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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수' 9번째 소설
My Last Fantasy
학원을 가기 위해서 항상 지나야 하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사람들이 복작복작 거리는 곳인데, 작은 옷가게와 음식점들이 즐비한
곳이다. 옷가게를 지날 때마다 문득문득 눈에 들어오는 옷들이 있다. 가끔은 하늘하늘한 흰색 원피스가 눈에 들어오기도 하며,
가끔은 허벅지 중간쯤까지 오는 예쁜 티도 눈에 들어온다. 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발은 자연스럽게 그곳을 지나 학원으로
향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던 그렇지 않던 그건 항상 그랬다.
빡빡해진 일상 속에서 이제는 혼자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당연해져 있었다. 이미 한 달 전, 내 심장은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허전하더니 그 다음에는 아프고, 그 다음에는 쓰렸더니 그 다음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좋다, 싫다'가 없
어진 것이다.
학원에 도착해서 매일 앉던 자리에 앉아, 들어오는 친구들에게 약간 버거운 미소로 인사를 하고 아이들과 얘기를 하는 것이 귀
찮아 책을 펴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집중을 하고 있을 즈음, 핸드폰 불빛이 반짝거렸다. 확인을 할까, 말까 망
설이다가 슬라이드를 열었다.
「생일 축하해 - 010.XXXX.XXXX」
등록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지만, 모르는 번호는 아니었다. 시간을 보니 딱 12시였다. 이 문자를 처음으로 아이들의 축하 문자
가 몇 통씩 왔다. 2008년 7월 7일 00시 00분. 하지만 문자로는 생일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답장을 하지 않고, 계속 번쩍이
는 핸드폰을 가방 속으로 밀어 넣은 뒤, 나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고 했지만 이미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다.
"미안해… 주연아. 한 번만 용서해줘. 나 다시는 안 그럴게."
그 아이는 울면서 용서를 구했다. 진심이 담겨 있는지 없는지 의심부터 갔지만, 눈물에 이미 약해져 있었다. 망설이기 시작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다. 또한, 생전 처음 당해보았던 배신이었기 때문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잘 몰랐었다. 얼굴의 근육이 잘 움직이지도 않았던 걸로 보아, 아마 정말 어색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응…."
오랜 우정이었고, 좋은 인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용서를 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 아이는 내
마음 속에서 멀어졌다. 신뢰의 원에서 이미 그 아이의 이름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그 아이는 두 번째 배신을 했다. 나는 그 때 화를 내지도 않았고, 무시를 하지도 않았으며, 평소와 똑같
이 행동했다. 웃었고 장난을 쳤다. 그러더니 그 아이는 세 번째 배신을 했다. 아니, 세 번째로 나를 가지고 놀았다. 내가 웃으니까
정말로 괜찮은 줄 알고 그런 것일거다.
그로써, 나는 그 아이를 영영 떠났다. 옆에 있었지만, 그것은 옆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아이가 두 번째 배신을 했을 무렵의 일이었다. 학교에서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밥을 잘못 먹어서인지, 머리와 배가
동시에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5교시가 끝나고 조퇴를 했다. 초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해서도 나는 쉴 수가 없었다.
"이주연, 이주연!"
"……아, 네!"
옆에 있던 아이가 툭 치고 나서야 선생님이 나를 부르는 소릴 들었다. 고3이 어디다 정신을 놓고 있냐면서 책을 읽으라는 말에
나는 얼른 책을 읽었다. 반쯤은 혼을 빼놓은채로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기다리자 학원은 끝났다. 2시가 조금 넘어선
시간이었다. 아이들과 힘없는 인사를 나누고 나는 도플갱어 마냥 집으로 향했다. 어떻게 집에 도착한지도 모르겠다. 자고 있던
남동생이 '누나, 생일 축하해'라고 말하는 것만 조금 기억이 났다.
그리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눕자마자 나는 갑자기 온몸이 진공청소기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 정말로 정확한 표현이었다.
* * * *
나비가 날아다니고, 푸른 들판이 저 끝까지 펼쳐져 있었고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와 치맛자락이 사르르 휘날렸다. 저 멀리
서 서리를 하다 주인에게 들킨 꼬맹이들이 정좌 밑으로 숨는 게 보였다. 그리고 갑자기 감자 냄새가 났다.
"으응…."
그리고 잠에서 깼다. 간만에 악몽이 아닌 기분 좋은 꿈을 꾼 것 같았다. 아 잠깐. 킁킁… 어라? 감자? 진짜 감자냄새다. 나는 꿈
속에서 맡았던 감자 냄새가 맡아지자 일어나서 부엌으로 내려가려고 몸을 뒤척이다 눈을 떴다. 그런데… 보여야 포스터 속의
깜찍한 다니엘 A의 얼굴 대신 3개의 얼굴이 공중에서 둥둥 떠다녔다. 나는 너무 놀라 거칠한 이불을 코까지 당겼다.
"헙- 누구세요?"
"휴 정신을 차리셨나봐요."
"괜찮으신가요?"
옆머리를 곱게 땋아 뒤로 이어 묶은 아씨는 선녀 같은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 머리를 하고 있지만, 꼭 외국인처럼
오목조목 아름답게 생긴 아가씨는 소매를 걷어 가녀리고 하얀 손으로 이마의 열을 재었다.
"열은 내린 것 같아요."
몸을 일으키자 보이는 것은 내 방의 큰 옷장과 화장대가 아니라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가마가 있는 부엌이었고 내가 누워있는
곳은 강아지 냄새가 나는 딱딱하기 그지없는 온돌 침대가 아니라 푹신푹신해서 엉덩이가 10cm는 꺼지는 그런 보드라운 침대
였다. 한마디로 이곳은 내 방이 아니었고, 그 말인 즉은 이곳은 우리 집이 아니었다.
"여, 여기가 어딘가요?"
혹시 어제 정신을 놓고 걷다가 이상한 집에 들어왔었나, 아님 납치를 당했나 이것저것 드는 무서운 생각들이 머리 속을 헤집었
다. 내가 당황한 마음에 발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말하자, 아가씨는 대야에 담은 물을 창문 밖에 버리면서 말했다.
"단을강의 하얀 지붕의 집이에요."
"…."
단을강? 우리나라에 그런 강도 있었나?
"서울은… 맞죠?"
" …서을이요? 여긴 단을이에요."
난 이때부터 뭔가 이상하단 걸 느끼고 차분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 먼저. 부엌에는 가스렌지 대신 아궁이가 있었고 아가씨를
비롯한 노인과 청년도 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유기 같은 만화책에서나 볼 법한 그런 옷말이다.
"이곳은 수국의 단을강 마을이에요."
아가씨가 다시 말을 했다. 그 말에 나는 이불을 젖혔다.
"…수, 수국이요?!"
"네. 수국(水國), 물의 나라요."
이제 내가 거품을 물 타이밍이란 걸 알았다. 큰일이다. 학교도 가야하고, 무엇보다 오늘은 시험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큰
일인 것은 내가 아무리 세계지리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지구상에 수국이라는 이름의 나라는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
게다가 한국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있지 않은가.─
"저를 데려 오신 게 어느 분이시죠?"
나는 짐짓 심각하게 물었다.
"이 집 앞에 쓰러져 계셨어요. 열이 많이 나는 것 같길래 아버지께서 침대로 옮기라고…."
아가씨는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지팡이를 땅에 짚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조급해하
는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조급해하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지요.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돌아갈 때가 되면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
게 되는 법. 오늘 하루쯤은 여유롭게 이곳에서 지내는게 어떻겠소이까."
나는 할아버지의 눈을 쳐다보았다. 활짝 웃고 계시는 인자함 속에 연륜이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웃음이 갑자기 우리
할아버지와 너무 닮아보여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말에 내 머릿 속에서 작은 질문 하나가 생겼다.
'진짜 집에 가고 싶은건가?'
하지만 난 고개를 흔들면서 그 질문을 머릿 속에서 지워버렸다. 조금 여유를 느껴도 괜찮겠지. 나쁜 사람도 아닌 것 같고.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즈음에 다시 아가씨가 입을 열었다.
"소개가 늦었네요. 이쪽은 저의 아버지시고, 이쪽은 저의 오라버니 찬영이세요. 그리고 저는 운영입니다."
그들은 조금 특이하게 한 손을 가슴에 얹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에 나도 침대 밖으로 빨리 나와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고개를 숙였다.
"서울 목동 토박이 이주연입니다."
수국이라는 이상한 나라에 들어와버린 나는 무언가 아무런 준비 없는 배낭여행을 떠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꿈과
도 같은 날들, 다시는 나에게 찾아오지 않을 판타지가 시작되었다.
* * * *
"옆으로 돌려요! 옆으로!!"
운영이 흥분을 하면서 나에게 말을 했다. 나는 흥분으로 떨리는 몸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면서 조심스럽게 들고 있는 낚대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어어? 됐다!!!!!!
"어? 어?! 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은 낙병(樂餠)이라는 놀이로 한자어대로라면 '즐거운 떡'이라는 해석이 되었겠지만, 긴 쌍절곤처럼 생긴 막대기로 떡을 낚는 놀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뒤늦게 이런 놀이에 눈을 뜬 나는 단을강 마을에서는 선두로 8개째 낚
고 있었다.
"전생에 낙병 선수시었나봐요!"
일등 상품으로 큰 잉어를 받은 운영은 신이 나서 방방 뛰고 있었다. 오늘의 저녁은 잉어탕일 것이다.
