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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교회의 사자(使者)는 목회자.-1
일곱별은 입곱교회의 목회자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환상을 통한 계시를 보이시면서 주님 옆의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이고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힌 일곱 별은 교회의 사자라고 하시며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자(使者)에게 편지하라고 명령하셨다(계 1:20). 그런데 교회에게 편지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셨다. 사자(使者)라는 것은 성경에서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사람이 보낸 자, 하나님이 보낸 천사(天使), 악한 영(靈)을 의미할 때도 있다 한다. 연결하는 단어에 따라서 이렇게 의미가 달라지는것이 사자인데 여기서의 사자(使者)라고 하신 것은 교회의 대표자인 목회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 있는 사자(使者)라고 하신 것은, 교회의 대표자인 목회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서 하나님의 사자란 뜻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보낸 사자이면 사명(使命)이 있을 것이다. 사자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사명을 잘 감당하면 칭찬과 상급이 있을 것이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면 책망과 징벌이 따를 것이다.
사도 요한을 통하여 소아시아 일곱교회에게 전달한 주님의 멧세지는 주님의 사자로서 일곱교회에 파송된 목회자가 제대로 사명을 감당했는가에 대한 평가이다. 따라서 사명을 잘 감당한 목회자에게는 칭찬과 상급이 있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목회자에게는 책망과 징계가 있다.
소아시아 일곱교회의 모습은 과거 교회의 목회자의 모습이기도 하고 현대 교회의 목회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교인 개개인의 모습이기도 하고 교회 전체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별히 목회자를 지칭하는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는 것은 교회의 흥망성쇠가 목회자에게 달려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목회자의 사명과 역활
교회의 사자인 목회자는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일 뿐아니라 교회안에서 하나님과 교인 사이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또한 교인들의 뜻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중간 역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 주님은 사도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하셨다. 내 양(羊), 즉 주님 자신의 양(羊)을 먹이고 치라하셨다(요 21:15-17). 자신의 피로 값 주고(엡 1:7) 사신 자신의 양을 돌보라고 하셨다(행 20:28). 목자장(牧者長)이신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 양무리를 돌보라고 하셨다(벧전 5:1-4).그러므로 교회의 목회자는 주님의 사자로서 사명을 받았는데 양무리 같은 교인들을 돌보는 목자로서 사명을 받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양이라는 동물은 다른 짐승과 달리 홀로 살지 못하고 무리를 이루어 살며 목자의 돌 봄을 받아야 살 수 있다 한다. 그러므로 양 떼들은 목자의 돌 봄에 따라서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이다. 양들 중에는 산양(山羊)도 있어서 목자 없이 집단 생활을 하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양들은 목자가 돌보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가 없다 한다. 그러므로 양무리들은 그들을 돌보는 목자에 따라서 흥망성쇠가 좌우되는 것이다. 선한 목자를 만나면 양무리들은 번성하고 악한 목자를 만나면 쇠망하게 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들을 양으로, 자신은 목자로 비유하셨다(시 95:7 요 10: 7-16).이에는 여러가지 뜻이 있겠지만 인간의 속성이 양의 속성을 많이 닮았기 때문인 것 같다. 양이라는 동물은 온순하지만 어리석고 연약한 동물이면서 특히 목자의 돌 봄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지는데 이는 인간들의 모습도 마찬 가지임을 알 수 있다. 인간들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지만 생활 모습을 모면 양들 처럼 군중심리에 쉽게 선동되고 멀리 보지 못하는 양들처럼 멀리 볼 줄 모르고 어리석게 행하기 쉽고 육체적으로도 연약하다. 또한 인간역사를 살펴보면 지도자에 따라서 국가의 흥망이 결정되는 것을 흔히 보게 되는데 이는 목자의 선악(善惡)에 따라서 흥망이 결정되는 양무리들의 모습과 너무도 비슷한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러기에 성경에는 인간들의 지도자를 목자(牧者)라고(겔 34:23) 하였고 주님도 자신을 목자로 비유하셨다. 그리고 주님이 자기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돌보라고 사명을 주셨는데 이 사명자가 목회자들인 것이다. 따라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자가 있는 교회는 흥하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자가 있는 교회는 망하는 것이다. 교회의 흥망은 목회자에게 달려있고 따라서 양들인 교인들의 운명도 목회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하나님의 본체(本體)로 계시다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양들 같은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선(善)한 목자로 오셨다(빌 2:6-8, 요 10: 11).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요 1:1-4)으로 계시다가 인간들을 살리려고 사람의 모습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
어찌하여 하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오셨는가?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죄의 빚을 누가 갚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존재도 죄와 저주아래 있기에 (롬 8:19-22 창 3:17) 인간의 죄의 빚을 갚을 존재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죄의 빚이 없는 존재는 하나님 뿐이었다(히 4:14,15).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므로 인간을 위해서 죽으려 해도 죽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육신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는 죽을 수 있는 육신으로 오셔서 피를 흘리고 죽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어찌하여 하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오셨는가?
