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정의의 순교자, 성 유스티노와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
유다 17,20-25; 마르 11,27-33 /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2024.6.1.(토)
6월, 예수 성심 성월이 시작되었습니다. 5월 한 달 동안 성모 성월을 지내면서 성모 마리아의 믿음과 삶을 본받고자 기도하며 노력한 우리가 이제는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거룩함을 본받기로 다짐하며 노력하는 달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신 마음을 뜻하는 ‘예수 성심’은 그분 가르침과 행적의 원천이었습니다. 또한 예수 성심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게 드러낸 것이기 때문에 모든 개별 인생과 인류 역사의 기준입니다. 이 기준을 좌표 상의 원점으로 삼아서, 인생과 역사가 자기 좌표를 찾아갑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을 본받는 길은 세속에서 도피하는 데 있지 않고 세속 안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빛으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어 우리에게 주신 모든 피조물 안에 하느님의 흔적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자렛 생활을 통해서나 공생활을 통해서 가정이든 백성과의 만남이든, 질병에 걸린 사람이든 마귀에 걸린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하느님의 빛을 부어 주셨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세속적이었던 곳은 당시 유다인들이 가장 거룩하게 여기던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들으셨다시피 그 성전을 정화시키셨습니다. 그 모습이 상인들을 쫓아내고 환전상들의 탁자를 둘러엎으시는 등 과격한 양상으로 진행되었을지언정 그 내용은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하는 일만큼이나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유스티노 성인은 시대상으로 초대교회와 고대교회를 이어주는 기원후 2세기 초엽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팔레스티나 사마리아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그리스식 사고방식에 젖은 이교 가정에서 자라났으므로 유다이즘과 헬레니즘의 영향을 다 받고 자라다가, 어느 날 신자 노인을 만나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노인에게서 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자신이 배워온 그리스 철학과 헬레니즘 사상을 진지하게 검토한 결과 큰 깨달음을 얻고는 더 큰 신앙 공동체가 세워져 있던 에페소로 가서 정식으로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리코에서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고 보게 된 바르톨로매오처럼 그도 진리를 보는 눈을 떴던 것입니다.
이후 그는 더욱 학구적인 자세로 정진하여 유다인 학자와도 토론에 나서고(트리폰과의 대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로마황제에게 항의하는 호교론을 펴기도 하다가 끝내 순교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이전에 살았던 구약시대의 어느 인물들보다 더 명확하게 그리스도라는 원점을 알 수 있었던 유스티노는 헬레니즘은 물론 유다이즘에 휘둘리던 당대 사람들에게 정확한 사상적 좌표를 일러주고 원점으로 갈 수 있는 경로까지 일러줌으로써 1세대 호교교부(護敎敎父)로 불리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자신도 눈을 떴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인들에게도 진리에 눈을 뜨게 해 주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유스티노 성인처럼 한국 초대교회 시절에 우리 민족이 나아갈 좌표를 용감하게 제시한 선각자가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입니다. 그는 단지 천주교를 신봉한 ‘사학죄인’(邪學罪人) 정도가 아니라 서양 선박을 불러 들여 조선 조정으로 하여금 천주교 박해를 중단시키려던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처형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껏 논란의 대상이 되어 한국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약현의 딸 정난주 마리아와 혼인한 후 처삼촌이 된 정약종에게서 교리를 배운 그는 학문이 출중하다고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에 나아가기보다는 천주교에 입교하고 나서는 명도회(明道會)의 일원으로서 지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신심 서적을 필사하여 나누어 주는 등 한국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국교회의 선각자들이 부당하게 노론 일파에 의해 정치적 숙청을 당하면서 비인도적인 고문과 처형을 당하는 현실을 목격하고는,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글을 비단천에 써서 도움을 청했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죄인으로 몰려서 머리와 사지를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陵遲處斬) 형을 당하였습니다.
지금도 한국 역사학계의 주류에서는 천주교 박해를 자행한 조선 왕조와 노론 일파의 주장과 똑같은 논리로 황사영을 국가반역자로 여기고 있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심도 깊게 학술적 검증을 진행한 끝에, 2013년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선정한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어 시복절차가 궤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교황청 시성성은 2013년 황사영을 포함한 133위 순교자에 대한 예비심사 관할권을 마산교구에 부여함으로써, 황사영 알렉시오에게도 시복 후보자에게 부여되는 “하느님의 종(Servus Dei)”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된 것인데, 신학과 종교, 교회법은 물론 민족 복음화의 전망에서 시복시성 대상자로 선정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시종일관 예수 성심이라는 기준을 따라야 할 한국교회가 처해 있는 좌표를 명확히 하고 또한 이 기준과 좌표에 따라 하느님을 믿어야 할 우리 민족이 나아갈 진로를 복음화라고 제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도 성 유스티노처럼, 굳셈의 은사를 충만히 받은 한국 초대교회의 호교교부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이 전하는 성전 정화 사건에 담긴 뜻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건은 제정일치 사회였던 당시 이스라엘에서 막강한 정치 권력과 종교 권위를 독점했던 사두가이파 대사제가 장악하던 성전의 질서에 도전한 행동이었으며, 성전세와 십일조 수입으로 부정한 부가 축적되어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던 복마전을 정화하고자 했던 저항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마르코보다 더 상세하게 기록한 요한 복음사가는 이 사건에 대한 백성의 반응을 이렇게 전해 주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요한 2,23)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 정화 사건으로 말미암아 성전 모독 혐의를 받아 십자가형에 처해지셨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예상되는 이런 결말을 모르지 않으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하고 외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그 당시에는 제자들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진정한 성전이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임을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요한 2,21-22 참조)
이러한 요한복음의 성전신학적 관점에 따르면, 세속 안에서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을 만나는 성전은 한 군데가 아닙니다. 미사성제를 봉헌함으로써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성전은 첫 번째 성전이요, 가족들과 일치를 이루는 가정생활이나 일을 통해 세상에 기여하는 직업생활 그리고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신앙 공동체와 사도직 활동 또한 두 번째 성전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그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속 안에서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각자가 세상 속으로 파견된 선교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 유스티노와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산더가 보여준 진리와 정의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이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짓는 ‘살아 있는 돌’(1베드 2,4)인 것입니다.
첫댓글 <성 유스티노와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산더가 보여준 진리와 정의의 길>
어제밤 성모의 밤을 은혜롭게 지내고 오늘은 공세리 성지 성체거동행사에 참가합니다.
베론에서도 절두산성지에서도 강하게 제 마음을 움직였던 황사영 알렉시오와 순교성인들을 기억하겠습니다.
순교자 믿음 본받아 끝까지 남는자 되게하소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