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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8: 32 진리 - 요 8: 33 남의 종이 된 적
요 8: 32 진리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예수께서는 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의 말씀과 그에 관한 말씀이다.
* 요 14: 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 진리를 알지니
"진리"란 말 (*)은 "그 진리"란 뜻이니, 그 유일하신 진리를 가리킨다. (요 14: 6)
이것은, 철학적인 추상적 진리, 곧, 개념적인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을 둘러싸고 계시(啓示)된 그의 말씀인 동시에 예수님 자신으로 구체화 된 계시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36절에서 밝혀 준 것과 같이, 하나님 아들(예수님 자신)이 그 속죄의 죽으심에 의하여 신자들을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 있어서 왜 예수님 자신을 "진리"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된다. 예수님을 찾아 만난 결과가 진리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와 예수님을 동일체라고도 할 만하다(14: 6).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진리이며, 그의 보내신 성령의 하시는 모든 기적적인 역사도 진리이다. 참된 기적은 진리를 지니고 있다. 진리 없는 기적이나 역사(役事)는 성령의 것이 아니다.
즉 구원의 복음이 진리의 말씀이다.
* 엡 1: 13 -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복음의 요지는, 사람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지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주셨으므로 그를 믿음으로 죄 씻음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모든 죄인들에게 구원과 천국과 영생 소망을 주는 진리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가장 큰 복은 죄로부터의 자유이다. 죄로부터의 자유란 죄책(罪責) 즉 죄의 법적 책임으로부터의 자유, 죄인이라는 신분으로부터의 자유, 죄의 형벌 즉 영원한 지옥 형벌과 그 공포로부터의 자유이다.
죄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복음이다. 그것은 ‘의롭다 하심’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바울은 로마서 3: 20-24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10: 4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신 의가 완전하기에 하나님의 율법이라도 신자를 정죄치 못하며 이런 의미에서 성도는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표현된다.
* 롬 7: 6 -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 갈 5: 1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물론 성도가 죄의 세력 곧 죄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한 것은 아니다. 땅 위에서의 성화는 불완전하다. 완전 성화는 부활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의(義)는 무효화되지 않을 것이다. 의와 죄의 싸움은 있으나 최종적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물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의를 행하고 거룩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다시는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2]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 31-32)
우리에게 왜 자유가 필요한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자유란 사람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아담으로부터 죄의 속박을 받아 죄의 종이 되었다. 이 종의 멍에에서 해방되어 죄의 멍에를 벗는 일이야말로 우리 인생들의 가장 시급한 문제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자유이다.
(1)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자유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다. 아담의 범죄로 이 자유를 상실하며 죄의 종으로 팔려 그 결과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 롬 5: 17 -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인간의 참 자유를 소유한 사람들이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 자유를 빼앗을 수 없으며 우리는 이 자유를 누구에게도 빼앗겨서도 안 된다.
* 갈 5: 1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수님은 우리로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신을 우리의 죗값으로 지불되는 속죄 제물이 되셨다.
(2)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다. 사람이 간섭을 받지 않고 살아간다고 해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어떤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만약 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가장 비참한 종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인생들에게 이와 같은 자유를 얻게 하는 방법은 진리라고 하셨다. 진리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죄의 멍에를 끊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게 하신다.
①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 자유를 누린다.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 시 25: 10 -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 요 14: 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진리로 자유를 얻으려면 먼저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소유해야 한다.
②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자유를 누린다.
무엇이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이 아무리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유익이 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할 때 그 말씀이 그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도 줄 수 없다.
③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이 자유를 누린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이라고 하셨다. 주님이 하신 내 말이란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붙들린 상태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리려면 그리스도의 말씀에 붙들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다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 내 말에 거하면 이라고 하신 거한다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메노’란 단어로 이 말의 뜻은 남아 있다, 머문다, 거주한다를 의미한다.