인간의 죄의 값을 대신 갚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야 하였기 때문이다(히 2:9). 죄와 저주로 인하여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질 인간들을 구원하려면 하나님 자신이 피를 흘려야 하였기 때문이다(마 26:28). 죄의 결말은 영원한 사망으로 불 못에 들어가야 하는데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義)에 이르지 못하는 죄악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피 흘린 구속의 은혜외에는 살릴 길이 없었고 그리고 이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스스로 세우신 공의의 법칙이었다(롬 3:23-26). 그러하기에 하나님이 인간들을 대신하여 죽음으로 죄의 빚을 갚으려고 죽을 수 있는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들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하여 채찍에 맞아 상하였고 찔림을 당하여 피흘리셨다. 우리 인간들의 죄악을 그 몸으로 담당하셨다.(사 53:5,6).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애통(哀痛)의 표현(表現)이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생명을 바쳤는가?
하나님의 생기를 나누어 창조된 인간(창 2:7)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존재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기를 나누어 준 인간을 자신의 자식과 같이 여기셨든 것 같다. 육신은 흙으로 만들었기에 죽으면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하나님의 생기로 이루어진 인간의 영(靈)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지녔으므로 죽지 않는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생기로 이루어진 것이고 하나님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존귀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일부분이요, 하나님의 분신(分身)과도 같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요, 하나님의 분신과도 같으므로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同一視)하시고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신 것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를테면 하나님 자신의 몸에서 분리 되서 나간 것이 인간의 영이 되므로 하나님의 일부분이 되는 것으로 인간으로 말하면 자신의 자녀와 같은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자녀를 사랑하는 근본 이유는 자신의 피와 살을 기초로 이루어진 존재가 자신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분신이고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각별한 애정이 발생하게 된다. 남의 자녀에게 느끼지 못하는 뜨거운 사랑이 친 자녀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인간들이 자식에 대한 어미의 사랑보다도 더욱 극진하심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셨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의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5)"
인간들의 사랑 중에서 가장 극진한 것이 어머니의 자식 사랑인데 개중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외면하는 어미도 간혹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를 사랑하는 어미보다도 더욱 극진하게 인간을 사랑한다고 고백(告白) 하셨다. 나 같이 냄새나고 누추한 무지랭이 인생을 어미가 자식을 잊지않고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 잊지않고 사랑한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생기로 이루어진 인간의 영을, 하나님은 자신의 자식 처럼 사랑하였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마귀의 종이되어 죄악으로 더럽혀져 마귀와 더불어 불 못에 들어가는 비참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마 25:41). 하나님의 애통(哀痛)하심이 여기서 비롯된 것 같다. 젖먹이는 자식을 잊지못하는 어미보다 자신의 분신인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한 불지옥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을 보면서 애통하시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애통의 표현이 자기희생(自己犧生)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애통(哀痛)의 표현(表現)이다.
하나님의 애통하심은 결국 자신이 육신으로 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 까지라도 인간을 구원하게 하셨다. 온 우주(宇宙) 보다 광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자신의 자식처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사 생명을 바치기 까지 하면서 구원하셨다. 그리고 죽은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자신이 영원한 하나님이 되심을 보여 주셨다. 죽지 않는 영원한 존재는 하나님 한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믿는 사람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약속하셨다(요 11: 25).
