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함께 허용된 장소
9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도피성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이스라엘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롬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구약시대에 성전 출입에 제한이 있었다. 제사장, 레위인, 유대인, 유대인 여성 그리고 이방인들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말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의로 제자를 삼아..”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때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고 여러 나라 말을 하게 되었다.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온 인류의 소망이 되신다.
사막에서는 신기루 현상이 종종 나타난다. 신기루는 열이나 찬기운 때문에 대기 밀도가 급변
으로 빛이 굴절해서 공중이나 땅 위에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도피성은 오아시스다. 멀리 오아시스가 보여서 부지런히 찾아갔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신기루 현상 때문이다.
시 146: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6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7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피성이 되신다
히 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많은 사람들이 방황한다. 엉뚱한 곳에 가서 엎드리고 빈다. 그러나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의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다. 방황하지 말고 도피성도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면 된다.
교회가 도피성이 된다
여러분이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했던 자리. 시험들면 피하고 멀리하는데, 그것은 사탄의 궤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힘들고 어려우면 교회당으로 나오라. 이런 저런 일도 교회를 멀리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회복될 수 있는 방법도 다시 교회당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한 주 후면 성탄절을 맞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누구신가? 우리 인생 여정에 진정한 도피성이 되신다.
도피성
수 20:1-9 / 홍연수 목사
제 2차 세계대전이 1945년 5월 독일의 패배로 사실상 끝났을 때 유대인들의 마음속에는 이제는 어찌하든지 자신들이 당한 억울한 피값을 찾아야 한다는 복수심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당시 독일의 육군 중령으로서 유대인 학살을 담당하였던 아이히만 아돌프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을 아무런 까닭 없이 잡아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감금하고 끝내는 그들을 가스실에 집어넣어 강제로 학살한 사람입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신 19:21) 갚을 수 있다는 율법의 가르침을 가진 유대인들은 땅 끝까지 찾아가서 아이히만을 자신들의 법정에 세우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자 복수자의 사명으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아르헨티나에 몰래 숨어있던 아이히만을 1960년 5월 체포하고 1961년 재판에 회부하여 그 해 12월 15일 유죄 판결을 내려 1962년 5월에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1945년에 독일이 항복했으니까 거의 17년 간 땅 끝까지 원수를 찾아서 체포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중 하나가 남더라도 원수를 찾아내고야 마는 유대인들의 이 집념은 그들의 문자적 구약정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을 수 있다는 율법의 계명을 통하여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을 확인시켜 주셨지만, 그 가운데 특별히 본의 아니게 부지중에 살인죄를 범한 자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과 상반되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또 다른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즉 부지중에 고의성이 없이 살인죄를 범한 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도피성 제도를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도피성 제도를 살피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주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땅의 분배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앞 절인 19장 51절에 보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고 하십니다.
19장까지는 가나안 정복 및 기업 분배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대업을 무사히 끝마친 여호수아에게 새로운 지시를 주시고 있는데 그것은 곧 기업의 땅 중에서 도피성을 선정하라는 것입니다.
20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주체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도피성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복 이전에 명령하신 것입니다. 갑자기 '도피성이 필요하겠다' 그래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 정복 훨씬 이전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기 직전 모압 평지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 도피성 택정에 대하여 이미 말씀해 주셨습니다(출 21:12; 민 35:9~34; 신 19:1~13). 그리고 가나안 땅을 무사히 정복한 이후에 여호수아에게 다시금 당부를 하시고 있습니다.
즉, 이 도피성은 여호수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고, 모세의 지시를 따른 것도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제도였던 것입니다.
그 도피성의 목적은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에게 "피할 곳"을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부지중"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고의성이 없는, 우연한, 실수의'라는 뜻이며 '순간적 격분에 의한 충동 때문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구체적인 살해 동기나, 사전에 의도된 계획 같은 것이 전혀 없이 실수나 우연한 사고로 사람을 죽이게 된 경우를 위한 것으로서, 오늘날로 치자면 바로 '과실치사(過失致死)'에 해당되었습니다.
3절 이하에 여러 차례 "피의 보복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보복자"란 바로 '고엘'이라는 유명한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도로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주로 '대신 갚아 주는 사람' 혹은 '기업 무를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원수를 갚아 주려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죽임을 당한 쪽의 가족이나 친척 중에 복수심에 불타서 그 살인자를 잡아 죽이려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부지중 사람을 실수로 죽인' 것은 합법적인 재판을 받는다면 결코 사형을 당할 만한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원한이라는 감정이 있어서, 비록 실수로 일어난 사고인 줄은 안다 할지라도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족을 죽인 사람이라면 역시 어찌하든지 죽여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입니다.
도피성은 바로 그런 '인간적인 복수심' 때문에 어떤 억울하고 부당한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세워진 제도였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같으면 그처럼 '과실치사'의 경우에도 정당하게 재판을 받고, 개인적인 복수는 당하지 않도록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옛날 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즉 이 도피성 제도는 과실치사를 저지른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기 위한 것으로서 당시 주변 이방 민족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제도였습니다. 즉 다른 나라의 것을 모방한 것도 아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해서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모세나 여호수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줄을 아시고 마련해 주신 것이 바로 '도피성'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 사함'이라는 것은 그 개념의 발상부터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면 비록 그것이 '과실치사'라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지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 사회의 상식과 법과는 달리 '분명히 죄를 지은 사람이지만 그 죄값도 받지 않고 그냥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인과응보라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에게는 아주 생소한, 전혀 뜻밖의 개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인애와 자비가 한량없으신' 하나님만이 그런 '죄 사함'이라는 실로 놀라운 은혜를 우리 죄인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가장 큰 일 두 가지를 말할 때에 하나는 '창조사역'이며, 또 하나가 바로 '구원사역'인 것입니다. '죄인에 대한 용서와 구원'은 사람이 스스로 필요하다고 인식해서 하나님께 요청을 올림으로써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위대한 성자가 득도를 함으로써 비롯된 것도 아니었고, 무슨 교주가 착상해 낸 기발한 아이디어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오직 하나님께서 오직 당신의 인자하심을 따라 죄인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인 것입니다. 인간의 '법'이나 '공의'만을 따진다면 결코 성립될 수 없는, 아니 애당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이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친히 베풀어 주신 '놀랍고도 위대한 은혜'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절을 같이 읽습니다.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구약 성경에 보면 히브어로는 '아리 미클라트'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city of refuge'라고 하며 우리 성경에는 '도피성'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리 미클라트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끌어드리는 성읍'이라는 뜻입니다.
민 35장 12절에는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도피성의 목적은 고의적인 살인의사 없이 우발적으로 살인한 자가 보복자로부터 보복을 피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피처를 주시고 안식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신 하나님의 뜻은 얼마나 고맙고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것은 관대히 용서하여 주시는 자비와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와 늘 보호하여 주시는 공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회개하며 나아갈 때 살인범보다도 더한 죄일지라도 사랑으로 덮어 주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자비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지중 사람을 죽인 자가 나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통해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 후, 땅 나누는 일을 마쳤는데 하나님께서는 20장에서 살인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미리 도피성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과신하면 안 됩니다. 누구나 부지중에 오살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럴 수 있어!' 이런 말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어쩌다 가끔 쓸 수도 있겠지만 '절대로, 반드시, 언제나, 매일, 결코, 항상, 꼭' 이런 단어를 자주 쓰는 사람은 완벽주의자 성향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완벽주의가 가지는 특징은 스스로 너무 높은 기준을 정해놓고, 한 번 어기면 그것으로 자책하면서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것을 다 물거품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벽주의 부모 밑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자존감이 낮고 의욕상실에 빠져서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인색하니까 타인에 대해서도 인색하고 날마다 비판이 많습니다. 또 엄격한 까닭에 쓸모없는 일에 과잉 헌신을 하고, 너무나 스케줄에 집착하다가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내가 던지는 말이 살인을 하는 줄도 모르고 생각없이 던지는 말 중에서 상처 주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가정에서 남편이 반찬투정을 하니까 부인이 '쥐꼬리만큼 벌어다주면서 뭘 바라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 때문에 남편이 일주일 동안 가슴앓이를 하고, 그게 신혼 때 있었던 일인데 20년 동안 담고 있어도 상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 부인이 부지중 살인을 한 것입니다. 칼로 살인을 해야 살인이 아닙니다.