"오라버니께서 아시면 참으로 좋아하실 거여요. 요즘 잉어를 먹고 싶다고 계속 그러셨거든요."
나는 찬영의 이름이 나오자 입을 삐죽 내밀어버렸다. 찬영이 나를 마음에 들지 않을 이유는 충분했지만─음식은 보통 사람들의
두 배를 먹는다거나, 일도 안하고 하루 종일 집에 붙어서 운영과 논다거나─그렇다고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를 괴롭힐 수는 없
는 일이었다. 또 그것이 하는 짓이 유치하기 짝이 없어, 꼭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어?"
내가 한창 속으로 찬영을 씹고 있을 때 운영이 갑자기 얼굴에 웃음꽃이 피더니 들고 있던 오합(烏盒:싸리로 엮어 만든 그릇-소
쿠리)을 내 가슴팍에 맡기어두고 탑에서 우물을 돌리고 있던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운영?"
"태을!!!!"
수국에 온지 오늘로 사흘째였다. 그 사흘 내내 운영은 항상 웃고 있었지만, 저렇게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보는 사람까지 웃게 만드는 미소였지만, 난 그 웃음을 보자마자 갑자기 '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등에 땀으로 절어서 헉헉 거리고 있던 나는 물먹은 솜마냥 집 문 앞에서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바닥에 앉은 상태로 나
는 비밀번호를 꾹꾹 힘겹게 눌렀다. 장이 베베 꼬이는 기분이었다.
달칵 -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난장판이 되어있는 집이었다. 하지만 나는 왜 저렇게 되었는지 아는 것보다, 빨리 침대에 눕고 싶
었다. 나는 엄마를 애타게 찾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두어번 엄마를 부른 뒤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내가 아픈 것이 먼저였기 때문에 듣지 못했던 엄마의 소리가 들렸다. 그건 눈물
소리였다. 난 그제야 비로소 난장판이 되어있던 거실과 깨어져있는 때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물 얼룩을 볼 수 있었고, 마지막
에는 모든 가구와 가전제품마다 붙어있는 빨간색 딱지가 점점 크게 다가왔다.
친구에게 두 번의 배신을 당하고는 더 이상 최악은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 날 삼키며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
고 그 다음 세 번째 배신을 당했을 때에는 난 이미 스피노자의 뜻을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관조'. 나에게 있어서 관조란 내가 상
처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최후의 방어막이었다.
"주연 형님!!!"
손을 흔들고 있는 운영을 보면서 나는 정신을 차린 뒤 손을 흔들었다. 내 표정은 약간 어색하게 굳어있었다.
나는 아직도 저 호칭이 익숙하지가 않았다. 언니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 형님이라는데, 꼭 조폭들이나 쓰는 단어 같아서 영 껄끄
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진짜로 내가 언니가 맞는지도 궁금했다. 이참에 나는 나이를 물어볼 요량으로 그 둘에게 다가갔다. 우물
을 돌리던 그 남자가 어디를 다녀왔었는지 그의 등에는 봇짐이 매어져 있었다.
"여기는 태을 오라버니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진태을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이에요."
나는 어느새 말투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남자를 대하는 데에는 역시나 어색했다. 그래서인지 원래 나이를 물으려던 의도
도 까먹고 말았다. 굳은 상태로 고개를 들어보니 보이는 것은 정겨운 담덕 머리를 한 준수하게 생긴 남자였다. 그 남자는 심심
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행을 다녀오셨나 봅니다."
어느새 고어투를 사용하고 있던 나였다.─신기하게도 이 지역 사람들은 다 조선시대에서나 쓸 법한 고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진태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이 대화의 끝이었다.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에 운영이 방긋 방긋 웃으면서 여행은 어땠는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조용히 따라가고 있던 나
는, 문득 그들이 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간만에 만난 두 선남선녀를 위해 천천히 뒤로 빠졌다.
"저는 언덕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길은 잘 아니 걱정마세요."
태을과 운영이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나는 냅따 뛰어 단을강이 보이는 언덕 쪽으로 갔다. 내가 수국에 와서 가 본 곳 중 가장 좋
아하는 곳이었다. 검은 빛깔과 물의 흐름이 보이지 않는 한강과는 정말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옛 조상들이 왜 다들 그렇게 자
연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는지 조금 이해가 갔다.
울창한 소나무 기둥에 기대어 강을 바라보고 있을 즈음, 문득 서울 생각이 났다. 매연에 아침마다 붐비는 차들, 그리고 반복되
는 일상. 이곳에 온 게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매일 아침을 눈을 떴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운영이 친 난초
가 먼저 보였다. 나는 돌아가고 싶은 마음보다 그냥 이곳에 있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인지, 난초를 볼 때마다 안심을 했다.
"혼자 여기서 뭐하냐."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찬영이었다.
"아- 강 둔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만 보면 고까와지는 나는 조금 표정을 표나게 굳히면서 말했다. 그는 내 옆자리에 철퍼덕 앉았다.
"거기로… 돌아아고 싶냐?"
"왜요, 그럼 강에 빠트려라도 주시게요?"
"너 아직도 거기에 미련이 남았냐? 내가 물에 빠트렸다고?"
"수영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긴 1척도 안됐었다. 멍청아."
"…그래요. 다 내가 못났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쉬려고 했던 나는 점점 심통이 나고 있었다. 이틀전에 날이 좋아 물놀이 겸 계곡으로 그물낚시를 하러갔을 때
그가 나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밀어버렸던 것이다. 찬영은 조금 미안했는지 헛기침질을 했지만,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은 하
지 않았다.
"그래도 거기가 여기보단 좋지 않아? 똥 냄새도 안나고."
찬영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영락없는 꼬맹이다. 멀대 같이 키만 커서.
"글쎄요- 저도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목동은 저의 숨통을 죄던 자들이 너무 많았던 터라 가고 싶지 않은 마
음이 더 큰 것 같아요."
“너 무슨 일을 하고 살았냐….”
자객이라도 생각하는 것인지 짐짓 한발자국 옆으로 피하면서 물었다.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꼭 손으로 목을 죄어야 숨이 막히나요."
이런 말을 하면서 웃고 있는 내 표정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인지, 찬영은 고개를 단을강 쪽으로 돌렸다.
"여행을 가면 사람이 자유로워진다는 걸 아시지요. 전 지금 새가 된 기분입니다. 항상 날고 싶었지만 새장에 갇혀서 나오질 못
했어요. 그러다 이곳에 툭-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곳에 오기 하루 전 날은 평소처럼 무기력하고 힘없이 학원에서 공부를 하
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생일 날 이곳에 떨어지게 되었지요."
"그럼 그 날이 탄생일이었다고?"
"네. 제 생애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누가 신선계가 실존할 거라고 생각했겠어요. 아! 또 제가 낚시질에도 소질이 있
단 걸 알았구요."
나는 신이 나서 말했지만, 찬영은 꽤나 심각해져 있었다. 조금의 침묵이 흐른 뒤에 그가 입을 열었다.
"항상 웃고 계셔서 상처가 없는 줄 알았다."
"…흐음. 그게 제 습관이에요. 우울할 땐 더 웃는 거. 사람한테 너무 많이 다치다보니까 마음까지 닫혀 버리더라구요. 근데 조금
억울했어요. 그 사람들이 내가 울적한 모습을 보면 왠지 통쾌해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웃고 다녔어요. 그리고 사람도 다시 믿
고 싶었죠. 그래서 또 다쳤어요. 두 번째로 제게 큰 재앙이 닥친 뒤에, 그걸 딛고 일어날 틈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또 다쳤어요.
내가 웃고 있으니까 그 사람은 자기만 힘든 줄 알았나봐요."
"…."
"헤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시겠죠?"
"그…"
찬영이 말을 하려고 하자 우리를 부르는 운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주연님! 들어오셔요. 손님이 오셨습니다!”
“태을 말고 또 손님이 왔나보네요.”
“견우 말하는거냐?”
“네? 아니요. 태을이요.”
“이곳에서는 소를 모는 자를 보고 견우라고 한다. 운영이가 좋아했겠군. 그럼 가지.”
“아… 네.”
나는 ‘견우’라는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내가 이곳에 온 7월 7일이란 날짜와 함께 그의 이름이
머릿속에 박힌 것이다. 이유 모를 불길한 기운이 나를 엄습했다. 나와 찬영은 각자 다른 생각을 머릿속에 품은 채 아무 말 없이
수풀을 해치면서 언덕길을 반쯤 지났을 때 나는 찬영을 먼저 보내었다.
여기저기 핀 꽃과 신기하게 생긴 동물들을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이미 해가 다 떨어져있었다. 그
리고 집에 들어온 나는 집 안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왜 운영이가 가야 합니까?”
나는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발을 옮겼다..
“그렇게 명이 떨어져서… 우리도 자네 볼 면목이 없네.”
“여자애가 이 아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혈통도 아닌 어린애한테 무슨…”
“저희도 조금 놀랐습니다만…”
구릿빛 보석이 박힌 긴 로드를 입고 머리에는 마법사 모자 같이 뾰족한 모자를 쓴 노인은 난감한 듯 말했다. 운영이 어디로 가
야하는 상황인가보다. 자리에 앉아있는 할아버지와 찬영, 그리고 운영의 표정이 심각했다. 나도 눈치란 게 있는 사람이라 그들
에게 물어보진 못하겠어서, 마굿간으로 가는 문 옆에 조용히 서 있던 태을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저기… 지금 무슨 일 있습니까?”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게 잡긴. 괜히 멋쩍어진 나는 그 옆에 있는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한 템포 뒤에 머리
위에서 태을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운영이… 수궁으로 가야한답니다.”