복음 전파는 교회에게 내린 일차적 사명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復活)하시어 인간구원의 성스런 사역을 마친 하나님은 이 구원의 계획을 모든 세상 사람에게 알리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시고 이 복된 소식을 듣고 믿음을 고백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것이 복음이고 이 것이 교회에 내려준 사명이요, 모든 믿는 자에게 내려준 일차적 사명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을 사랑하여 구원하고자 목숨을 바쳤으니 이 사실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한다는 약속, 이것이 복음이다. 그리고 이복음을 받아드리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우선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다음과 같이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하나님 자신이 피흘려 이루신 인간구원의 기쁜 소식을 모든 세상 사람에게 전하여서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셨다(딤전 2:4). 그러므로 교회의 일차적 사명은 복음 전파에 있는 것이다. 목회자나 일반 교인이나 신앙생활의 최우선 사역은 복음 전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전도에 소홀한채로 교인들의 친목이나 교회 내부 행사에 우선하는 교회나 신자는 일차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것으로 주님 한테 책망과 징계를 받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교회의 예배나 행사, 설교 등이 생명을 살리는 복음 전파를 우선하지 못하고 교회 유지를 위한 신앙 교양 교육이나 교훈에 치우친다면 주님이 명령하신 사명을 감당치 못하는 게으르고 악한 교회가 되어 주님의 책망과 징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마 25:14-30).
주님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이 생명 바쳐 이루신 구원계획을 널리 전하여 되도록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이 사명을 감당하라고 각기 탈란트를 주시고 가셨는데 복음 전파를 위한 사명에 힘쓰지 않고 엉뚱한데 관심을 쏟는 사람은 탈란트를 땅에 파묻은 사람과 다를바 없는 것이다. 주님이 생명 바쳐 이루신 구원계획에 동참하는 것이 복음 전도인데 이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사역이 어디있는가? 교회의 가장 중요한고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사명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복음으로 세상을 살려야 할 사명을 받은 교회가 복음 전파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고 비 본질적인 일에 치중하고 복음 전파에 소홀하다면 주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여러번 비유를 하였지만 복음전도에 소홀한 교인이나 목회자나 교회는, 병을 고치는 책무가 있는 의사가 동료들이나 손님에게 친절하지만 병고치는데 소홀하여 병자를 살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의사가 친절하고 병원 시설이 좋아도 병을 제대로 고치지 못한다면 이런 병원과 의사를 누가 찾아가겠는가?
마찬가지로 복음 전도를 통해서 영혼을 살려야할 책무가 있는 교회나 목회자가 복음 전도와 증거에 소홀하다면 이런 교회나 목회자를 누가 찾아갈 것이며 이런 교회나 목회자에게 주님이 사람을 보내시겠는가? 복음으로 영혼을 살리지 못하는 교회는, 교회의 일차적인 사명도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친목단체로 주님으로 부터 외면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 복음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인데 이를 소홀히하고 복음전도를 악세사리 정도로 여기고 교인들의 신앙향상에만 치중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그러함에도 많은 교회들이 복음 전파를 교회 사역의 최우선 사역으로 세우지 못하고 기존 교인들의 신앙교육에 치중하며 현상유지에 급급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주님이 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책망의 초점은 복음전파에 소홀함에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곱교회의 사자에게 보내신 주님의 책망과 칭찬을 간단하게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주신 말씀
에배소 교회 사자에게 주신 책망과 칭찬은 다음과 같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계 2:1-6)"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는 말씀과 교리가 분명한 목회자로서 교인들에게 교리를 잘 가르쳐 이단과 미혹의 세력을 대적하며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수고와 인내하며 게으르지 않았다고 주님은 칭찬 하셨다. 그당시 각종 이단 세력과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여 그들의 정체를 밝히고 교인들이 미혹에 빠지는 것을 방비하는데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 현대 교회에서 많은 이단 사상들이 침투하여 많은 교인들을 미혹하게 하는데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는 이단들들을 물리치고 교인들을 보호하는 역활을 잘 감당하였다. 이는 오늘 날 많은 교회에서 부족한 것으로 본 받아야 할 모습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님은 책망하기를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신다고 경고 하셨다. 