민수기 35장 13~15절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3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을 도피성이 되게 하되 14 세 성읍은 요단 이쪽에 두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 두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거류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부지중에 살인한 모든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기 전부터 도피성의 필요를 이미 아셨으며 그래서 부지중에 살인한 자를 위해 피할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날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피할 길을 역시 열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진정 나의 도피성이요, 피할 길이 되는 곳은 진정 어디입니까? 바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우리 구주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 도피성은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7절과 8절을 보면 요단강 서편의 가나안에 지정된 세 도피성 ① 갈릴리 게데스(납달리) ② 세겜(에브라임) ③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유다)과 요단강 동편에 지정된 세 도피성 ① 베셀(르우벤) ② 길르앗 라못(갓) ③ 바산 골란(므낫세), 모두 여섯 개의 도피성을 지정해 주셨습니다.
메튜 헨리는 여섯 도피성들의 이름이 지니는 뜻을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해석하였습니다. 거룩한 곳을 뜻하는 게데스는 성전 되신 그리스도를(요 2:19), 어깨를 뜻하는 세겜은 정사를 어깨에 메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사 9:6), 교제를 뜻하는 헤브론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고후 5:18,19), 성채를 뜻하는 베셀은 성도들이 피할 성채 되시는 그리스도를(시 91:2), 높은 곳을 뜻하는 길르앗 라못은 성도들로 하여금 높은 하늘에 앉게 하시는 그리스도를(엡 2:6), 기쁨을 뜻하는 골란은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그리스도를(요 15:11) 각각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도피성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도피성은 어떤 곳에 세웠습니까? 도피성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보면 동편에 셋, 서편에 셋으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므로 가장 먼 곳에서도 쉬지 않고 하루 만에 이 도피성까지 도달할 수 있게 했습니다.
신 19장 3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로인데 "도로를 닦으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전승에 의하면 이 도로는 넓이가 14m였다고 합니다. 14m이면 4차선 고속도로보다 더 넓은 도로입니다. 이 정도의 도로라면 로마시대의 어떤 도로보다 더 훌륭한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가 얼마나 크고 넓은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으로 피해오는 오살자는 대개가 단체가 아니요, 개인입니다. 한 사람의 개인을 위해서 이렇게 넓은 도로를 만들게 하셨다는 것 이 사실을 접하고도 감동이 없다면 그것은 비정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자적으로는 오살자 한 사람을 위한 이런 넓은 도로이지만 그러나 예표적인 의미로는 온 인류를 그리스도에게로 초청하시는 그리스도의 넓은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들은 일년에 유대력으로 아달월 그러니까 12월에 반드시 1차씩은 이 도로를 정비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만약 무너져 패였거나 장애물이 있으면 반드시 정비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일등 도로를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이 도로는 왕의 직속 관할입니다. 그러므로 이 도로를 파괴하거나 딴 목적으로 변동시킬 수 없습니다. 이렇게 도로를 잘 정비한 이유는 피의 보복자가 추격할 때 오살자가 도피성의 먼저 도착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배려입니다. 거기다 '미클라트'라 하여 도피성이라는 방향 표지판을 설치하게 했습니다.
화살표를 넣어 미클라트! 미클라트! 미클라트! 그래서 누구든지 이 표지판만 보고도 도피성을 쉽게 찾아 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2절에 "너희를 위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도피성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참 도피성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은 어려운 철학이 아니라, 지구상의 어느 종족 어느 인종이든지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누구든지 쉽게 찾을 수가 있으며, 누구든지 찾으려고 결심만 하면 쉽게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요 3:16, 1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 4-6절 말씀은 도피성을 사용하는 절차와 방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읍 문어귀"는 당시 사회에서 재판도 집행되던 장소였습니다. 도피성으로 도망친 사람은 바로 거기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라고, 즉 모든 자초지종을 사실대로 진술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부지중 오살한 것'이라고 즉 과실치사였다고 주장하면 그 '즉결재판'에서는 일단 그를 무조건 도피성에 받아 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피의 보복자가 그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절대로 그들의 손에 "내어주지 말지니"라고 한 대로, 피가 피를 부르며 복수가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악순환을 철저히 방지하도록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회중 앞에서 재판을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정말 고의로 살인한 자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 위한 정식 재판이었습니다. 물론 그때라도 그 사람이 고의로 살인한 것이 밝혀지면 더 이상 도피성에 거주하지 못하고 쫓겨나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실수로 사람 죽인 것이 재판에서 드러나면 그는 도피성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영주권이 정식으로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도피성은 누구나 쉽게 찾아올 수 있게 하였고,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셋째, 도피성은 어떤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까?
냉엄하리만치 율법이 철저하게 적용되던 여호수아 당시의 상황에서 '도피성' 제도는 하나의 파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 도피성이 살인자가 피할 수 있는 성이라 하여 아무 살인자가 모두 피할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피할 수 있는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첫째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한 자만이 피하는 곳입니다. 도피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부자나 학식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더욱이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는 도피성의 문을 두드릴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을 죽인 살인자 즉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식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들의 도피성이 되신 예수님께 피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식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정녕 스스로를 의롭다 칭하는 교만한 사람은 결코 도피성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피성에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인식이 기독교의 시작이자, 도피성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는 첫 걸음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려 오셨기 때문입니다(마 9:13).
둘째로 절박한 심정으로 나아가는 자만이 피하는 곳이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이곳 아니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곳이 도저히 없다는 절박한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부지중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였습니다. 때문에 보복자가 그 생명을 빼앗으려고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도피성이 자신의 생명의 유일한 안식처라 확신하고 그 입구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전력질주 할 것입니다. 그 행동 여하에 따라 생명의 보존여부가 달려 있다는 절박한 인식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도피성이 아니라도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도피성에 관한 확신이 희미하다면 도피성으로 피하는 일을 포기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도피성이 되신 예수님께 절박한 심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그분만이 나의 생명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완전하게 그에게 안기기까지 전력 질주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대적 원수 마귀는 쉴 사이 없이 우리를 공격하며 미혹하며 쫓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죄를 고백하는 자만이 피하는 곳이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에 도착하면 도피성 입구에 있는 장로들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합니다(20:4).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느꼈고, 때문에 도피성 정문까지 쉬지 않고 달려 왔다 하더라도 자기의 죄를 장로들에게 고백하지 않는다면 결코 쉴만한 장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도피성의 은총을 입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 죄를 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6절에 보면 그처럼 합법적으로 도피성에 거할 수 있는 기간을 두고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도피성으로 피해 왔을 때 그를 맞아 들여 주었던 현직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도피자가 이제 도피성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그때에는 그가 옛날에 저질렀던 '부지중의 살인'에 대하여 그 어느 누구도 그에게 복수할 수 없도록 법적으로 보호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도피자에게는 이제 '완전하고도 영구적인 사면'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성취하실 '대속 사역'의 그림자요, 예표입니다. 즉 참된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대신 희생 제물로 바쳐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대신 갚아 주심'으로써 우리가 '완전하고도 영구적인 죄 사함'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바로 이 '도피성의 대제사장'이 뚜렷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분명히 일반 이스라엘 백성이 저질렀지만, 그 죄의 완전 사면은 그 죄와는 직접적으로 아무 상관없는 대제사장의 죽음과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살인죄를 저지른 본인은 자신의 '죄 사함'에 대하여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며 또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제3자인 대제사장에 의하여 그처럼 완전한 사면을 얻고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니 그로서는 그보다 더 감사하고 감격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의 '죄 사함'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때문에 주어졌습니다. 정작 죄인인 우리 쪽에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고행'을 통하여 이제 죄 용서 받을 만큼 충분한 '죄값'을 스스로 치렀기 때문에 용서받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선행'의 공로들을 많이 쌓아서 이제 '나의 죄를 사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당당하게 요구할 만한 입장이 되었기 때문에 죄 사함을 얻게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100퍼센트 순전히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공로' 덕분일 뿐입니다. 우리가 받아 누리게 된 '죄 사함'은 그야말로 '공짜로 받게 된 정말 고마운 선물'인 것입니다. 하지만 공짜로 받은 것이라고 해서 뭔가 불확실하거나 모자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일단 이 '죄 사함'을 받고 나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할 수 없으며, 세상의 그 어떤 법도 우리에게 '사망의 선고'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대제사장의 죽으심을 통하여 '칭의'를 입게 된 사람은 그야말로 '죄로부터 완전하고도 영원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피성의 제도'는 만약 그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 이전에 마음대로 도피성을 떠나면 그런 '사면의 혜택'을 누릴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즉 그를 쫓던 '보복자'가 그 살인자를 죽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 구원의 언약 밖으로 나가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죄인을 무조건적으로, 그러면서도 완전하게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베풀어 주신 이 대제사장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평생토록 늘 감사드리면서 바로 그 '대속의 공로'에 힘입어 영원한 구원에까지 이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도피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은 그저 '땅 분배'만 한다고 절로 축복의 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도피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주는 물질적 풍요보다도 더 중요한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생활에 진정한 축복을 넘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죄 사함'을 베풀어 주는 '도피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오직 하나님께서만 미리 아시고 그처럼 예비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축복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가나안'이 그랬다면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살기 좋아 보여도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이 저주의 선고로 인하여 모든 사람은 다 여전히 죽음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똑같이 적용되는 엄연하고도 냉정한 현실입니다.
