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변화를 위한 균형과 조화
- 성체 신심과 성혈 영성의 복음적 회복을 위하여
탈출 24,3-8; 히브 9,11-15; 마르 14,12-26
성체성혈 대축일; 2024.6.2.
1.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성체성사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은 2003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반포한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 안에 ‘참되고, 실재적이며, 실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어 성체와 성혈로 거룩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표명했는데, 이는 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성체성사에 관한 계시적 언급,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거룩한 변화를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중세 유럽의 철학적 사유로 엄정하게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브루노는 화형당하고, 루터는 뛰쳐나가고…
하지만 성체성사의 질료인 빵과 포도주가 성령의 개입 없이도, 즉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전제하지 않고도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실체적 변화’에 대하여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차원에서 실체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식으로까지 과도하게 성체성사의 거룩함을 가르쳤던 당시 교회의 ‘무지한’ 관행에 반발하여 도미니코 수도회의 사제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는 자연과학의 이론을 인용하여 모든 물질에 하느님의 영이 작용하고 있으며, 성체성사 중에 빵과 포도주가 물질적이고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가 아니라 마법사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1600년 2월 17일, 도미니코회 수사 신부였던 조르다노 브루노가 공개 화형에 처해졌다
브루노의 이 같은 주장은 빵과 포도주의 실체적 변화를 과도하게 주장했던 당시 교회 교도권에 반박하기 위한 것이기는 했으나 성체성사의 신학적 본질에 비추어 보면 역시 초점이 빗나간 반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고, 교권 당국은 끔찍하게도 그를 화형시켜 버렸습니다. 이 사건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분위기의 일단을 잘 말해줍니다. 결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브루노를 화형시킨 사건에 대한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는 분위기 속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79년에 브루노에 대한 사형 선고가 부당하다는 재심 판결을 내렸고 2000년에는 브루노 처형 400주년을 맞아 폭력적인 사형 선고와 집행에 대하여 사과하였습니다. 이 재심과 사과 발표 조치에서 입증되었듯이, 브루노에 대한 종교 재판과 화형은 성체성사의 충분조건인 성령의 개입과 그리스도의 현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데서 생겨난 역사적 해프닝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베드로 대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던 교황청 관료들의 부패와 과도한 모금 행위에 항의하는 95개조 반박문을 1517년에 독일 비텐부르크 성당 문에 내걸었습니다. 이 항의에 대해 레오 10세 교황은 파문으로 응수했고 결국 이 파문장을 찢어버린 루터는 성체성사를 비롯한 성사의 효력 모두를 폐기한 채로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가톨릭교회를 뛰쳐나갔습니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제직무는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제정된 것인데, 과도한 모금 행위와 이로 말미암은 부패상은 파스카의 역사적 정신에 대한 기억과 함께 상호 섬김의 실천으로 뒷받침되어야 할 성체성사의 거룩한 변화를 인효적(人效的)으로 – 사효적(事效的)으로가 아니라 -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루터의 항의는 정당하였고 교황청에서는 이를 종교적 관용으로 수용하고 부패상과 과도한 모금 행위를 중단했어야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파문으로 응수하고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서방 교회는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브루노의 사례와는 달리 성체성사의 필요조건인 사제직의 섬김 윤리가 관철되지 못하는 바람에 생겨난 역사상의 해프닝이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로마 교황청을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써서 비텐부르크 성당 문에 붙였다
3. 과도하거나 냉담하거나…
성체와 성혈의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일어난 거룩한 변화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자 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삶과 세상에서 이룩하기 위하여 거행하는 성사적 변화를 겨냥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으로 계시하시면서, 당신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신 데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모두 성체와 성혈의 성사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해 줄 거룩한 변화에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가 승인하고 장려하는 성체신심은, 병자들에게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성체를 모셔가는 봉성체 예식, 그리고도 남은 성체를 감실에 보관하면서 미사 중에 이루어진 거룩한 변화를 흠숭하는 합당한 경배예식 등을 행하는 관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성체 조배, 성시간, 성체 강복, 성체 행렬로 발전하다가 성체가 모셔진 감실 앞에서 철야로 조배하는 관습도 생겨났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지속되던 3년 동안에는, 대면 접촉으로 인한 감염 가능성을 차단하고 예방하기 위하여 방송으로 미사를 시청하고 마음으로만 성체를 모시는 신영성체(神領聖體)가 미사 참례를 대체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렇게 삶과 세상에서 거룩한 변화를 이룩하려는 지향은 뚜렷하지 않은 채로, 성사적 변화를 흠숭하는 일에만 머물고자 하는 경향은 실제적인 거룩한 변화에로 나아가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과도한 성체신심이거나 광신적 경향이라 부를 만합니다.