아까는 미소를 짓고 있던 준수하고 밝은 얼굴이 어느새 사람 여럿 죽일 것 같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수궁? 수궁이
라 하면 용왕님이 사는 그곳을 말하는건가?
“설마… 여기 진짜 용왕이 있어요?”
“…보통은 그를 하백이라고 부르지요.”
정말로… 여긴 그런 나라였구나. 사실 뭔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았지만, 뭔가 실존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곳이었다. 아마 에
덴동산의 모습이 이러했을 것이고, 무릉도원이 이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린 그곳을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존재하지 않는 세
계라고.
어쩌면 난 이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성격으론 절대 감상에 빠지지 않았지만, 이곳
에 온 이후로 달구경을 한다거나 강물을 바라본다거나 하는 게 잦아졌다. 어쩜 찬영과도 자연스런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든 게 한 번 자고 일어나면, 없어질 꿈처럼 느껴졌으니까. 내가 그런 대화를 했다는 것
조차 잊어버릴테니까.
"근데 그곳엔 왜 가는 겁니까?"
내가 이 질문을 했을 때 나는 태을의 표정이 슬픔에 찼다는 것을 눈치채었고, 그 표정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고사에 의하
면, 하백은 자신이 슬프거나 화가 날 때 비를 내리지 않았고, 그 때마다 사람들의 농사에 흉년이 들어 신부를 올리는 제사를 했
다는 말이 있다. 신부는 점지한 연못의 연꽃 위에 올려두어 밤이 되면 하백이 직접 그녀를 데려간다는 설이다. 요즘 농사가 잘
되지 않아, 식량 걱정이 크다던 운영의 말이 뇌리에 스쳤다.
"잠깐… 그럼 운영 언니가 하백의 신부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
아차. 난 태을과 운영의 다정한 모습을 떠올리며 말실수를 했단 걸 깨달았다. 로드와 마법사 모자─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사신
이었다─를 쓴 할아범은 저녁 식사 중간에 자리를 떴고, 잉어탕이 식탁 중앙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제 밥그릇 앞에서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숟가락을 내려놓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운영아. 떠날 준비를 하거라."
"아버지!"
"아버님…."
"어허!"
"…."
결국 식탁 위엔 눈물이 뚝뚝. 비가 오지 않았던 하늘에서도 갑자기 얇은 안개비가 뚝뚝 떨어졌다. 태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
았다. 이곳에 온 이후로 밥그릇을 다 비우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만은 모두의 밥그릇에 밥이 2/3가량이 남아 있었다. 그렇
게 위가 허전한 식사가 끝난 뒤, 각자의 자리로 갔다.
태을은 아픈 조랑말을 돌보기 위해 마굿간으로 갔고, 운영은 멍하니 베틀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찬영은 뒷마당에서 검술을,
할아버지는 잠시 어딜 다녀오시겠다며 집을 떠나셨다. 사람이 가장 힘이 들때면 자신의 일을 찾게 된다하지 않았던가. 나는 갑
자기 공부가 하고 싶어졌지만─고3이 된 이후 처음으로 느낀 욕구였다.─책이 없었기 때문에 쌓인 설거지를 하기로 하고, 짚을
엮어 맨 수세미로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 안에 있는 사람은 나와 운영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할 말이 없어도, 운영이 먼저해주어 어색했던 적이 없는데 오늘은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운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백님은 참으로 준수하시고 근엄하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요즘 감정의 기복이 심하신지 비를 자주 내려 주시지 않아 농토가
점점 말라가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까닭이 신부님이 돌아가셔서였나 봅니다."
운영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젠장. 눈물엔 자신 없다고! 난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을 할지 고민하던 나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된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태을......님과 정혼을 약속한 사이시지요?"
호칭에 망설이던 나는 한참동안 이름을 끈 뒤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을 한 것이 역효과였는지 운영은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18년…간을 함께… 흑 해온 사람입니다."
난 달래주지도 않았고 가만히 있었다. 왠지 그녀를 안아주고 토닥일 용기가 없었다. 살아오면서 사랑이란 것을 사치라고 생각
해왔던 나였다. 어쩌면 나는 사랑에 힘들어하고 있는 운영을 조금 질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저 베틀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설거지를 하던 손도 멈추고 바닥에 쭈그려 앉은 상태 그대로 멍하니 베틀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망…갈 거에요?"
내 말에 운영은 놀란 듯 토끼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까 자신의 풀지 않은 짐보따리를 그대로 가
지고 나갔던 그가 생각이났다.
"이미 태을은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하지만…."
"아버님께서 떠날 준비를 하라는 건, 무슨 의미셨을까요?"
운영은 고개를 숙였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을 것이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할아버지와 태을이 동시에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의 손에는 두 개의 봇짐이 있었고, 소리로 보아 돈 같았다.
"비가 너무 많이 온다. 빗줄기가 좀 약해지고 나면 마을을 떠나라."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세요! 신부는요!"
"…그렇다고 내 딸을 보낼 수는 없지. 잘 살고 있는지, 살아는 있는지도 모르면서 살 수는 없구나."
할아버지는 강인하신 분이셨다. 난 그걸 느꼈다.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다고 자부하는 나는, 그런 할아버지
가 참 멋있어 보였다. 항상 실없는 소리만 하시고, 만약 서울에서 할아버지를 보면 도 닦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특이하신
분이셨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계셨다.
"태을아. 운영이를 잘 부탁하는구나."
"죄송합니다."
"지금은 고맙다고 하는 게 기쁠 것 같구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눈물바다가 되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감정이 복잡했다. 부러움과 동정심, 슬픔이란 감정이 뒤섞였다. 운영이 봇짐을 챙기는
걸 도와주기 위해 방으로 올라온 나는 괜히 흘러나오는 불안의 눈물을 계속 훔쳤다.
"울지 마시어요. 형님"
"밥은 굶으면 안돼요. 지금도 말랐는데, 여기서 더 살이 빠지면 흉해요. 그리고 남자는요, 여자가 너무 잘해도 안돼요. 가끔씩은
튕겨줘야지 남자가 더 잘해줘요. 그리고… 그리고…."
이상한 말만 나불거리는 나를 운영이 꼬옥 안아주었다.
"사흘밖에 함께 하지 못한 게 아쉬울 뿐입니다."
"…."
눈물이란 거 다신 내 눈에서 흐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이놈의 오지랖은 어딜가지 않나보다.
"베틀도 가져가고 싶지만 그러기엔 봇짐이 너무 작네요. 헤헤"
나를 웃기려고 한 건지 아님 정말로 베틀을 싸가려고 했던건지 천떼기로 이리저리 묶어보던 운영은 바보처럼 웃었다. 나도 피
식 웃고는 다른 옷을 개키면서 말했다.
"베틀을 정말 소중히 하시네요."
"명색이 직녀인데, 베틀이 없으면 직녀가 아니지요."
"……."
나의 표정은 급속도로 굳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뭐야? 이게 뭐야?
"잠깐만요. 그럼 태을이 견우고, 언니가 직녀에요?"
"네? 뭐 서로의 직업이니까요.."
운영은 내가 흥분한 모습에 조금 당황해하면서 대답했다. 나는 아까의 정체모를 불안감의 정체를 알아냈다. 내가 이곳에 온 날
짜는 내 생일 날, 7월 7일. 태을은 견우, 운영은 직녀. 나는 말해야 했다. 가면 안된다고. 그냥 하백과 결혼을 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둘 다 벌을 받아서 멀리 멀리 떨어져, 결국 일년에 한 번, 칠월칠석 때밖에 만날 수 없을 거라고.
하지만 내 입은 결국 떨어지질 않았다.
"형님?"
입을 굳게 다문 나를 이상한 듯 쳐다보면서 운영이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운영을 쳐다보았다.
"내가… 하백의 신부가 될게요."
그렇게 일은 커졌다.
* * * *
"정말로… 아름다워요."
새벽에 나와 안녕을 고하던 운영, 너무 울어서 눈이 팅팅 부은 그녀는 그 마저도 아름다웠다. 그 가녀린 손으로 한사코 화장만
이라도 자기가 하겠다며, 벌벌 떨리는 손으로 꼼꼼히 천천히 나를 단장 시켜준 운영. 예복으로 갈아입을 때도, 자신보다 한참은
뚱뚱한 나를 보며 왜 이렇게 말랐냐며 어머니가 딸 강제로 시집 보낼 때 하는 멘트를 다 날리던 운영이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서 아무 말 없이 살짝 웃었다.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 또한 거짓말이겠지.
그렇게 운영과 태을, 견우와 직녀는 지난 새벽에 길을 떠났다. 나는 어젯밤 일을 떠올리면서 괜히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냥 제가 신부가 되겠습니다. 형님을 끼어들게 할 순 없어요."
내 말을 들은 할아버지가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고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계셨고, 그에 계속 울면서 싫다는, 자기
가 그냥 시집 가겠다는 운영에게 나는 소리를 질렀다. 이번 해 들어서 나는 처음으로 악에 바쳐 소리를 질렀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지 마!! 그렇게 약한 소리 하지 말라고! 너희가 도망치면 그럼 안 잡히고 멀리멀리 가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어? 신이라잖아. 우리를 만든 게 신이잖아. 위장할 신부도 준비하지 못했으면서, 신인 하백한테 안 들킬 거라고 생각했
어? 왜? 무서워져? 정작 도망갈 생각하니까? 돌아갈 수 없어. 네가 하백의 신부가 되면, 진짜로 그 땐 돌아갈 수가 없다고."