감사한 것은 바로 우리는 놀라운 축복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죽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시대 말입니다. 이미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 놓으셨기에 누구든지 믿고 회개만 하면 됩니다. 구원입니다. 해방입니다. 은혜입니다. 자유입니다. 축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지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죄가 사함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지정해 주신 '구원의 도피성'에만 이 무서운 저주, 이 두려운 사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진정한 평안과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원하고도 참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거저 선물로 주시는 '죄 사함'의 은총입니다. 결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이 놀라운 '도피성', 우리의 인생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게 해 주는 이 고마운 '도피성'을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찾고 그 구원의 은혜 안에 영원히 거주하는 축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고통과 시험과 두려움을 당할 때에 오직 '여호와께 피하는' 자에게만 진정한 '도피성'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품만이 죄인에게 있어서 진짜 피난처요,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짐이 괴로울 때, 죽음의 고통이 나를 짓누를 때일수록 죄인의 '도피성'이 되어 주시는 이 주님께로 즉시 달려가 그 넓은 품에 더욱 깊이 안김으로써 금세에서도 참된 평안을 누리고 내세에서 영원한 구원까지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도피성의 은혜
(수 20:1-9 찬송 342장
우리는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복한 땅의 분배를 마친 것까지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너무도 잔혹한 살해가 저질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분명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이와는 전혀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은 가혹한 명령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무신론주의자 중 대중적인 지지도를 얻고 있는 리처드 도킨스(R. Dawkins)는 하나님을 시기와 교만, 불의로 가득 차 있는 분으로, 용서하지 못하는 잔소리꾼으로, 또한 사악하고 피를 좋아하는 인종 학살자와 같은 존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근거로 성경에 등장하는 잔인한 전쟁의 역사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특히 유럽사회를 휩쓸었던 잔혹한 종교전쟁의 예를 제시하곤 합니다. 이를 통해서 그는 대중을 향해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한 번 상상해 보라고 유혹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 같은 견해는 상당히 주관적으로 치우쳐 있다는 점을 부인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반대로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또한 이를 믿고 섬기는 주님의 백성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삶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간과하거나, 아예 의도적으로 다루려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시켜줄 있는 부분만 선택적으로 골라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역시 우리 입맛에 맞는 하나님의 이미지만 골라서 그분을 믿고 섬기면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리게 까지 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품으시고자 하는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동시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인들을 모조리 섬멸하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도 회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심판도 그 본질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품어주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것도, 동시에 그분의 백성마저 강하게 심판하시고, 가나안 땅에 거주했던 이방민족들에게 강력한 심판을 명하신 것도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에 있었던 것입니다. 즉 가나안 땅 정복전쟁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차지하게 하려고 일으킨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후손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도록 이끄신 궁극적인 목적은 잔인하게 죽이고 파멸시키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생명을 살리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피성제도입니다.
드디어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지파별로 가나안 땅의 분배가 완수되자, 성경은 곧바로 도피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피성은 요단 동쪽에 세 군데, 요단 서쪽에 세 군데, 그래서 총 여섯 군데가 있었습니다. 도피성은 어떤 사람이 고의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될 때 그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살인자가 여호와의 단에 있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잡아 내려서 죽이라는 명까지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주변 나라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던 소위 동태복수법이라고 일컫는 제도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을 강조하는 법으로써, 피해를 입은 사람은 가해자에게 자신이 당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응징이나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제도였습니다.
물론 구약에도 그러한 요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러한 동태복수법을 근본적으로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 중의 하나가 바로 도피성 제도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생명을 죽이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생명을 살리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잘못된 것은 분명히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에 대해서는 심판을 명하십니다. 반면에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된 경우는 그가 피해자 측으로부터 살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일단 실수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면, 그 자는 가장 가까운 도피성으로 가서 그 성의 장로들에게 사고의 경위를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장로들은 그 말을 듣고 그를 성 안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있을 곳을 마련해 주고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만약 그를 복수하고자 하는 사람이 와서 그를 내놓으라고 해도 절대로 이를 허용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성읍에 머물러 살다가 회중 앞에서 재판을 받은 다음에, 당시에 대제사장이 죽은 뒤에야 자기 집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이스라엘 모든 자손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도피성 제도의 근본목적은 생명존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이 살인을 했다 해도 그것이 실수로 비롯된 것이라면 살인을 저지른 사람의 생명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피성은 하나님의 피난처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부지 간에 사람을 죽인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얼마나 눈앞이 캄캄하겠습니까? 자기 때문에 사람이 죽은 것도 기막힐 노릇이지만, 이 때문에 자신의 생명도 끊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순간, 그의 머리 속에 도피성이 스칩니다. “그래, 그곳에만 가면 내가 살 수도 있어.” 이런 생각이 들면 그는 젖 먹던 힘을 다해서 도피성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렇게 해서 도피성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입에서 어떤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이제 살았다.” 이 안도의 외침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실수로 사람을 죽게 했다 해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헤친 그 자체는 엄청난 죄입니다. 하지만 그는 비록 죄인이지만, 도피성을 통해서 자신의 생명을 보호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체로 그에게는 놀라운 은혜가 아닙니까? 게다가 이러한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제한된 게 아니었습니다. 외국인에게도 허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도피성은 그 자체로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성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도피성이 있다 해도 그가 도피성으로 발길을 빨리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만약 도피성으로 들어갔다 해도 그곳이 지겹거나 세상이 더 그리워서 마음대로 도피성 밖으로 나갈 경우에는 더 이상 그는 샘영을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가 도피성 밖으로 나갔다가 그에게 피해를 입은 자의 가족이 그를 알아보고 도피성 경계 밖에서 죽였을 경우에는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살인자가 도피성 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까? 대제사장이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소유지가 있는 땅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대제사장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대제사장이 살인자를 대신해서 피 값을 치러 주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살인자로 하여금 그의 신분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대제사장의 죽음은 살인자를 위한 속죄의 죽음과 같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살인자는 이제 자유인이 되어서 자신의 고향땅으로 되돌아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그분의 날개 아래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도피성을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죄인인 우리가 참다운 자유인이 되어 진정한 본향, 즉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서에서 등장하는 여러 잔인한 전쟁 역사를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혼동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여호수아서에는 도피성 제도 등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드러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든지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백성이든지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저항하느냐 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심판을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도킨스가 주장하는 대로 인종 학살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도피성에 이스라엘 백성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에게도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단, 가나안 백성이 심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방해했던 바로 왕처럼 그들의 마음이 강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왕국을 이루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도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며 바른 삶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참하게 심판을 당해야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들이 심판을 당하는 것을 보시고 재미있다고 웃고 즐기시는 분이십니까? 도킨스의 주장대로 하나님은 사악하고 피를 좋아하시는 분이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 때문에 심판당하는 모습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지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얼마나 백성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고 안타까워하시며 통분히 여기시기까지 하셨습니까?