이 사람은 그가 어떤 환경 속에 있다고 해도 말씀을 떠나지 않고 그의 말씀 안에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3) 자유를 향유(享有)하는 그리스도인
많은 그리스도인 중에는 진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면서도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아직도 죄의 멍에를 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 멍에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생활을 못하며, 죄를 이기는 생활을 못하고 있다.
① 자유는 자유를 누리려고 하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마귀는 우리의 이 자유를 빼앗으려고 눈독을 드리고 있다. 기회만 있으면 공격을 가해 온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 벧전 5: 8-9 –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인간은 죄의 종이 되거나 아니면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어느 편이든 한 가지가 되어야 한다.
* 롬 6: 16 -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순종의 생활이야말로 죄에서 자유를 얻는 비결이다.
②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책임이 없는 자유는 방종이다. 자유에 대한 책임이란 죄를 멀리하는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고 하면서 그 자유가 죄로 나타난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자유를 모독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유에 대한 책임이란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려는 모든 비 진리에 대하여 과감하게 투쟁하는 일이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 벧후 3: 18 -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깨닫고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진리가 되시는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지식 가운데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기를 바란다.
요 8: 33 남의 종이 된 적 -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악 된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로마 제국의 지배 속에 있다는 사실은 자신들의 죄성을 증거하고 있었다.
중생치 못한 자들은 영적인 문제를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몸의 질병이나 물질적 손실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죄 문제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도 깨달음도 없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교인이 실제로 죄악 된 일을 버리지 않고 살고 있다면 그들은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의 구원 확신은 헛된 망상에 불과할 것이다.
1]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여기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란 말은, 어떻게 해석될 말씀인가? 이것이 영적 의미일 것인가, 육적인 의미일 것인가?
고데이(F. Godet)는 이것을 육적 의미로 생각하고 유대인의 국민 자유를 가리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학설은 부당하다. 유대 나라는 그 당시에도 로마의 속방(屬邦)으로서 이미 종이 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 전에도 그들의 조상들이 여러 번 외국의 침략을 당하여 종으로 끌려간 일이 있었다(Grosheide). 그러므로 이 문구는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것으로 택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그 계약 대상의 머리로 정하셨으니 만큼,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다.
2]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런 전통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말하기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한 것이다.
곧, 언제나 그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겨 왔고, 어떤 다른 나라의 신(神)을 섬긴 적이 없다고 한다(우상을 섬긴 일이 있었던 이스라엘의 오점(汚點)을 그들은 잊어버렸다.
유대인들이 외식으로 행한 것은 틀렸지만 계약 신관만은 가지노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체계 없이 변동하시는 이가 아니시고, 옛 사람에게 약속하신 대로 일하시며, 이루어 가시며, 그의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도 않으신다.
성도는 이런 역사적 신관을 가지고, 또 저런 든든한 구원사관(救援史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계약 사상에 기준하여 교회를 생각해야 한다. 교회는, 계약 사상을 배경하고 이 세상 기관으로서의 한 방면을 가짐에 있어서 낙관한다.
교회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 있어서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고, 그 기관 성격 때문에 세상과 접촉을 가진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하고 있는 것인 만큼, 그 자체가 포함하고 있는 회원들에게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결성이 불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과 접촉하여 세상을 이긴다. 이렇게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계약을 배경하고 성립된다.
그러나 땅 위에는 계약 성격을 무시하고 취미 본위로 사람끼리의 연락만을 치중하여 나타나는 단체들이 있다. 그것은 교회라기보다는 종파(sect)라고 함이 적합하다.
이런 종파들이 있어서는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게 되는 경향이 많고, 객관적인 계약(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필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H. Dooyeweed, A New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 III, p. 529).
그러면 유대인들이 진심으로 깨닫고 계약 신관(契約神觀)을 주장하였더라면 진리에 합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주장하면서 기계적이고 모방적인 점이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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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모습은 눈에 남고, 멋진 말은 귀에 남지만
따뜻한 배려는 가슴에 남는다고 합니다.
오늘도 따뜻한 사랑 나누며 즐겁고 행복한 날 되십시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