이건 나에게 했던 말일지도 모른다.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빠져나가려고 했던 나에게. 수국에 온 뒤로 나는 인상 한번 찌푸렸
던 적이 없었다. 그럴 걱정도, 고민도 없었으니까.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이름 그래도 물처럼 세상이 흘러가는 곳이 수국이었
다. 하지만 너무나도 우유부단한 운영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 난 계속 내 자신에게 화가 나있었던 것이다.
운영과 태을이 몇 번의 인사 끝에 떠났을 때. 그들의 떠나는 뒷모습이 아직도 아련하다. 딱 두뼘 차이가 나는 키에, 떡벌어진 태
을과 가녀린 운영.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한 쌍. 내가 이 전설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잠시나마 그들이 행복하길 바랄 밖
에…
그리고 1시간 뒤에 해가 완전히 떴고, 그 동안 할아버지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은 나는 바로 할아버지와 찬영─눈이 씨뻘겠다─
과 함께 연못가로 갔다.
"후…하…"
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할아버지와 찬영이 폐를 끼칠 수 없다며 한사코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연못 위에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신부는 금빛 자수가 박힌 큰 천떼기를 머리에 쓰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내가 운영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씨…"
긴장감이 다 풀릴 정도로 꽤 오랜 시간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들도 웅성거렸다. 나는 혹시 이건 운영한
테만 작동하는 마법진인가? 라는 아주 지극히 판타지적인 생각을 했다.
연지를 바른 입술이 익숙치가 않아서 입술을 오물오물 거리고 있던 나는 점차 지루함을 느꼈다. 설마 이러다가 수궁은 커녕
그냥 물 속으로 가라앉는 건 아니겠지? 기껏 차려입은 비단옷이 다 망가질까봐 조금 걱정이 된 나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정말로 물에 빠져버렸다.(…….)
"정신차려라."
껌뻑껌뻑.
나는 눈을 뜨고 닫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뻑뻑한 눈을 치떴다. 그러자 보이는 건… 상반신이 나체인 머리가 짙은 군청색깔인
남자였다. 그는 젖은 머리칼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나를 못마땅한 듯 쳐다보았다. 그리고나는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듯이,
입을 벌렸다.
"헉."
그리고 고작한 말은 '헉'. 여기가 수궁이야? 여기가?! 너무 놀라서 입만 쩌억 벌리고 있는 나를 보고 하백이 그 바다 같은 눈으
로 나를 직시하면서 말했다.
"얌전하고 조신한 처자라고 들었는데, 코까지 골다니. 역시 여자는 살아봐야 안다는 말이 맞는 것 같군."
…나는 편도선 비대증이 있기 때문에, 음…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고개가 젖혀지면 코를 골게 된다구… 그건 내 의지가 아니란
말야. 물론 난 이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대신 할 말들을 찾았다. 물어볼 말은 참 많았다.
"…여기가 수궁이에요?"
"그렇다."
그의 말에 나는 또 다음 질문을 했다.
"그럼, 당신이 하백이에요?"
"…그래, 내가 하백님이시다."
아마도 그는 내가 '님'이라는 존칭을 쓰지 않아서 조금 비위가 상했는지 한쪽 눈썹을 치뜨는 게 느껴졌다. 하백은 벽에서 흐르
는 물(…)을 잔에 담더니 나에게 건네었다. 나는 잔과 그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았다.
"…마셔요?"
"그럼 내가 왜 이걸 네 얼굴 앞에 들고 있겠는가."
그리고 난 깨달았다. 신이란 참으로 싸가지가 없다는 것을.
"한 식경 뒤에 식사 시간이다.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어라. 쟤 좀 도와주거라."
하백은 두 시녀에게 나를 맡기고는 방에서 나가버렸다. 두 시녀는 아주 작았는데, 그들의 키는 내 골반까지밖에 오지 않아, 꼭
어린 아이 같았다. 나는 하백이 나간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침대에서 내려와 그들과 시선을 맞추려고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들은 고개를 푸욱 수그렸다. 어머. 너무 귀여운 꼬맹이 시녀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몇 살이야?"
"올 해 서른 넷 되옵니다, 운영님."
…. 그 말에 나는 당장 손을 떼었다. 이런. 여기가 초비현실적인 세계란 걸 내가 깜빡했었나보다. 나는 나의 옷을 벗기고 여러
겹의 옷을 입혀오는 두 시녀 아주머니(…)에게 몸을 맡기면서 이리저리 방을 둘러보았다.─운영이 처음 나의 옷을 벗길 때 식겁
했지만, 나는 이 곳 옷을 입고 벗는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라는 걸 알았기에 그냥 내버려두었다.
수궁은 참 화려했다. 금은 이런 것으로 치장된 것이 아니었지만, 꼭 그리스의 신전을 아름다운 정원에 지은 것 같은 느낌이었
다. 그리고 충격적인 것은 이곳은 섬이었다. 물에 떠 있는 섬이 아니라. 하.늘.에 떠.있.는 섬 말이다. 물 아래로는 지상세계가
보이는 섬. 참나. 비현실이 현실이 되다니, 이 무슨 기이한 일인가.
내가 여기저기 고개를 돌리고, 화장을 할 때는 눈알을 굴리면서 구경을 하자, 그 오랜 치장시간도 별로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저녁을 먹으러 가야한다는 계미─이름이 계미라 그래서, 그 하백이 떠준 물(화이트 와인 맛이었다)을 그녀의 옷에 풉-하
고 뱉었었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거울에서 눈을 뗀 뒤 어깨를 딱 펴고 모델마냥 당당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들어라."
식사시간은 끔찍했다. 길고 긴 식탁에 여러 명이 앉았지만, 나는 무슨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양 조용히 앉아있었다. 체할 것 같았
다.
"마을은 요즘 어떻습니까?"
내 옆 자리에 앉아있던 미인이 물었다.
"음… 농사가 잘 안 되서 식량 걱정이 조금 있지만, 괜찮아질 듯 싶습니다. 얼마 전에 낙병대회가 있었는데 제… 동무가 일등을
했어요."
"밀거래상이 판을 친다던데요."
"아, 그것도 경찰들과 민간인들의 협력으로 조만간 잠잠해질 것 같습니다."
다행이다. 할아버지가 이것저것 얘기해주셔서. 날이 밝기까지 두어시간 동안 할아버지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내 머릿속에 주
입시켰다. 요즘 시세와 인간계 얘기, 그리고 그 쪽에서의 예절과 몸가짐 등등. 하백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든 질문에 어느 정도 대답을 잘 한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사실은 식사자리에 들어서면, '예쁘다' '잘 어울린다'라는 칭찬을 받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런 건 눈 여겨 보는 것 같지 않아 조
금 섭섭하지 않았다면 틀린 말이리라.
식사가 끝난 뒤에는 바로 잔치가 펼쳐졌다. 여기저기 진기한 볼거리들이 보였는데, 게 중에는 하백이 불러낸 수룡이 춤을 추는
것도 있었고, 날아다니는 아기 천사들의 불꽃놀이도 있었다.
"운영 언니! 이것 좀 봐요…! 아, 죄송합니다."
나는 옆에 있는 시종에게 미안하다고 사죄했다. 그 시종은 그럴 것 없다면서 활짝 웃은 뒤에 자리를 떠났다. 사흘 동안 함께 지
냈던 것이 갑자기 사라지니 옆이 허전한 것 같기도 했다. 고작 사흘이었는데 말이다. 다른 친구들과 가족들은 하나도 보고 싶지
않으면서, 사흘 동안같이 지낸 찬영과 운영, 그리고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니 웃긴 일이다.
운영이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느끼고, 얘기 하나 나눌, 아름다움을 나눌 사람 하나 없다는 사실에 갑자기 불꽃놀이가 흥미 없
어진 나는 단을강의 언덕만한 곳을 찾았다. 조금 멀리 떨어져서 이곳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난 언덕은 아니지만, 정좌
하나를 찾아서 적주(赤酒)를 들이켰다. 술처럼 쓰지도 않고 단 맛에 계속 들이켰는데 이걸로 넉잔째였다.
허공에서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를 보고 있자니, 내 옆으로 누군가가 왔다. 찬영처럼.
"아깐 신이 나있더니, 왜 여기있나."
다만 그건 찬영이 아니라, 하백일 뿐이었다.
"아- 그냥 좀 멀리서 보고 싶어서요."
하백은 나와 한참 멀리 떨어져 돌계단 옆 나무 기둥에 기대었다. 그의 긴 기럭지에 잘 어울리게, 옅은 소라색의 비단 바탕에 보
라색 수룡을 아름답에 수놓은 살짝 붙는 상의에 여러 겹 겹쳐입은 듯 멋있게 주름이 잡힌 치마바지(맞나)를 입은 그는, 이제는
마른 머리가 그의 눈을 살짝 가렸다.
내 말에 그가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습관적으로 씨익 웃었다.
"뭐랄까. 항상 불꽃놀이나 잔치의 가운데에 서 있던 적이 없어요. 그래서 예전에는 그 중간으로 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정말로
그 중간에 왔지 뭐에요."