다른 이유를 다 떠나서 부모의 마음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자식은 정말 불효자 중에서도 불효자가 아닙니까? 그 가운데서도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고 나에게는 더 이상 부모가 없다고 말하는 자식을 보면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겠습니까? 비록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해도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고 외치는 이 땅에 수많은 무신론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피눈물을 쏟게 해서는 되겠습니까? 이미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상에서 피눈물을 쏟으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찌 효자로 거듭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심판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효자로 거듭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도피성
수 20:1-9 / 은석교회
오늘날 세상은 과학 기술에 의해서 조성되어지고 유지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얼마전 1999년에서 2000년으로 해가 바뀔 때 세계의 모든 과학이 가슴을 졸이며 노심초사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Y2K, 즉 밀레니엄 버그라는 컴퓨터의 연도 인식 오류라는 문제 때문에 전 세계가 며칠동안 불안해했던 것입니다. 컴퓨터를 처음 만들 때 년도를 네자리가 아닌 두자리로 인식하도록 한 것이 이유입니다. 년도를 두자리로 인식을 하면 1999를 99로 인식하기 때문에 2000년이 되면 00으로 인식을 합니다. 따라서 컴퓨터는 00년을 1900년으로 인식을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1900년에 이미 죽은 사람에게 군 입대 영장이 나온다든지 하는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컴퓨터로 유지되는 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컴퓨터가 오동작을 하거나 멈춰버린다면 세상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결국 컴퓨터의 오류를 방지하고 감시하기 위한 컴퓨터를 또 다시 만들어 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Y2K문제만 해도 지금의 세상이 얼마나 과학에 의존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연도 인식'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문제 하나가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컴퓨터의 힘 때문에 어떤 사람은 요한계시록의 짐승의 수, 즉 666을 컴퓨터라고 주장하기도 할 정도입니다.
컴퓨터에 유지되는 세계, 이것을 사이버 세계라고도 부릅니다. 컴퓨터 안에서 만들어지고 컴퓨터 안에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회사에서 회의를 할 때도 화상회의라는 것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절약되고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만나지 않고 컴퓨터 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학교 교육도 직접 선생님을 만나지 않고 친구들을 만나지 않고 컴퓨터 안에서 만나서 공부하는 세상이 코앞에 있다고 합니다.
요즘 게임방을 가보면 어린 학생들이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라 컴퓨터 안에서 다른 누군가를 만나서 얼굴도 모르는 그와 함께 게임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컴퓨터를 통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합니다.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마주볼 필요 없이 모니터를 통해서 대화를 합니다. 이것을 '채팅'이라고 하던가요?
컴퓨터 세계, 이것이 인간들의 생활에 편리함을 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컴퓨터가 없다면 인간의 생활은 불편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편리함을 경험했을 때의 현상이 아닐까요? '차가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는 말은 누구나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차를 소유함으로서 편리함을 경험한 자들의 말입니다. 오토바이를 이용하는 제 입장에서는 차보다는 오토바이가 편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물론 비가 오고 눈이 오면 이용을 할 수 없는 불편함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러나 도로가 막히고 복잡할 때 기동성이 좋은 오토바이의 편리함이란 오토바이를 이용한 분들만의 경험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편이라는 것은 자기 경험을 기초로 해서 나오는 말입니다. 옛날에 차가 없었을 때는 차가 없어서 불편하다는 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걸어 다니는 것이 최고였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과학의 편리함만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비록 컴퓨터가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있고, 컴퓨터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컴퓨터로 인해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단절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집에서 컴퓨터를 통해서 공부를 하는 세상이 된다면, 성도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도 컴퓨터를 통해서 하게 되어질지도 모릅니다. 결국 성도와 성도의 만남이 없는 세상이 조성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배만 드리면 되기 때문에 컴퓨터를 통해서 예배드리고 헌금은 사이버 은행을 통해서 자동으로 지출되는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을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점점 컴퓨터에 친숙해져가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에 대해서는 불편해져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동네를 보면 아이들이 뛰어 노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각기 학원에 가고 남은 시간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을 즐기기 때문에 서로 모여서 뛰어 노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잊어버렸고, 어색한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요즘 교회 홈페이지가 유행입니다. 그리고 그 홈페이지를 통해서 같은 성도끼리의 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홈페이지에 글을 써놓고 그 글을 통해서 성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함으로서 계속 형제를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느낌으로 인해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할 필요성을 잊어버릴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컴퓨터를 통해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이 결코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 때문에 '교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통해서 대화를 했다는 것 때문에 만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단지 대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만남 안에는 경쟁과 시기와 미움과 다툼과 사랑과 절제와 화평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신자가 주님의 은혜를 안다면 그 은혜는 인간과의 만남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도 인간과의 만남을 통해서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만남이란 소중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만남이 과학과 개인적인 생활로 인해서 점차 줄어들고, 만남을 불편하게 여기게 되었다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볼 문제임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도피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도피성 이야기 역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기 전에 말씀하신 규례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그 땅을 분배하고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은 가나안 땅에서의 삶은 어떤 원칙이 세워진 삶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대로 원칙을 정해서 자기들 편리한대로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칙에 맞추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비뽑기로 땅을 분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땅이라는 원칙 아래서 불평 불만이 아니라 주신 것에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도피성 역시 이스라엘 안에 어떤 원칙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피성은 어떤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까? 2,3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택정하여 부지중 오살한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 중 피의 보수자를 피할 곳이니라"고 말합니다. 도피성이란 살인을 한 사람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피하는 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살인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수로 살인을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도피성입니다. 민 35장에 보면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불의의 사고로 사람을 죽이게 된 자가 이 성으로 피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죽은 자의 친족의 보복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내려진 조치입니다. 피의 보수자란 죽은 자의 억울함을 복수할 자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죽은 자의 가까운 친족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복수로부터 살인자를 보호하는 것이 도피성이라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그 살인자가 회중의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나 당시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가 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그 성읍의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고 합니다.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재판을 통해서 고의가 아니라 실수였음이 판명되면 그 도피성에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사느냐면 도피성에 거하고 있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죽고 나면 그때부터는 자유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자유의 몸이 된 그에게 옛 죄에 대해서 복수하거나 책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도피성 제도를 이스라엘 안에 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스라엘이 자유의 몸이 되고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 누구 덕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의 실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모 형제가 너 때문에 죽었다는 것만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피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만약 도피성이 없다면 가해자는 피해자에 의해서 살인에 대한 대가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한 살인자가 도피성에 의해서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죽어야 할 자가 도피성에 의해서 죽음을 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도피성에 거하고 있던 대제사장이 죽으면 살인자는 더 이상 도피성에 매일 필요 없이 자유의 몸이 됩니다. 자유의 몸이 된 이상 피해자의 친족들도 그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은 죄의 몸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은 도피성의 의미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도피성을 두시고, 그 도피성에는 대제사장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도피성에 의해서 보호를 받다가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의 몸이 됩니다. 이런 모든 것이 곧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대제사장의 죽음으로서 자유를 얻습니다.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그도 도피성이라는 제도에 매어 있어야 합니다. 성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의 몸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라고 하는 은혜 안에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의 자유는 오직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주어진 자유였음을 잊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장자 재앙에서 죽어야 할 자들이었지만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자유의 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라고 그들 안에 도피성을 세우신 것입니다. 도피성을 볼 때마다 무엇이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했는지, 그리고 무엇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게 되었는지를 항상 상기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도피성의 의미를 상기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성의 의미와 정신이 이스라엘 안에 확산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살아가는 삶의 정신이 도피성의 원칙에 세워진 정신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만남 속에서 발생되어지는 여러 가지 실수와 상황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원칙으로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되어지는 것입니다.