기성 종교인들이 자신의 거룩한 변화를 거부한 채로 자신의 현세적 축복만을 기원하거나, 또는 하느님의 뜻대로 현세를 개선하고자 사회적 공동선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이 없이 내세의 영복만을 기원하려는 기복신앙적 자세는 이 성체신심에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에 대량 냉담사태를 불러오는 주범입니다. 바람직하기로는 자신의 삶은 물론, 세상의 거룩한 변화를 이룩하려는 신자들의 자세인데, 이는 부패한 세상의 기득권과도 불가피하게 충돌과 긴장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도교회는 이런 적극적 태도를 지닌 신자들로 인해서 사회적 갈등과 긴장이 교회 신자들 안에로도 옮겨오는 것을 싫어하거나 기피하기 일쑤입니다. 이렇듯 과도하거나 냉담한 성체신심의 현실은 이미 예수님 당시에서부터 나타났습니다.
4. 열광하거나 의심하거나…
예수님께서 성체와 성혈의 성사에 담긴 거룩한 뜻을 처음에 열어 보이신 계기는 요한 복음서 6장에서는 생명의 빵, 7장에서는 생명의 물에 대해 가르치신 때였습니다. 특히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펴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평원에서 오천 명도 넘는 많은 군중 앞에서 이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하여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는데, 이때 군중은 많아진 빵에 열광하였습니다. 그러나 열광하는 군중을 떠나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좀 더 차분하게 이 기적에 담긴 뜻을 설명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 나온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썩어 없어질 빵을 구하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는 빵을 구하라.”(요한 6,27)라고 그분이 말씀하시자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군중이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자 그분이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 빵에 열광하던 군중은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대부분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 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결단을 재촉하셨습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요한 6,67) 그러자 선뜻 대답하지 못하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나서서 고백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지니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요한 6,68)
예수님께서는 5천 명이 넘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는 빵의 기적을 카파르나움 평원에서 일으키셨는데, 군중은 열광하다가 떠나가고 제자들은 의심하며 주저하다가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편승하여 엉거주춤 남았다
5. 놀라워하거나 죽이려 들거나…
우리는 ‘성체성사’라는 말이 나타내 주듯이 생명의 빵에 대해서만 주목하지만 사실은 생명의 물에 관한 가르침도 있습니다. 즉,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은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데, 이어지는 7장에서는 생명의 물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난 군중은 성경에 대해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놀라워하였습니다: “저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성경을 잘 알까?”(요한 7,15) 그런가 하면 성전 정화 사건으로 인해 적대시하게 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잡아서 죽이려고 들었습니다.(요한 7,32) 그렇게 상반된 반응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요한 7,39)
초막절 축제에 모인 군중에게 생명의 물에 대해 가르치시는 예수님
6. 성체 신심과 성혈 영성
생명의 빵이 성체라면 생명의 물은 성혈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 앞에서 제정하신 성찬례는 성체와 성혈의 성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제는 제대에서 성체와 성혈을 축성하지만, 신자들에게는 성체만 나누어 주는 관행이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본래는 성찬례 또는 성체와 성혈의 성사였던 이름이 성혈을 생략한 채 아예 ‘성체성사’로 좁혀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성혈의 신심과 영성은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두고 맺는 계약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려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들을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성찬기도문) 이 피로 맺은 계약이 새롭고 영원한 계약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실 이 피야말로 그분의 희생이 진정성 있는 희생이었음을 보증합니다. 우리 교회가 생명의 물인 성혈의 영성에 소홀해 오는 동안 진정성 있는 희생을 잊어버린 탓에 우리네 신앙생활이 싸구려가 되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7. 균형과 조화를 위하여
교우 여러분!
교회는 성체와 성혈의 성사를 세우신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 바오로 2세가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에서 가르치고자 했던 뜻입니다. 그러자면 성체의 신심과 성혈의 영성 사이에 균형을 회복해서 조화를 이루어야 우리가 전례를 통해 온전하게 성령의 기운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사생활과 사회적 실천 사이에도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즉, 성사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변화를 일상에서 이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실천으로 입증되지 않은 종교적 진리는 아무런 힘도 없고 매력도 발산하지 못합니다. 사실 성사의 사회적 실천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삼아 바치신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께 일상에서 바치는 찬양이요 제사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의 결론을 간추린 글을 소개하며 마칩니다.
회칙은 성체성사가 의미로만 구원의 사건 재현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을 기억(anamnesis)을 통해 현재로 불러오는 ‘오늘’(hodie)의 사건임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마치 그 자리에 함께했던 것처럼 당신의 희생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인 성체성사를 남겨 주신 다음에야 십자가 희생 제사를 바치시고 성부께 되돌아가셨다.(회칙 11항 참조) 부활로 정점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미사에서 성사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실체 변화라는 매우 특별한 현존과 관계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의심 없이 총체적으로 또 온전하게 하느님이며 인간으로서 현존하시게 되는 곧 본체적인 현존 방식”이다.(바오로 6세, 「신앙의 신비」 39항) 희생 제사의 구원의 힘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영성체에서 완전하게 실현되며 이는 신자들과 그리스도의 내밀한 결합을 지향한다. 물론 이는 강생의 신비 때 함께 했으며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한 성령의 내림으로 가능해진다. 영성체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교우들은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을 지니면서 가장 약하고 가장 힘없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희망을 거의 잃어버린 듯한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희망을 전하고 복음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1코린 11,26) 계속 이어가야 한다.(회칙 20항 참조) <윤종식. 의정부 교구 신부. 전례학. 가톨릭신문, 2014.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