운영에게 내가 하백의 신부가 되겠다고 한 것은, 정말로 견우와 직녀만을 위해서였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위해서라
는 마음으로 바로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분명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건 솔직히 단을강 마을이나 수궁이나 수국 안이고,
내가 집에 없는 건 똑같은 거였으며, 있을려면 수궁이 더 좋지 않겠느냐라는 계산도 무의식중에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좋은가?"
"그게… 별로 그렇지도 않네요."
식사할 때도 형식적인 대답들만 오가고, 뭔가 다들 가식에 싸여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서 있었을 때 나는 사람들의
그런 면에 더 질렸었는데, 수궁에서 보니 또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내가 생각했던 유토피아의 성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말이
다.
"표정은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다."
"헤헤- 뭐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에요. 제가 살던 곳은 모든 게 경쟁이었고, 반전과 배신이 끊이질 않는 곳이었거든요.
그냥 이젠 무슨 일이 생겨도 그러려니 해요. 감정이 사라진 것처럼 눈물도 안나요."
"…."
"어라, 내가 괜히 심각한 척해서 비웃는거에요?"
"그래서… 포기한건가?"
"…글쎄요."
항상 포기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는 나를 포기하고 살아왔다. 나는 진 것이었다.
사람에 대해서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딛고 빨리 일어서질 못한다면 그건 나 자신만 손해를 보는 일이란 걸 잘 알면서도 쉽사리
다시 마음을 열지 못했다. 상처란 게 오버랩 기능이 있어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땐 그 때 그 사건이 떠오르기 마련이니
까.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나는 하백과 처음으로 눈을 똑바로 맞췄다. 나무 그늘에 가려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나도 그를 그리고 그도 나를 쳐다
보고 있었다. 참 아름답게 생긴 사람이었다. 늙은 흰 수염 난 할아버지 일 줄 알았는데, 운영의 말이 맞았다. 준수한 사람이란
것만. 아니. 상당히 잘생겼다.
“비밀 하나 알려드릴까요?”
“?”
“저 남자 되게 싫어해요. 사실 이렇게 남자랑 얘기하는 것도 진짜 오랜만이에요. 남자가 싫었던 이유는, …더럽다고 생각했어
요. 성적인 욕구나 그런 게 항상 먼저고 그런 걸 서슴없이 여긴다는 게 싫었거든요.”
"…그게 잘못인가?"
하백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하긴, 신이면 살아오면서 여러 여자를 안아보았겠지. 나는 실소를 지은 뒤,
달과 아름다운 조명들이 비춰주는 물빛 정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 아닌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저 자신 때문인지도 몰라요. 여자의 외관만 먼저 보는 남자애들 눈엔 나는
정말 못나 보일테니까, 그래서 남자가 더 싫어졌는지도 모르죠. 여색을 밝히는 건 그 아이들이 더 싫어진 부가적인 이유일지도
몰라요.”
물소리와 불꽃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과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조금 멀게 느껴졌다. 나는 정좌에 벌러덩 누워서 눈을 감았다.
그 때 하백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어느 곳에나 나쁜 놈과 착한 놈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쁜 놈이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
"...그걸 위로라고 하고 있는거에요?"
"그래도 주위를 둘러보면 착한 놈이 몇 놈은 있더라."
뭔가 서울사람이 사투리를 쓰듯 말투가 굉장히 어색했다. 나는 하백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 말을 하는 걸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
다. 조금 다행이다. 물의 신이란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서. 그는 곧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몸가짐을 정리해둬. 조금 있다가 제사관에게 인사를 해야하니."
"제사관이요?"
"수궁의 늙은이들이다. 밉보이면 골치가 아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도 무조건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옷을 정리하고 무거운 머리 장식을 다시 쓴
뒤에 나는 정좌에서 나왔다.
* * * *
"계미… 원래 하백의 신부란 게 이렇게 할 일이 많은거에요?"
"하하… 이게 다 통과의례랍니다. 주연님."
어젯밤에 조금 과하게 술을 마셨는지, 아직도 머리가 띵-한데 일어나자마자 나에게 책을 한 다발 안겨주어 나를 고통스럽게 만
들었다.
"저기… 계미. 뭔 이런 히브리어처럼 생긴 걸 어떻게 읽고 알라는거야?"
난 책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안면 근육이 덜덜 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림은 하나 없는 꼭 히브리어로 된 비문학 지문을 읽
는 느낌이었다. 분량이 적으면 말을 안 한다. 한 수레다.
"하백님께 알려달라고 청하세요, 주연님. 제가 뭘 알겠습니까."
계미(그 아주머니 시녀다)의 표정에는 좋아죽겠다는 게 보였다. 내가 싫으니? 나는 억지 미소를 지은 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물어물어 하백의 방을 찾았다.─여긴 하루 종일 걸었어도 다 거기가 거기인 것 같다.─ 나를 보면서 환하게 웃는 호위무사
들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어제부로 이들과 친해진 나였다. 어제 원로원 사람들에게 시달렸던─내 몸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백옥 같다느니 뭐냐느니─
나를 조금 쉴 수 있게 도와준 그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잠자리는 불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예, 덕분에 편안히 잘 잤어요. 하백은 안에 있나요?"
"네. 안에 계십니다."
나에게 말한 호위무사는 그 건너편에 있는 기다란 검정색 옷을 입은 시녀에게 고개짓을 한 뒤에, 문을 열게했다. 드르륵 소리
와 함께 문이 열리자, 두 손 가득 책을 들고 있던 나는 처음 들어와 보는 그의 방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걸어들어갔
다.
"무슨 일인가."
서류로 보이는 두루마리를 공중에 띄워서 처리하는─만약 나도 마법을 할 수 있다면 정말로 꼭 배우고 싶다─그를 보면서 나는
헤벌쭉 웃었다.
"헤헤. 이걸 어떻게 읽는지 몰라서요."
"뭐?"
"시녀들이 자기네도 모른다고, 하백님한테 가보라잖아요."
"그게 뭔데."
"공부하라고 저한테 이것들을 주던데요?"
내 말에 하백은 곧 내 품에서 책을 빼앗아─정확히는 마법으로─공중에 촤악 펼쳐서 죽죽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수국에서 문맹률은 현저히 낮다고 하던데."
"…제가 쓴 언어랑은 다르다구요. 나도 나름 3개 국어를 하는데…"
괜히 의지의 한국인인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조금 성질이 나는 바람에 나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하백은 피식 웃으면서 공중에서 빙빙 돌고 있던 두루마리들을 다시 제자리로 놓은 뒤에 나에게 다가왔다.
"첫 날밤인데, 잘 잤느냐?"
"왠일이세요, 안부를 다 묻고?"
그 말에 잘 해줘도 난리야라는 표정을 짓는 하백이었다. 그의 성질을 돋구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안 나는 또 그것을
무마하려고 베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잘 잤지요. 침대가 너무 푹신하고 좋아서 아주 파묻혀서 잤습니당."
"그런 천박한 말투 쓰지 말아라."
"…네."
이런 걸 애교라고 하는거다. 이 멍청아.
그는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의자 두 개가 놓여진 곳으로 가 앉더니 맞은 편 의자를 뺐다.─마법으로. 하하하하─나는 아직
도 어색한 듯 앉아서는 책을 펴고 그가 하는 말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었다. 간만에 뇌를 혹사시키니 기분이 나쁘지
도 않았다. 이것이 고3의 본능이란 말이던가.
"그러니까 그건 아와 에의 중간 발음이라고,"
"그러니까 아애 잖아요."
"꼭 그렇게 뭐 어디 부족한 사람처럼 넋을 놓고 발음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것도 순화라고. 그의 말을 직역하면, 꼭 그렇게 애자처럼 발음 해야 하냐? 이것이다. 흥. 나는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깃펜을
움직였다.
'you idiot.'
"그게 뭔가."
"되게 좋은 말이에요. 하백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것보다 좋은 말은 없을거에요."
나는 정말로 그렇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모르는 나라 말은 없다. 이곳은 어디 나라 말이지?"
"네? 아. 위댱모댱…이라는 나라 말이에요."
나는 얼토당토 않는 소리로 거의 발음을 뭉게가면서 말했다.
"뭐? 어디?"
"아씨. 그냥 좋은 말이라고요! 고대어, 고대어!!!"
무조건 고대어. 그래. 고대어라고 하면 지가 어쩔거야. 그러자 하백은 나를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꽤 멋지게 쓴
'you idiot'이 조금 맘에 들었는지(…) 내가 적은 비단종이를 접어 올려 자신의 서랍 안에 집어넣었다.
"감사히 받지."
"…아. 네."
뭔가 죄 짓는 기분인데, 왜 이렇게 신나지? 나는 속으로 백번을 웃었다.
정말 전쟁 같은(쓰고 이해하는 건 빨라도, 발음이 안되자 그는 결국 두루마리로 내 머리를 가격했다.) 수업이 끝나고, 앞으로
이 시간마다 오라는 그의 말에 입을 삐죽 내민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인 다음에 문을 박차고 나왔다.
"괜찮…으세요?"
"…소리 못 들었어요?"
나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라이에게 말했다. 그러자 라이는 포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래도 하백님이 나쁜 의도는 아니니
까 너무 서운해 하지말라고 그랬다. 하백에겐 너무나도 아까운 호의무사였다. 잘 생기기도…했고. 흠흠.