가해자는 도피성에서 보호를 받고 제사장이 죽은 후 자유를 얻음으로서 '내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주어진 생명이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피의 보수자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야 할 자신이 도피성 때문에 보호를 받고, 또 제사장의 죽음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체험이 있는지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나라에는 도피성이라는 제도가 없습니다. 아무리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그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또 누군가가 내 친족을 죽였다고 해서 내 손으로 복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도피성의 제도는 제도 자체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도피성의 의미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해야 할 자가 무엇으로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반면에 피해자는 가해자가 도피성으로 피함으로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유의 몸으로 버젓이 살아가고 있는 것을 봐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인 자가 보호를 받고 나중에는 자유를 얻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 피해자의 입장입니다. 결국 가해자나 피해자나 동일하게 도피성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이 사랑과 은혜를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내 의지도 아니고 내 생각도 아니고 내 계획도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저 우연히 죽게 된 것입니다. 죽일 마음 없이 사람을 밀쳤는데 넘어져 죽어버렸다던가 함께 나무를 하고 있는데 도끼가 빠져나가서 옆 사람을 죽이게 했다던가 이 모든 일들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이 진짜 우연입니까?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어서 그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서 증거하기 위하여 그런 일들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해자는 대제사장이 죽음으로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의 죄에 대해서 물을 수가 없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음으로서 모든 죄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해자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자유케 하셨음을 옛날 도피성에 피한 살인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안에서 증거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자는 내 친족을 죽인 자가 자유의 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참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제사장의 죽음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가해자의 자유의 배경에는 제사장의 죽음이 있습니다. 따라서 피해자는 내 친족의 죽음이 아니라 가해자를 자유케 한 제사장의 죽음을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도피성이라는 원칙 아래서 살아갈 때 원한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만남 안에서는 본의 아니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것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해서 형제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사는 성도의 관계라면 바로 이 도피성의 정신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서야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두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가해자고 예수님은 피해자이십니다. 내가 피해를 입은 것보다는 내가 예수님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로 인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이고 내가 죽어야 할 자인데 예수님의 피가 나를 자유케 하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나를 자유케 한 주님의 은혜가 성도와의 만남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보호받는 존재이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죄에서 자유케 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형제를 만나는 모든 관계에서 주님의 은혜가 놀랍고 크다는 것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로는 형제라고 하면서도 조그만 문제를 가지고 자존심 싸움을 하고,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 가지고 싸우고 다투지는 않습니까?
입으로만 예수님의 은혜를 말한다고 해서 은혜를 아는 자라 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안다면 그 앎은 필히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형제를 통해서 이웃과의 만남을 통해서 증거 되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은혜와 믿음은 감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나고 확산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라고 여러분을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여러분들 관계에서 가해자가 있게 하고 피해자가 있게도 하십니다. 다른 형제의 조그만 실수 때문에 상처 입을 수도 있고 또 내가 상처를 입할 수도 있습니다. 전혀 그럴 마음이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나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입힌 형제를 바라보지 마시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지금 은석교회 안에는 도피성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도피성은 주님입니다. 주님이 친히 도피성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셔서 가해자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도피성 되신 주님 때문에 내가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생각하십시오. 용서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마 18장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나옵니다. 주인은 처음에는 그 몸과 처와 자식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갚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종이 엎드려서 간구하자 그 종을 불쌍히 여겨서 놓아 보내주고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길을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지고 갚지 않은 동관을 만납니다. 그리고 빚진 자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 동관은 빚을 갚을 테니 참아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그러나 종은 빚을 갚도록 그 동관을 옥에 가둬버립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얘기를 들으면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로서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분을 낼 것입니다. 아마 그 종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했다면 그도 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종은 자신이 탕감 받은 엄청난 돈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자신이 받을 돈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혹, 우리들이 바로 그 종과 같은 태도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천국은 바로 회계하려 하던 임금과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18:33절에 보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임금의 마음이며 이 마음이 곧 천국입니다. 천국은 불쌍히 여김 받은 것과 같이 불쌍히 여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불쌍히 여기는 성입니다. 불쌍히 여김으로서 죽임을 당해야 할 가해자가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이것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불쌍히 여기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아마 여러분은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 용서 할 수 있는 자로 뒤바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용서할 수 있는 자로 새롭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은석교회의 도피성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용서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피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지셨습니다. 도피성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진심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사신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주님의 용서와 긍휼하심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그 증거는 형제들과의 만남에서 나타나는 긍휼과 용서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만남은 귀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가를 성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도피성은 예수님이십니다
여호수아 20:1-9 / 정도열 목사
지난주에는 땅이 비좁다고 불평하는 요셉 지파 사람들에게 “스스로 개척하라”고 명한 여호수아의 권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18장에서 19장은 나머지 일곱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는 기록입니다. 여호수아는 매 지파에 3인씩 뽑아 기업으로 나눌 땅을 두루 다니며 지도를 그려서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실로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아 그 땅을 분배하였습니다. 19장 51절을 보십시오. 19장 51절을 보십시오.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서 회막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을 나누는 일이 마쳤더라.”
20장 1-2절을 보십시오. 땅을 분배하는 일을 마친 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도피성들을 택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도피성이라는 말은 ‘받아들이는 성읍’이라는 뜻입니다. 도피성은 우발적으로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사람이 피의 보복자를 피하여 생명을 보존하도록 한 피난처를 말합니다. 이 도피성 제도는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무죄한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이 도피성 제도는 범죄한 인간들의 피난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도피성을 택하게 하심으로 연약한 인간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도피성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1-3)
하나님은 땅 분배를 마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도피성들을 정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도피성 제도는 광야에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35장 6-8절에 보면 레위인들에게 48개의 성읍을 주는데 그 중에 6개의 성읍을 도피성으로 택하라 했습니다. 여섯 개 중 셋은 요단강 동편에, 셋은 요단강 서편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거류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부지중에 살인한 모든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민 35:15) 그래서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여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도피성은 피의 보복자로부터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성입니다. 여기에서 “피의 보복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율법적으로 정당하게 복수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상해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출 21:23-25). 그래서 남편은 아내를 살해한 사람을 죽일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을 의무를 짊어지게 됩니다. 이처럼 가해자를 찾아내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죄 값을 되돌려주는 것이 가족의 의무이자 권리였습니다.
제 2차 대전이 끝나자 유대인들은 동족을 600만명을 학살한 장본인을 찾아서 피의 보복을 하고자 했습니다. 유대인 학살을 담당했던 장본인은 아이히만 아돌프 중령이었습니다. 그는 무죄한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감금하고, 가스실에 집어넣어 학살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유대인들은 피의 보복을 하기 위해 그를 찾았지만 그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잠적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1960년 5월에 아르헨티나에 숨어 살던 아이히만을 찾아내어 체포하였습니다. 1961년 재판에 회부하였고, 62년 5월에 사형에 처했습니다. 이들은 거의 17년 간 땅 끝까지 다 뒤져서 그 원수를 찾아서 마침내 피의 보복을 하였습니다. 이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야 한다는 있다는 율법의 정신에 기인합니다. 이것이 피의 보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도끼로 나무를 패다가 도끼 자루가 빠지는 바람에 옆에 있는 사람이 맞아 죽은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 그 사람을 죽일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우연히 도끼자루가 빠진 것입니다. 이는 피의 보복을 할 만큼 큰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죽은 가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릅니다. 그 사람이 고의로 죽였는지, 정말 도끼 자루가 빠져서 죽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흥분한 나머지 죄 없는 사람이 또 희생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운전을 하다가 부주의로 사람을 치어죽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과실치사라고 합니다. 아무튼 도피성은 이처럼 부지 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 피의 보복자로부터 피하여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성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의성이 없이 살인하게 된 사람이 긴급 구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도피성들을 택하여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십니다. 인간의 생명은 존엄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1장 12절에서는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했습니다. 살인한 자는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의로 살인한 사람은 반드시 그 생명을 찾아내어 보수하십니다. 고의성이 입증되면 그를 하나님의 제단에서라도 끌어내어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계획한 일이 아니라 실수로,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인 것이라면 도피성으로 도망하라고 하셨습니다(출 21:13). 그래서 생명을 보호 받도록 했습니다. 고의성이 없이 실수로 사람을 해치게 되었는데 피의 보복을 당하도록 버려두는 것은 또 다른 살인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피성을 만들게 하여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막으셨습니다.
