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카시즘(McCarthyism)은 1950년대 초반 미국 전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으로, 의혹을 제기한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 상원의원에서 비롯되었으나
실상은 전형적인 마녀사냥이었다.
간혹 자신의 혐의를 부정했던 실제 간첩 엘저 히스도 목록에 들어 있었으므로 마녀 사냥이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밑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몇 명이 실제 간첩이었다고 해도 결국 간첩이 아니었던 사람이 월등히 많으며, 오히려 저 정도 대규모로 조지는 와중에 어쩌다 하나 걸린 거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
현재에 와서는 지식인들을 대거 숙청하고 문화계를 박살 낸 미국판 문화대혁명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미국 주류 학계나 미디어에서 매카시즘은
"매카시 개인 정치 야망에 의한 광적인 선동"
정도로 부정적으로 평가되며, 대부분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다. 또 근거 없는 무분별한 주장이나 고발을 비판하는 용어로도 사용한다.
1941년,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각각 바르바로사 작전, 진주만 공습을 일으키면서 소련과 미국은 나란히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놓고 이념적으로 달랐던 둘이었지만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라는 더 큰 적들을 앞두고 둘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미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고 소련과 함께 독일을 물리치면서 미국의 사회주의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1차 대전 때는 반전 여론을 주도했던 이들이었지만 2차 대전에는 더 큰 적인 파시즘이 있고 소련과 미국이 동맹국으로 전쟁을 했기에 미국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한편으로는 독일과 싸우는 소련을 옹호하고 그들의 용맹성을 칭송하는 프로파간다 포스터와 기사를 쓰거나, 할리우드에서 소련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고 승전국이면서 본토에 아무런 피해가 없는 미국은 명실상부 최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전시에 가동되었던 경제 체제를 평시로 돌리는 것이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군수품은 전쟁이나 그에 대비할 때는 가장 중요한 물건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하등 쓸모가 없는 물건인지라 전쟁이 끝나면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군수공장들은 사라지거나 품목을 전환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근로자들이 해고를 당하게 된다.
그리고 남은 근로자나 타 분야의 근로자들도 처우 개선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이 발생했다.
1945년 1만여명의 영화 제작진들이 파업을 한 것을 시작으로, 1945년 말부터 1946년 말까지 도합 430만~460만명의 근로자들이 파업하는 사상 최대규모의 파업 파동이 벌어진다. 1945~1946년 파업 파동. 이 파업은 이념에 상관없이 전쟁이 끝나면 으레 겪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국의 사회주의의 성장과 자본주의의 위기감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 무렵 해외에서도 공산주의의 위협이 대두되고 있었다. 1946년 3월에는 소련이 동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처칠이 철의 장막으로 빗대서 말하고, 국공내전이 발발하며, 한국 등 세계 곳곳에서 분할과 이념 갈등이 있었다. 이에 트루먼 행정부는 경제적으로는 페어 딜 정책을 펴는 한편, 양대 강국으로 떠오른 소련과 공산주의의 급부상은 전시가 평시로 해제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실제로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 공격은 미국 측에도 공포를 안겼고,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대리전을 치르면서 핵전쟁에 대한 위협은 현실적인 공포로 인식되던 시기였다.
2 차 대전의 연장선 상에 있던 625 전쟁은 전승국 소련과 미국의 대리전이기도 했지만,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고, 베트남 전쟁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 북이 갈라진 것은, 우리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강국들의 정치적 장난에 불과했다.
이념이라는 것은, 대단한 정치적 사상과 인민들의 행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정치적인 쇼에 불과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남과 북은 주변국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대일로 만나 종전선언을 하고 중립국을 선포해야 한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는 유럽 대전의 와중에 가장 현명한 판단을 하였다.
중립국을 꿈 꾸었던 여운형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