* * * *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은 됐을까? 무튼 여러밤이 지났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온 지 일주일 중에서 원로원 사람들을 대하는 것
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사태가 일어났다.
"…왜, 왜 그래요?"
하백이 울고 있었다.
그. 하백이 운다. 그 하백이 운다. 그 하백이 운다.
내가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마법으로 내 혀를 굴려서 제대로 발음까지 하게하고, 나름 명색이 신부인데 두루마리로 자
기 기분 내키는 대로 맨날 쥐어박고, 심지어는 자기는 아직 배가 고프지 않다고 정해져 있는 식사시간을 두 식경이나 미루고
원로원 사람들이 바가지를 긁는 날이면 심통이 있는 대로 나서 천둥번개를 내리게 하고, 괜한 라이를 발에 걸려 넘어지게 하고
무튼 못되고 정말 신 같지도 않은 이 신이 운다.
주여.
평소와 똑같이 저녁을 먹은 뒤면 산책을 나와 밤에만 피는 야류화를 보면서 달의 정기(...)를 받던 나는, 식사시간 때 말이 하나
도 없는 하백을 보긴 봤지만, 뭐 원래도 저러니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무시를 했지만, 그는 내가 항상 앉던 그 정좌 기둥에 기
대어 앉아 있었다.
달빛을 받은 그는 정말 아름다웠다. 바다 같은 아름다움이라고 해야하나? 무튼 나는 또 화보를 찍는다면서, 그를 놀래켜줄 요
량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소리를 죽였다.
"워!"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보았다는 그 놀래키기를 한 결과, 그는 정말 놀랬다. 움찔.
단 한번도 내가 한 장난에 넘어온 적이 없는─물론 영어로 쓴 두루마리를 제외하고─그가 놀란 것이다. 나는 너무 기쁜 마음에
'헤헤, 놀랐대요'라고 놀리려고 했지만, 그 수려한 얼굴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똑똑 떨어지는 것이다!!!! 이건 뭐 운영보다 예쁘
잖아!!!
"… 왜, 왜 그래요?"
너무 놀란 마음에 말까지 더듬더듬. 천하의 하백을 울린 사람이 누구냐! 누구냐! 누군데 보는 사람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냐고!
"너의 이름이 뭐냐."
"네?"
"…운영이지. 제운영이지."
…왜 그 순간. 그가 나 때문에 우는 것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생각은 한 것일까. 생각해보니, 그가 이름을 부른 적이 없다. '운영'
이라는 이름을 부른 적이 없다. 이제 계미가 '운영 아씨!'라고 부르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가는 데, 정작 하백은 그렇게 나를
부르지 않았다.
"…."
나는 조용히 그의 옆에 앉았다.
"나에게는 정말로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내 영원의 시간을 나눠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여자."
처음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하백은.
"신이라는 건 참 지루하고 힘겹기 짝이 없는거지. 평생을 살아가야 하니까. 그런데, 그 영생을 남에게 주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처음이었다. 반지를 끼는 날까지 앉지 않고 아껴주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 사람을 말하는 걸까? 내 전대의 신부.
"하지만 알고보니 그녀는 우리 피의 사람이 아니었다."
"…피?"
"인간 중, 신의 축복을 받은 자가 몇몇 있다. 그것이 가문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나타나는 것인데, 태아 때의 기운
을 보면 알 수 있다. 파린도 그 사람 중 하난 줄 알았다. 그런데 잘 못 온 것이다."
"…."
"운영아…."
왜 나는 그가 운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마음이 아픈 것일까.
"고개를 들어라."
그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짙은 물빛의 눈동자. 무섭도록 깊은 바다 같은 사람, 아니 신. 영원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신. 여태껏
수많은 죽음을 보면서 살아왔겠지. 하지만 그 외로움 때문에 계속 해서 신부를 맞아왔겠지.
"울지 말아라."
그 말에 나는 왜이리도 눈물이 났는지… 울고 있던 건 그 사람인데 왜 나는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그가 불쌍해서,
앞으로도 평생의 삶을 살아 갈, 어쩌면 냉정할 수밖에 없는 그가 너무 불쌍해서, 그리고 운명이 너무 가혹해서 울었던 것일까.
"하백…"
"왜."
여전히 싸가지 없게 대답했다.
"운명이요. 그건 누가 만드는 거에요?"
"…."
내 말에 말문이 막힌 듯 눈을 깜빡이면서 그 짙은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평소 같으면 감당 할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겠지만 이번만큼은 피하지 않았다.
운명을 결정하고 그를 아는 것은 신 뿐이라했다. 그리고 그는 수신이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사람도 어찌되었는지 결국은
죽었다. 그도 그걸 알았을까?
"운명은… 날씰과 씨실이 짜이고 짜여 만들어지지. 그건 누구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시간의 흐름으로 결정되어진다. 신은
모든 것을 알고 그걸 받아들일 뿐. 숙명이라는 것은 인간이 아닌, 신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씨익, 웃어보였다. 웃어…보였다.
* * * *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도저히 어저께를 생각하면 그냥 얼굴이 씨뻘게 지고 숨이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하백이 그렇게
자조적으로 한 말을 들은 후, 우리는 서로 그렇게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밤 바람이 차다. 슬슬 들어가자."
"…아 네."
그리고는 그는 나를 데.려.다 주었다. 물론 어제 하백이 울기도 하고─하늘이 놀랄 일이었다.─자기 속내를 조금이나마 드러내
며 나의 동정표를 사기도 했지만, 이건 정말로 기분이 이상했다. 데려다 주는 내내 그는 나의 팔 옷깃을 살짝 잡고 있는데 나는
그게 왜 그렇게 손잡고 싶어하는 초등학교 6학년짜리 꼬맹이처럼 보였는지 모르겠다.
"그럼 들어갈게요."
내 처소에서 발을 멈추면서 말했다. 그러자 하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이마에 입술을 살짝 데었다. 거짓말이 아니다. 진짜
로 내 이마에, 그 입술이 닿았다. 순간 그의 향이 확 코로 들어왔다. 심장 소리가 들릴까봐 숨을 멈춰봤지만, 소용은 없었다.
"좋은 꿈 꿔라."
"…네,네."
그리고 나는 도망쳤다.
잠을 자지 못해서 다크써클이 내려온 퀭한 얼굴을 자기에 비춰서 바라본 나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곧 조반 시간이었고, 그 다
음에는 하백의 방에 가서 글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다른 날처럼 나를 막 대하겠지만, 뭔가 뭔가… 내가 괜히 과민반응
할까봐 너무 걱정이 되었다.
"운영님. 일어나셨나요?"
라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리저리 갈라진 목소리로 크게 '으응!'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그들은 또 미끄러지듯이 내 방
안으로 들어와 따뜻한 물로 나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운영님, 혹시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 하셨나요?"
"응? 어떻게 알았어? 피부 많이 퀭해?"
나는 걱정하면서 손으로 얼굴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어제 코 고는 소리가 들리질 않더라구요."
"…."
내 코 고는 소리가 시녀방까지 들릴 정도로 컸더냐? 하백한테 말해서 이 편도선을 잘라달라고 하던지 해야지!!! 원!!
"빨리 준비해줘. 조반 시간 다 돼간다."
나는 물시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에 라해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주빛 드레스를 가져와서 나에게 입혔다.
얇게 화장을 하고선 나는 바로 처소에서 나와, 라해와 계미를 이끌고 정원으로 갔다. 요즘 아침 식사는 계속 정원에서 했다.
하백을 볼 생각에 조금 가슴이 두근 거렸다.
"후. 후.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내 말을 의아하게 보던 라해와 계미는 서로를 쳐다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라이가 내가 왔다는
신호를 보내자, 조반을 함께 하는 멤버들이 웃으면서 나를 맞았다.
"오늘 수국에서 낙병 대회가 있다고 합니다."
"어머, 진짜요? …아씨."
민강의 말에 나는 아깝다는 듯이 말했다. 낙병. 수궁에 들어와서 컴퓨터 다음으로 그리웠던 것이 그것이었다! 물론 하려면 하겠
지만, 그건 뭔가 경쟁하는 맛이 있어야 한단 말이다!!
"마을에 있었을 때, 한 번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아, 그럼요. 제… 동무가 참으로 능숙한데, 저는 조금… 실력이 부족해서… 하하."
내가 일등했다우. 8개. 대단하지 않소? 그 때 나는 이곳에 온지 삼일밖에 되지 않았었다오. 나와 함께 해보지 않겠오?
이 말들은 물론 내 위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식사 시간 내내 하백을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그가 달라진 것은 한 개도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뭐 잘 됐다고 생각하자.
"오늘 수국에 한 번 정찰을 나갈까 생각 중입니다."
"아 정말요? 마을을 도시는 건가요?"
"네. 한 번씩 이렇게 정찰을 해서, 탐관 오리들은 없는지, 문제가 뭔지 확인을 한답니다. 운영님도 혼례를 치르고 나시면 하백
님과 함께 달포에 한 번씩은 나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재밌겠네요!"
"하하. 힘들 때가 더 많답니다."
나는 민강에게 이것저것 에피소드를 재미나게 들으면서 차까지 다 마셨다. 하백은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에 이 이야기에 낄 수
없었다. 한 식경 정도가 지난 후에, 나는 다시 처소로 돌아와서 자수를 넣기 시작했다. 이 곳에 와서 재미를 들린 게 있다면
자수를 빼먹을 수 없었다.
"운영님, 갈 수록 실력이 좋아지셔요."