그런데 부지중에 살인하여 도피성으로 피한 자라도 도피성 안에 있을 때만 그 생명을 보호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 성 내에 연금 상태로 지내는 것입니다. 만일 그 성을 벗어나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성 밖으로 나왔다가는 피의 보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갔다 하자 피를 보수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위하여 피흘린 죄가 없나니”(민 35:26,27) 그러므로 반드시 그 성 안에서만 머물러야 합니다. 도피성을 떠날 때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도피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발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본의 아니게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거듭난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남을 해치고, 죽이려 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후에 짓게 되는 범죄는 대개 부지 중에 실수로 짓는 죄들입니다. 연약해서 범하는 죄들입니다.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형제를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또 형제를 미워하고 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라가라 하고 형제에게 미련한 노이라고 하는 자도 살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마 5:21-22). 이 세상에 완전한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에게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피차 상처를 주고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에게는 도피성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으로 인해서 피의 보복자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정죄를 받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십니다.”(요일 1:9) 우리가 죄를 자백하는 것은 바로 부지 중에 지은 죄들을 자백하는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실수로 죄를 지었지만 그 결과가 엄청나게 클 수도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주님 앞에 다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그 죄를 사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II. 도피성 안에는 정죄함이 없습니다(4-6)
4,5절을 보십시오.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 이 말씀은 부지중 살인한 자가 도피성에 들어가는 절차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도피하는 사람이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어귀에 서서 그 성읍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장로들이 듣고 고의성이 없는 것이 인정되면, 그를 받아들여 한 곳을 정하여 거주하게 합니다. 도피성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무료로 제공됩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주거지, 토지까지 모든 것을 다 예비해 놓고 모든 필요를 다 채워 줍니다. 뿐만 아니라 피의 보복자가 뒤따라 온다고 할지라도 살인자의 손에 내어주지 않습니다.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 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도피성에 들어가는 절차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의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피성에 받아들인 후에는 회중 앞에 서서 공개적인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재판을 받아서 무죄한 것이 드러나면 계속해서 그 성에서 보호를 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중 앞에서 재판을 해서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 드러나면 반드시 심판을 받도록 내어주어야 합니다(신 19:12). 그런데 비고의성이 드러났더라도 결코 그 성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살인자는 속전으로도 풀려날 수 없습니다(민 35:32). 그 살인자가 도피성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6) 도피성에 들어온 사람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을 경우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을 경우에는 그 죄가 사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살인한 자가 도피성에 사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놀라운 구원의 비밀이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이는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의 죄 값은 대제사장이 죽음으로만이 지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의 죽음을 부지중에 살인을 하게 된 그들의 죄를 대신한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죽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렇지만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피해 있던 모든 오살자들의 죄가 즉시 사면을 받습니다. 그가 떠나온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표합니다. 히브리서 79장 11,12절을 보십시오. (히 9:11,12)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대제사장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대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돈도 아니고 짐승의 피도 아닙니다. 오직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인 예수님의 죽으심에 의해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진정 불행하게 하는 것은 정치문제가 경제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것은 죄 문제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왕입니다. 그는 장군이이었습니다. 음악가였습니다. 시인이었습니다.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렸습니다. 그러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 그 영혼이 여름 가믐에 마른 같이 되었고, 뼈가 쇠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 사함을 받았을 때 그 행복을 노래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건 없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사함 받은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 1:29).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 피하기만 하면 어떤 죄이든지 다 용서 받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전할 때 예수 믿고 복 받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 받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12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 이이요"(요일 1:7)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은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않고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모든 죄를 깨끗이 사함 받습니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10:17)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이 말씀대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진 줄 믿습니다.
III. 도피성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7-9)
7-8절을 보십시오. “무리가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을 구별하였고 또 여리고 동 요단 저편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택하였으니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을 위하여 선정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 살인한 자로 그리로 도망하여 피의 보수자의 손에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그는 회중 앞에 설 때까지 거기 있을 것이니라.” 요단강 서편의 가나안에 지정된 세 도피성은 ①갈릴리 게데스(납달리) ② 세겜(에브라임) ③ 기럇아르바(헤브론, 유다) 요단강 동편에 지정된 세 도피성) ① 베셀(르우벤) ② 길르앗라못(갓) ③ 바산 골란(므낫세)입니다.
메튜헨리는 이 여섯 도피성들의 이름이 지니는 뜻을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즉 ‘거룩한 곳’을 뜻하는 ‘게데스’는 성전 되신 그리스도를(요 2:19)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어깨’를 뜻하는 세겜은 정사를 어깨에 멘 그리스도를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사 9:6). ‘교제’를 뜻하는 헤브론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고후 5:18,19). ‘성채’를 뜻하는 베셀은 성도들이 피할 성채 되시는 그리스도를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시 91: 2). ‘높은 곳’을 뜻하는 길르앗라못은 성도들로 하여금 높은 하늘에 앉게 하시는 그리스도를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엡 2:6). ‘기쁨’을 뜻하는 골란은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요 15:11). 이를 종합해 보면 도피성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거룩한 백성되게 하십니다. 어깨에 우리의 죄짐을 대신 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생에 친구가 되어 우리와 교제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우리를 지극히 높여 주십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다 주십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도피성으로 향하는 길에는 군데군데 도피성이라고 쓰인 큰 팻말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또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닦아놓았는데 14m 정도가 되는 아주 넓은 길을 닦아놓았습니다. 요단을 기준하여 동서에 각각 3개 처로 설치된 도피성은 각 성읍 사이가 정삼각형을 이룰 만큼 서로 동일한 거리에 위치하면서 모든 생필품을 온전히 갖춰 놓았습니다. 모든 성읍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하룻길만 걸으면 도피성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9절을 보면 이 도피성은 외국인들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왜 이방인에게까지도 열어주는 겁니까? 인종과 신분 지위를 막논하고 누구에게 동일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요 14:6 행 4:12)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가치가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교회도 누구든지 어느 곳에서나 달려올 수 있는 영적 도피성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모든 죄인들이 피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하고 영원한 도피성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은 부지중에 죄를 지은 사람뿐만 아니라 흉악한 강도도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완전한 도피성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습니다(고전 1:30). 그리스도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우거하는 자나 모든 사람들이 피할 수 있는 도피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즉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가면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가려줍니다. 보혈로 우리의 죄를 덮어주십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지 않게 하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를 멀리 옮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현대인들에게 도피성의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참 도피성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도피성은 레위에게 주어진 사역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사역입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항상 열려 있습니다. 누구나 받아드려야 합니다. 도피성이라는 말은 서론에서 말씀드렸지만 ‘받아들이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이 와서 쉼을 얻는 곳이어야 합니다. 특히 목장은 이러한 사람들이 와서 구체적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연약함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은 영혼들이 와서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이 와서 교제하고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사랑방이 되어야 합니다. 목장의 문턱이 높아서 안 됩니다. 믿는 사람들만이 교제하는 교제의 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불신 이웃이 언제 어디에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개방적이어야 합니다. 그곳에 진정한 자유와 평안과 기쁨이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회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깃든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이사야 55장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4.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사 55:1-5)
군사독재시절에 명동성당이 많은 정치범들이나 시국 사범들의 도피성이 되었습니다. 이분들이 처음에는 성당에 가지 않고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교회 목사들이 거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명동 성당을 찾아갔는데 김수환 추기경이 목숨을 걸고 그들을 보하하여 주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카돌릭이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큰 파업이라든지 어떤 쟁이가 일어나면 그 지도부들은 대부분 명동성당에 숨어 들어와서 그 파업을 주도하는 그런 일들이 자주 있습니다. 무자비하기 짝이 없었던 군사 정권아래에서도 이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을 하지 못했습니다. 도피성의 본래 목적은 부지중에 살해한자 그러니까 실수로 말미암아서 다른 사람을 죽게 한 사람이 복수를 당하지 않도록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은 그런 하나님의 제도였습니다. 실수한자가 도피성까지 빨리 쫓아가서 도피성 입구에서 장로들에게 자기의 과실 사실을 이야기하면 이 도피성의 장로들은 빨리 문을 열어서 그를 들이고 복수자의 손이 그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그런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연약한 우리 인간에게는 도피성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었고, 참 자유와 평강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부지 중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은혜를 덧입혀 주신 주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움직이는 도피성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이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도피성
여호수아 20장 1-9절 / 배성현 목사 서머나교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을 정복하고 지파별로 모두 기업 분배를 마쳤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할 일은 모두 마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십니다. 도피성을 정하라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오늘날로 말하면 피난처, 긴급보호센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를 통해 도피성을 정하라고 일러두셨고(출 21:12-14; 민 35:6-34; 신 19:1-3), 이제 때가 되어 약속의 땅에서 도피성을 정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 (수 20:1-2) 오늘은 도피성에 대한 내용을 먼저 살펴보고 나중에 교훈을 통해 적용을 하겠습니다.
1. 도피성의 목적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수 20:3) “이는 곧 이스라엘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자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수 20:9)
3절과 9절에 피의 보복자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고엘’입니다. 룻기에서 보아스를 통해 볼 수 있듯이, 고엘은 형제나 친척의 재산을 지켜주고 자손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고엘의 책임이 또 있습니다. 형제나 친척 중에서 누군가가 죽임을 당하면, 그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살인자를 찾아내어 보복하는 것, 즉 대신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 살인자를 하나님의 제단에라도 끌어내어 죽이라고 하셨습니다(출 21:12-14). 그러나 고의성이 없이 살인했을 경우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부지중에 실수로 살인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죽일 의도가 없었는데 살인을 하게 된 경우입니다. 민수기 35장 22-25절에서 말하듯이 악의 없이 밀치거나, 무엇을 던지거나, 돌을 던지거나 해서 사람이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명기 19장 4-5절에서는 벌목하다가 도끼가 빠져 사람이 죽은 경우를 그 예로 듭니다. 그때, 피의 보복자가 대신 그 사람을 쫓아와서 죽일 수 있기 때문에 도피성으로 가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수 20:4)
당시 성읍 문 어귀는 상업 활동과 재판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여기서 도망자의 말을 들어보고 충분히 참작이 되면 일단 성안으로 들여보내 거주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복수하는 사람이 따라왔을 때 실수로 살인한 자를 성 밖으로 절대로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 (수 20:5)
마지막으로, 실수로 살인한 사람을 재판하게 됩니다. 고의성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수 20:6)
재판을 해서 고의성이 있다면 도피성에서 쫓겨나 피의 보복자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고의성이 없는 살인이라고 판결이 나면 그 사람은 도피성에서 계속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도피한 자는 그 해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 있다가 그가 죽은 후에 비로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살 수 있게 되고, 피의 보복자는 그 사람을 죽일 의무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2. 도피성 제도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도피성은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는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살인하지 말지니라”(신 5:7)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9장 6절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 백성들이 의도적으로 살인하면 반드시 죽게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의성 없이 살인하게 된 경우에 피의 보복이 생기지 않도록, 그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도피성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보다 더 중요한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저는 오늘 이것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도피성은 분명 피난처, 긴급보호센터의 역할을 했습니다. 죄인들의 참된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도피성보다 훨씬 뛰어난 피난처인 예수를 봅니다.
1. 예수님은 죄인의 유일한 피난처가 됩니다
고의성이 있든 고의성이 없든 살인자는 피의 보복자(고엘)을 만나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살인의 대가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에 의하면 죽음입니다. 그러나 고의성이 없이 사람을 죽인 자는 도피성으로 도망가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려는 피의 보복자도 더 이상 그를 죽일 의무가 없어집니다. 도피성을 통해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을 봅니다. 당시 도피성은 고의성이 없는 살인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질적으로 모두 유죄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자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유일한 피난처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께로 가면 살 수 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십시오. 지금도 우리는 어떤 죄라도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로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2. 예수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이에 그들이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 여리고 동쪽 요단 저쪽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 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구별하였으니” (수 20:7-8)
하나님은 요단 건너 서편과 동편에 총 6개의 도피성을 지정하셨습니다. 도피성은 전역에 있어 어디든지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하는 자가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피할 수 있도록 길을 닦으라고 하셨습니다(신 19:3). 당시 그들은 얼마나 가슴 졸이면서 도피성을 향해 뛰어갔을까요? 그러나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가 주님께로 가는 길은 멀지 않습니다. 우리의 피난처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주께로 갈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은 모두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수 20:9) 도피성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 있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 10:18-19)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 2:13-14)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 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4.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가면 피를 보복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피 흘린 죄가 없나니”(민 35:26)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절대로 도피성 밖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만일 밖으로 나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피성도 안전하지만, 우리는 이보다 더욱 뛰어난 그리스도의 품을 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 6:37)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결코 우리는 그 피난처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가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5.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니라” (수 20:6)
도피성의 대제사장이 죽어야 비로소 살인자는 자기 고향으로 자유롭게 돌아가 살 수 있었습니다. 고의성 없이 살인한 것 역시 살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가 온전히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이 죽어야 했습니다. 1년이든 5년이든 죄책감을 가지고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도피성 안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죄의 심판을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아멘.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히 2:17)
예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지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담당하시고, 우리에게는 영생을 주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우리는 참된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님께 갈 수 있습니다. 모든 죄책감을 씻음 받고 자유함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인생의 피난처를 찾고 있습니까? 피난처 되시는 예수께로 가십시오. 모든 죄와 아픔과 좌절과 고통과 염려를 예수께로 가지고 가십시오. 그분이 흘리신 피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자유함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도피성과 예수
여호수아 20:1-9 / 손상률 목사
태양계의 행성이 태양의 인력(引力)에 의하여 궤도를 운행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의 삶을 영위하는 자들입니다.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그의 구속사적인 경륜을 만들어 나가십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 또는 모든 교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에게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여기 가나안 입국의 선봉장 여호수아가 그곳의 토지를 분배하면서 「도피성」이라 불리우는 특별한 성읍을 만든 것도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구속의 원리를 계시해 주는 것입니다.
일찌기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영도자 여호수아에게 도피성의 제도를 천명한 바 있습니다. 민수기 35:11-12에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서 모세가 이미 요단강 동편 베셀과 길르앗 라못과 바산골란 등 세 성읍을 구별해 두었습니다(신 4:43). 이후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서 납달리 산지의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헤洹隙?구별하여 모두 여섯 성읍이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 9절에는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을 위하여 선정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 살인한 자로 그리로 도망하여 피의 보수자의 손에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그는 회중 앞에 설 때까지 거기 있을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Ⅰ. 하나님께서 택정하여 주신 곳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와 실수 때문에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살기 위하여 도망가는 사람을 위해서 도피성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데나 도망가서 숨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장소로 가야됩니다. 출애굽기 21:12-13에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사랑을 겸전하신 분입니다. “범죄한 그 영혼은 죽으리라”하시고(겔 18:3), 죄에 대한 형벌을 선고 하시면서도 한편으로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찌니라”고 하였습니다(겔 18:32). 죽여야 마땅한 사람이 죽음에서 피할 수 있는 곳이 도피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도입니다.
(1) 노아의 방주가 도피성입니다.
노아 시대에 인간의 죄악이 극에 달했고 급기야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곧 도피성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6:5-7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노아에게 명하여 그 가족을 구원할 수 있도록 방주를 예비하게 하였습니다(창 6:13-17). 이후 밤낮 사십일 동안 깊음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창이 열리는 등 입체적인 대 홍수가 났을 때 코로 호흡하는 모든 생명체는 다 죽었으나 노아의 가족을 비롯하여 그들과 함께 방주에 들어간 짐승은 다 살았습니다(창 6:22-24).
(2) 세상에 있는 교회가 도피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마귀의 권세 아래서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불안해하는 인간들을 위하여 「교회」라고 하는 도피성을 정해 두었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집단입니다.
교회라는 말(?κκλησ?α)의 뜻은 「부름 받은 무리」를 의미합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죽음의 도성에서 마귀에게 속박 당하고 있는 인간을 해방시키고 불러내어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공동체를 이루게 하였습니다(롬 8:1-2).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상 마귀의 세력과는 원수가 되어 있으며 마귀는 죽음을 무기로 하여 쉴새없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마 16:18). 히브리서 12:22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온성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계시록 14:1에는 시온산에 십사 만 사천인이 섰는데 이들은 세상 가운데서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하였습니다.
(3) 도피성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시편 18:2-3에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 여호수아가 구별하여 만들어 놓은 도피성이나, 세상에서 거룩한 도성으로 이름지어진 교회도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 아래 신음하는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의 도피성입니다. 로마서 3:23-24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자기의 생명을 던져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는 마귀의 세력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완전하게 보호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롬 8:35-39).