옆에서 라해가 말했다. 그에 나는 씨익 웃었다.
"그렇지? 그럴싸 하지?"
"그런데, 이 기이한 글자는 어느 나라 말인가요?"
"아, 이거? 앵글릭이라는 고대어야."
나는 거짓말을 능숙하게 해냈다. 뭐, 반은 맞는 말이었다. 앵글릭은 고대 영어를 이르는 말이었고, 내가 수를 넣고 있는 것은
영어였으니까.
"정말 똑똑하셔요!"
"이것 쯤이야."
수능 준비하는 사람인데, 이 정도는 예사일이지.
"그런데, 글공부에 늦지 않으셨나요?"
"응? 아니, 시간이 많이 남았… 헉!"
나는 이미 약속 시간을 저멀리 넘어간 물시계를 보면서 놀라 실수로 바늘에 손가락이 찔려버렸다. 손가락을 물어서 지혈을 한
나는 계미가 가져온 약을 바르고 천을 묶은 뒤에 재빨리 그의 궁으로 갔다.
"라이!!"
평소 같으면 예쁜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걸어갔겠지만, 시간 약속을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것이 하백인 걸 아는 지라, 급
하게 뛰어갔다. 멀리서 보이는 레이를 보며 나는 손을 흔들었지만,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웃어주지 않았다. 그는 조금 당황한
듯 했다.
"우,운영님?"
"응. 라이. 나 너무 늦어가지고… 그러는…"
쨍그랑-
그 때 처소 안에서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너무 놀라서 문 쪽으로 바로 고개를 돌렸다.
"안에, 누가 있어?"
"…그,그게…"
라이는 식은 땀을 흘리면서 눈알을 이리저리 돌렸다. 곧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 계집은 운영 처자가 아닙니다! 하백님! 그런데도 곁에 두실 생각이십니까? 그들은 명을 어긴 것입니다!"
"어찌됐든 간에 신부가 왔으면 된거지 않는가. '누가'는 상관이 없네. 온 게 중요한거지."
"이건 수궁을 우습게 본 짓입니다. 어떻게 한낱 인간 따위가 수신을 속일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이런 중대한 사안은 강하게
밀어 붙이셔야 하옵니다. 그리고 또 파린님 같은 일이 되풀이…"
"제사장!! 한.낱 제사관이 잔치에서 수녀(水女-반인반어)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건, 그들과는 친족 관계인 저를 모욕하는 일이
아닙니까."
"…하,하백님. 그것이 아니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지 않고, 들을 이유도 없습니다. 일주일 뒤에 서황제(하늘을 주관하는 신)께서 오십니다. 그
때 이 일을 걸고넘어지신다면 수라로 떨어질 각오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나는 손으로 입을 막고 발을 한 발자국 뒤로 했다. 모든 말들을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말들이 오갈 때마다 심장이 터질듯이 뛰
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운영언니가 아니란 걸.
이곳에 온 지 일주일도 더 지났다. 하지만 우리는 식을 올리지 않았다. 내가 조금 더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던 것이다. 나는 뛰어
왔던 길을 다시 뛰어갔다. 터질듯한 심장을 안고. 뒤에서 소리를 지르는 라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책을 꼬옥 쥔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너무 빨리 돌아온 것을 의아하게 여긴 계미는
방을 치우다 말고 물었다.
"벌써 글공부가 끝나신 겁니까?"
"아,아니. 너무 배가 불러서 그냥 중간에 포기하고 왔어."
"네에?"
"계미, 나 목이 타서 그런데 물 좀…."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계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작은 몸뚱이를 이끌고 총총 걸음으로 나갔다. 마음이 답답했다. 솔직히
이렇게 빨리 들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니, 사실 처음 며칠은 들킬까봐 걱정이었지만 모두가 다 나를 '운영언니'처럼
대했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 어제. 어제. 그가 피에 관한 얘기를 했다. 그리고 그는 나의 이름을 묻더니, 슬프게 나를 운영이라고 불렀다. 여태껏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그였다.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겠지…. 물론 내가 그 피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바
닥에 주저 앉아
버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곳에 온 뒤로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굴러가고 있어서─수국에 온지 사흘만에 하백의 신부로 수궁에오고 수궁에 온지 일
주일이 조금 넘은 시간만에 운영이 아니란 걸 들켰다─정신이 없었다. 생각만으로 너무 벅찼다. 그가 나를 운영이라고 부르지
않은 것.
신의 피를 갖지 않았던 파린이 결국은 죽었다는 것. 그리고 나는 피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하백이 나를 감싸주었다는
것. 모든 것이 나를 불안하고 어지럽게 만들었다.
저녁 만찬을 거르겠다고 한 나는 또 다시 정좌를 찾아갔다. 밖에서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백이 이젠 꼬박꼬박 비를 내려
줄 심산인가보다. 조명과 달빛이 없어도 정원은 아름다웠다.
"사람은 절대로 이런 정원을 만들 수 없을거야."
루이 14세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자부했다. 정원을 보다가 좀 기분이 맑아진 나는 하늘을 쳐다보니 다시 하백 생각이 났다.
"지금 여기 있는게 꿈일까, 현실일까."
나는 아직도 그게 구분이 가질 않았다. 호접지몽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현실이라면 정말로 신은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
리고 견우와 직녀는 실존 인물이다. 옛날 사람들이 그냥 만들어낸 장마를 그치게 하기 위한 고사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
다 더 큰 문제는 이게 현실이라면 난 정말 수궁에서 죽는다는 것이다.
"수신보다 천신이 힘이 더 세겠지?"
누구에게 물어본다는 것 없어 자조적이게 말한 나는 곧 들려오는 대답에 소스라치게 놀라야만 했다.
"누가 그러냐."
"헉-"
왜 모두들 내가 혼자 있으면 꼭 이런 식으로 놀라게 만드는 것일까.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킨 나는 오늘은 검은 비단에 은자
수가 새겨진 옷을 입을 하백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조반 때 입었던 옷을 갈아 입었나보다.
"끼니도 거르고 고민했던 게 고작 그것이더냐."
"…제 목숨과 연관된 일이라서요."
"뭐?"
"…."
내가 누워있는 정좌의 끝에 앉은 하백은 조금 놀란 듯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오후 내내 고민했던 것들, 아니, 고민해봤자 소용
없는 것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한숨을 푸욱 쉬었다. 하백을 보니 왜 마음이 놓이는 것인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니까, 신인데… 모를 리가 없잖아요. 내가 제운영이 아니란 거. 글공부 시간에 늦어서 뛰어갔는데, 아까 본의 아니
게 엿듣게 됐어요. 그… 제사관이랑 한 이야기."
"무시해도 된다."
그는 나를 또 감싸주었다. 난 그의 말에 조금 놀라면서 씨익 웃었다.
"하백, 그거 알아요? 내가 생각했던 하백은요. 변덕스럽고, 감정적이고 흰 콧수염이 바닥까지 닿는 노망난 할아버지의 이미지
였어요."
하백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그런데,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본 당신은 정을 쏟는 참 착한 신이었네요. 난 그런 신의 신부가 되니 참으로 행운아인거네
요."
"닥쳐라."
나는 그 발언을 부끄러워서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살짝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는 시선을 발 아래로 내렸다. 버선
이 축축하게 젖었다.
"근데 있잖아요."
정좌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정 중앙에 앉아있는 나와, 그 끝에 앉아있는 하백. 우리 둘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도 멀었다. 물의
신과 정보 사회에서 살다가 갑자기 수국으로 떨어진 인간.
"아주 아주 만약에요."
내가 뜸을 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침묵의 깊이는 깊어졌다. 나는 연지가 다 지워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연못에 내리는 빗줄
기가 점점 세졌다.
"아주 만약에, 내가 당신의 신부가 되지 못하면 그래도 우리 꽤 정답게 지낸 사이인데 그 잠깐 사이의 정을 봐서라도. 부탁 하나
만 들어줄래요?"
"…부탁?"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면 나의 착각일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를 또 한 번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를.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예쁜 목소리로 말했다.
"운영이 사랑하는 사람이랑 일 년에 한 번은 만날 수 있게 해줄래요?"
* * * *
나흘이 지났다. 그 날 이후로 하백은 아주 간간히 보았을 뿐이었다. 식사시간에 본 그의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고, 내가 식사
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글공부를 하러가지 않았다고 나를 찾아오거나 하진 않았다. 계미와 라해는 무심하다고 했지만 나는 충
분히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어쩜 신이란 그 자는 나랑 닮았는지도 모른다. 곧 떠날 사람에게 정을 주어서, 그래서 자기가 상
처를 받기도 싫은 마음. 그건 내가 가장 잘 아는 마음이었다.
나는 '하백의 가짜 신부' 노릇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여신들의 시비에도 꽤나 잘 대응을 했고, 철면피 덕에 어디서 얻어맞거
나 납치당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조금씩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그리고 나는 그것이 누구인지
를 알 수 있었다.
"하백님!! 이,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대정원의 연못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계미와 라해와 함께 방에서 티 파티를 즐기고 있던 우리는 수궁을 들썩이고 있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연못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는 듯, 활짝 웃으면서, 하지만 눈에 한껏 물을 담은
채로 그녀를 맞았다.
"…운영, 왔어요?"
* * * *
"이주연, 일어나! 얼른! 오늘 시험이잖아!!!"
"계미… 조금만 더 잘게."
나는 이불 속으로 머리를 묻으면서 말했다.