Ⅱ. 도피성의 특징
본문 3절에 “이는 너희 중 피의 보수자를 피할 곳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도피성의 제도는 살인자가 복수하려고 쫓아오는 사람으로부터 피하여 은신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든 것입니다. 물론 이 살인자는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부지중 오살(誤殺)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살기 위하여 도망 오는 사람에게 도피성은 그가 쉽게 찾아오고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1) 이용하기가 쉬워야 됩니다.
신명기 19:3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시는 땅의 전체를 삼구로 분하여 그 도로를 닦고 무릇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케 하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19:9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림이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35:14에 “세 성읍은 요단 이편에서 주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서 주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도피성을 여러 곳으로 분산하게 하신 것은 어디서나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떤 사람이 찾아와도 쉽게 갈 수 있게 항상 도로를 닦아 두라고 하였습니다. 도피성이 인가에서 너무 먼 곳에 있다거나 또는 가는 길에 장애물들이 있어서 접근하기 곤란하면 숨가쁘게 달려오는 사람에게 위험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세심하게 배려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쫓기는 사람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시며 안전한 도피성으로 길을 안내하십니다(마 11:28). 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마 9:12-13)
(2) 함부로 밖에 나갈 수 없습니다.
민수기 35:26-27에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갔다 하자 피를 보수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찌라도 위하여 피 흘린 죄가 없나니”고 하였습니다. 이는 도피성과 죄인의 생명이 밀접하게 연관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위에 물이 범람해 있는 동안 육지에 있거나 코로 호흡하는 생명체는 다 죽었지만 오직 방주 안에 있는 자는 살았습니다(창 7:22-23). 만일 방주 안에 있는 자가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면 그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이상합니다.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는 살수 있는 길이 있다면 어디든지 가려하고 어떤 고생도 감수하게 되지만 일단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노아 시대 방주 안에서 지낸 1년 이상의 기간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도피성 안에 들어온 사람도 시간이 지날수록 바깥세상을 동경하고 나가고 싶은 몸부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생명의 보장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오기만 기다리는 보수자의 칼날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보호자와 함께 있어야 됩니다.
4-5절에 “그 성읍들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고를 고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받아 성읍에 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하게 하고 피의 보수자가 그 뒤를 따라온다 할찌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어주지 말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살인자가 다급하게 도망 와서 성문 앞에 이르면 그 성읍 장로는 즉시 성문을 열고 받아 들여 줍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오는 사람이 있어도 성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이는 쫓기는 자의 생명을 보호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또한 그곳에서는 그를 관리해주는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6절에 “살인자가 회중의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나 당시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가 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그 성읍의 자기 집으로 돌아갈찌니라”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책임지고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자입니다(출 28:4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와 죽음을 맡아 주신 영원한 대제사장입니다(히 7:26-27).
Ⅲ. 도피성 안에서 사는 자는
구원의 상징이 되는 도피성은 제각기 특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도피성이라고 하는 제한된 공간에서 불편하고 답답한 생활을 할 것 같이 여겨지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남이 알지 못하는 신령한 은혜가 있음을 알게 합니다.
(1) 갈릴리의 게데스
이는 하나님의 저녀된 사람의 신분과 걸맞는 이름입니다. 「게데스」는 히브리 말 「카도쉬」에서 따온 말로써 그 뜻은 「거룩」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였습니다(레 11:45). 성도는 세상과 구별된 자요 동시에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성결된 삶을 사는 자입니다. 본래는 죄인 되었던 자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받고 거룩해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엡 1:7).
(2)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
「세겜」이란 말은 「어깨」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몸에서 어깨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짐을 지고 물건을 들어올리는 등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9:6에는 예수님의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오는 목자로 비유하셨습니다(눅 15:5).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모든 죄와 죽음의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서 다 맡아 주시고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하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3) 유다 산지의 헤브론
헤브론은 「하바르」라는 말인데 이는 연결(joint)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이루게 됩니다. 에베소서 2:14-16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4) 르우벤 지파 중에 있는 베셀
이는 요단강 동편에 있는 성읍들로써 일찌기 모세의 생전에 그 땅을 점령하고 먼저 지정해 주었던 곳입니다(신 4:41-43). 「베셀」이라는 말은 요새지(要塞地)를 뜻합니다. 적군의 내습을 막기 위해 성을 쌓고 진지를 구축하고 견고한 요새를 만들어 그 안에 있는 백성은 안전하게 보호하는 장치를 뜻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가리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라고 하였습니다(시 18:2). 악마가 들끓고 죽음의 세력이 기습적으로 덮쳐 올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 안전이 보장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렘 1:18-19).
(5) 갓 지파 가운데 길르앗 라못
「라못」은 들어올리고 높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수평선 끝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듯이 밝고 빛나게 드러나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은 세상 가운데서도 쓸모 없는 자요 죄와 죽음에 얽매여 종노릇하는 비천한 신분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신분으로 들어올려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21:3에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6) 므낫세 지파 중에 있는 바산골란
「골란」은 기쁨 또는 희열을 뜻합니다. 마치 사람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여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추는 것 같은 기쁨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 완전한 생명의 보장을 받은 사람이 그 순간 밀려드는 구원의 감격과 희열을 입으로 행동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감격해 하는 모습이 다른 사람 눈에도 확연하게 나타납니다(엡 5:19). 전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 만의 축복이며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니는 풍성입니다(엡 1;23).
이와 같은 희열과 감격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 같은 것으로는 도저히 체험할 수 없는 비밀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누리게 되는 신비로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원리
수 20:1-9 / Woorim Lee
사랑합니다. 몇 주 전부터 저희 학생부의 고등학생 친구들의 잠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시험'을 치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시 수학문제를 풀어본 기억이 나시나요? 사실 저 또한 수학을 좋아하지는 않았는데요, 수학문제를 풀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개념과 원리입니다. 개념과 원리를 이해한다면 그것을 응용하여서 문제들을 풀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 개념과 원리는 수학 문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을 둘러보면 무언가에 쫓기듯이 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무엇이 당신을 쫓고 있으며 왜 그렇게 쫓기듯이 살아가냐고 물어보면 이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디서부터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답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보실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 인생에 원리를 한 번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로 말미암아서 혹시 여러분의 삶 또한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가고 계시다면, 말씀을 통해 해답을 얻고 자유함을 얻는 이 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말씀 살펴보겠습니다.
서론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복한 가나안에서 각 지파별로 땅을 나누어 주십니다. 혹시 어떤 방법으로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에게 분배되었는지 아시는 분 계신가요?
하나님께서는 땅을 분배해 주실 때에 여호수아와 대제사장이었던 엘르아살 그리고 이스라엘의 각 지파의 족장들을 모아서 제비를 뽑으십니다. 사실 이 방식은 굉장히 충격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가장 많은 땅이 허락되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지휘했던 여호수아도 딤낫 세라라는 한 성읍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제사장 그리고 온 백성들의 대표인 족장들이 보는 앞에서 제비를 뽑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공평하게 가나안 땅을 분배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시고 또 공정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은 계급의 높낮이나 신분의 귀천으로 땅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 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들과 원리를 알고 나니 여러분, 벌써부터 마음이 따듯해지지 않으신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회적 신분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으로 우리를 차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은혜를, 또 천국이라는 땅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땅을 받고난 뒤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도피성'이라는 개념이 나오게 됩니다.
도피성이란 무엇인가?
도피성이란 무슨 말일까요? 얼핏 들었을 때 무슨 성을 의미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그리고 도피라는 단어를 들어보니 도망할 수 있는 성 정도로 해석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도피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부지간에 사람을 실수로 죽인 자들이 피의 복수자들로부터 피할 수 있는 곳이라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어려운 단어 두 가지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도피성 그리고 두 번째는 피의 복수자들입니다.
도피성은 히브리어로 ‘아레 함미크라트’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도시라는 이르와 피난처, 안식처를 의미하는 미크라트라는 단어가 합하여 생긴 단어입니다. 도피성은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위한 피난처입니다. 어떻게 하면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요? 성경은 신명기 19:4-5 에서 그 예를 들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형법의 원리는 기본적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1:1 등가교환의 원리입니다. 때문에 한 지파에 누군가가 살해당하면 그 살해당한 가족들 중 가장 가까운 남자가 살인자를 처단하여 그 복수를 실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민수기 35:33 을 통하여서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량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