"개미? 엄마한테 개미? 이것아! 안 일어나!?"
"…엄마?"
정신이 조금씩 들자 나는 정말로 그게 엄마의 목소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불을 걷어 재치고 눈을 떴다. 눈 앞에 있는
건, 화려한 조개껍질과 폭포가 아니라 낡아빠진 곰인형과 나무책상, 그리고 엄마였다.
"엄마!!!!"
나는 엄마를 꼬옥 끌어안았다.
"어머,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요즘 시무룩- 해가지고 엄마랑 얘기도 안하더니?"
"엄마아아~"
거의 울상이 되어서 엄마를 불렀다. 나를 끌고 화장실에 집어넣은 엄마는 부엌으로 가셨다. 거울을 보았다. 화장실도 변기도,
잠옷을 입고 있는 내 모습도 다 현실이었다.
"그게… 꿈이었구나."
변기통 위에 놓여있는 전자시계를 보니, 7월 7일 6시 30분이었다. 뭐지? 이 붕 떠있는 것 같은 기분은? 아쉬운 느낌이었다. 한
참 동안 거울을 들여다보았던 나는 선반에서 머리끈을 찾아 머리를 묶기 시작했다.
"응? 뭐지?"
머리를 정리해서 묶던 나는 뭔가가 머리에서 걸리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에 엉킨 그걸 힘겹게 빼내어 보니, 내 손에 있는 것은
하백이 준 비녀였다.
"하백- 나랑 끝까지 말 안 할거에요? 마지막 인산데…."
"…."
"…알았어요! 그럼 잘 지내요. 비도 꼬박꼬박 내려 주시구요. 운영이 여기 글자 잘 모르겠다고 그럼 잘 가르쳐 주시고, 물쇼도 자주 해주시고요.
…하백, 내가 말했죠? 나 남자 싫어한다고, 사람을 잘 못 믿는다고. 내가 있지요. 여기와서 그게 없어진 것 같아요. 죽어도 생기지 않던 믿음과
자신감이 생겼어요. (笑) 만날 라해랑 계미한테 세뇌를 당해서 그런지 내가 가끔은 예쁘다는 생각도 들어요. 참. 저는 인연을 안 믿었어요. 예전에
는. 그런데요, 하백. 당신도 그렇고, 할아버지도 그렇고, 라해랑 계미랑, 운영이랑 찬영 오라버니 모두 인연 같아요. 나는요,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에
요. 그렇다고 외계인도 아닌데요. 무튼 이 쪽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컴퓨터란 무시무시한 게 발명된 세계에서 미친 소에 대항하면서 사는 사람이에요.
하루하루가 잿빛 같고 그런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나한테 말을 안 하는 이유를 잘 알아요. 미안해요. 당신을 가지고 놀 생각 같은 건 없었
어요. 그건 정말이에요."
나는 괜히 씩씩한 척 크게 말했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아, 그리고… 내가 쓴 두루마리들 잘 갖고 있어요? 그거 그냥 깃펜으로 쓴거라, 별로 소장가치가 없고 좀 그럴 것 같아서 예전에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수를 놓았어요."
등 뒤에 숨겨 놓았던 작은 쿠션을 꺼냈다. 그 가운데에는 양장과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랑, 신부가 있고 그 가운데에는 이렇게 써져있었다.
'Hottie, ha beak ♥ Cutty Joo yon'. 이게 내 마음. 당신은 영원히 몰라야 할 내 마음.
"…."
그가 말 없이 그걸 받아들었다.
"주연님, 가실 시간입니다."
밖에서 나를 부르는 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 주겠다며, 에스코트를 청했던 그였다.
"음…. 이젠 진짜로 가야 될 시간이 왔나봐요. 식은 보고 가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네요. 아이고, 그건 그렇고 오늘 되게 멋있네~ 하백.
뭐, 원래도 멋있었지만…."
"…."
"하하- 나 혼잣말 되게 잘하네요. 동상하고 얘기하는 것 같아. 뭐, 잘 있어요. 잘 살아요. 안녕히 계세요."
일부러 길게 늘어트려서 말을 했건만 하백은 끝내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방 문고리를 잡았다.
"주연."
"…네?"
그는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운영이 아닌,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상처를 받는다는 건 어쩌면 더 나은 길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일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멈춰있는 사람과 나아가는 사람.
상처는 잊혀지진 않는다. 하지만 새살은 돋아난다. 나도 그걸 너한테 배운 것 같다."
"…."
"그리고… 인연은 잊으라고 있는 건 아닐테지."
툭- 내 손 위로 비녀 하나가 떨어졌다. 내가 이곳에 온 첫 날 했던 비녀였다.
"이게 가장 잘 어울렸다. 너도… 잘 살아라."
하백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먼저 방을 나섰다. 머리에 관을 쓰고 물빛의 너훌거리는 옷을 입은 그는 정말로 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나는 한참 동안 비녀를
꼭 쥐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어."
그 뒤로 정말로 운영과 태을을 일 년에 한 번 운암정에서 만나게 해준다고 했다 한다. 고서에서처럼 오작교가 수놓아지고 그런
모습은 아니었지만, 나는 할아버지께 그 얘기를 듣고 하백의 따뜻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왜 그 세계에 다녀왔는지, 어떻게 다녀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알 수 있는건, 나를 불쌍히 여긴 누군가가 나를
살리기 위해 그곳에 나를 데리고 갔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용기를 얻었다. 비록 이 세상 사람은 아닌 그들이지만, 그들에
게서 용기를 얻었다. 다시 사람을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용기를.
준비를 끝내고 나온 나는 마음이 조금 들떴다.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바람이 솔솔 불었다. 그리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남동생이 신나있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생일이 시험 날이고, 폭우까지 온다는데, 좋냐?"
"뭐, 오늘은 되게 웃긴 비라서 괜찮아."
"웃긴 비?"
"오늘은 견우랑 직녀가 만나는 날이라 하백이 심통났거든."
"뭐어?"
나는 피식 웃었다.
"인연은 잊으라고 있는 건 아닐테지."
내일 다시 사람들을 찾으러 가야겠다. 그리고 그 때 사지 못한 옷을 사러가야지.
「사람과 사람의 인연을 믿지 못하는 것은, 당한 상처가 인연을 거부하려는 것에 있는 것이다. 마음이 다치고 닫혔어도 우리
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 상처가 무뎌진 건지 뭐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정 지나면, 마음이
열리지 않을까. 내가 닫혔다, 걸어 잠궜다 해도 그래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열리지 않을까? 라는. 나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상처를 받았어도, 웃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희망이란 걸 품고 싶기에. 내가 수국으로 간 건 누군가에 의
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My Last Fantasy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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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간만에 판타지 소설로 돌아오 빙수입니당.
이 소설도 제 베프에게 선물해준 소설인데요-
약간 이 주인공의 상황처럼 힘든 상황에 처해있었답니다.
그 때 힘을 내라고 선물을 해줬는데요-
이건 좀 된 소설이에요. 음. 너와 나 다음에 쓴 소설이긴 하지만요^^;
원래 조금 짧았는데, 아주 많이 늘리게 되었다는..
무튼 벌써 9번째네요... 참...ㅋㅋㅋㅋㅋ
제가 여태껏 쓴 것 중에 가장 긴 소설이기도 해요.(나중에 이걸 장편으로 바꿔 볼꺼라는)
수능 77일 남았습니다. 11주..ㅋㅋㅋㅋㅋㅋ 요즘 공부하느라 노래하느라 아주 바쁜데요~
소설 쓰는 게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네요 (장편은 시간 때문에 엄두를 못내구)
아이고
나의 마지막 판타지! (해석을 한다면) 재밌게 보셨나요?
제가 가장 재밌게, 가슴 속으로 쓴 소설인데 여러분들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좋은 하루되세요♡
첫댓글 아, 재밌어라. 하백은 분명 미남일 거에요ㅎㅎ 근데 혹시 공지 어기신건 아닌가... 上中下로 나누는거 금지 안됬나요?
수정했습니다,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재밌어요! 저도 서울목동사는데!
어! 저도 목동사는데!!!ㅎㅎㅎ 왜이렇게 반가운거죠
삭제된 댓글 입니다.
민빈컾님 또 뵙네요! 너무 반가워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에 이렇게 긴 댓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누구나 이렇게 도피를 하고 싶을 때가 있지요. 힘든 상황에서 이 소설을 보셨으면 많이 공감이 가셨을 거 같아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와.....머싰네여~ㅋㅋㅋㅋㅋ단편이지만장편이요 재밌을거같다는! 암튼 소설너무잘보구가네요~ 하백최고
새키님! 와우 제가 나중에 장편으로 쓰면 꼭 봐주세요!!ㅠㅠ!!ㅎㅎ 재밌게 읽으셨다니 저까지 기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흐어엉, 결국 하백과 헤어져버린게 너무 슬프지만. ㅜ..ㅜ 그래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아아!
은월★휼님 감사합니다! 닉네임이 너무 예뻐요^^; 음 이 소설 목적이 원래 판타지적 사랑이 아니라 주인공의 내면적 성숙이어서, 결국엔 헤어지게 했는데요~ 장편에서는 어찌될지 잘모르겠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스토케시아님~ 또 뵙습니다^^ 수정하길 잘했네요.. 이거 수정전에는 엄청 날림이어서ㅋㅋㅋ 다음 작도 지켜봐주세요^^ 감사합니다!!
재밌어요 >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