여기서의 촛대는 교회라고 하셨는데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교회를 옮긴다는 뜻이다. 이 교회가 이름만의 교회이지 주님과 상관 없는 인간들의 단체가 될 수도 있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다. 촛대를 성령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는데 교회를 이루시고 이끄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므로 성령이 떠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촛대가 성령님이시든 아니든 성령님이 떠난 교회는 인간들의 단체에 지나지 않으므로 겉으로는 아무리 예수를 믿는 교회라 하여도 주님과는 상관이 없는 거짓 교회가 된다는 무서운 말씀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해석하면 이교회의 목회자에게 직접하신 말씀이므로 이 교회 목회자에게서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교회를 빼았아서 다른 목회자에 준다는 말씀으로도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하였다. 말씀으로 분별하여 이단 세력을 몰아내고 교인들을 잘 가르쳐서 미혹에 빠지지 않게 하였다. 그런데도 무서운 책망을 들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주님께서는"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노라" 하셨다. 이교회의 목회자가 처음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현재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주님 중심으로 사역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목회를 한 것으로 보인다. 말씀과 지식이 있어서 이단을 분별하고 겉으로는 주님을 위한다고 했으나 마음 속으로는 주님을 잊어버리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시종했던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대개의 경우 처음 주님을 만나고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으로 거듭나면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인하여 세상 것이 싫어지고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 좋아지고 경건한 것을 추구하게 된다. 세상 책이나 음악이나 학문이나 쾌락 같은 것이 분토 같이 여겨지고 성경을 가까이하고 찬송만 좋아하게 된다. 교회가는 것도 좋아지고 교회가는 것이 기다려진다. 그리고 가장 표가 나는 것이 주님과 소통하기를 원하게 되므로 기도시간이 늘어나고 또한 주님을 증거하기를 원하게 된다.
주님의 사명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이 현상이 복음 증거인데 이는 사도들이나 일반 교인들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사명자에게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교인들은 누구나 복음 전파에 힘썼다. 그리고 이는 성령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후 사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교인들은 담대하게 복음 전파에 힘썼고(행 2:1-14, 8:1-8, 11:19-21)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뒤 즉시 복음 전파에 나섰다(행 7:18-20).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며 좋아하여 나타난 현상이 세상적인 것을 멀리하고주님과 관계된 교회나 말씀이나 찬송을 가까이 하는 것인데 위에서 살펴 본대로 특별히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 현저하게 나타난 현상이 복음증거이다. 그러므로 사명자로 부름을 받은 목회자가 복음 전파에 소홀하다면 이는 주님과의 사랑을 잊어버린 것으로 겉으로는 경건한 듯이 보여도 내면은 세속화 한 것으로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겉으로는 목회자로서 직분을 감당하지만 내면적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거의 단절된 것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목회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인간적인 지식이나 노력으로 하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이단을 척결하고 말씀으로 교인을 가르치느라고 수고하고 인내하고 열심을 낸다하여도 주님과의 긴밀한 교류가 없이 기도와 복음전도에 소홀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님의 사자(使者)가 무엇인가? 주님으로 부터 복음 전파를 부탁받은 사람이다(고후 5:19 살전 2:4). 주님으로 부터 내 양을 먹이라 한 것은 복음으로 영혼을 살리란 뜻이다. 영이 살아나는 양식은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서도 복음을 전하여야 영혼을 살리고 교회 안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교인들의 영혼이 강건해지고 제대로 성장하며 하나님의 일군으로 서게 되는 것이다.
교회안에서도 계속해서 복음이 선포되어야 교인들의 영혼이 살고 강건해지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는 이단들과의 싸움에 전념하는 것 때문인지 교회 밖에서의 복음전파와 교회 안에서의 복음 선포에 매우 소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된 근원을 살펴보면 주님께 대한 열심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해골 같은 영적 상태가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주님과 첫 사랑을 잃어버린 모습이 되는 것인데 이글을 적어가는 나 자신이나 누구나 이런 함정에 빠지기가 쉬운 것으로 경계해야 한다. 잘못하면 주님이 촛대를 거두어 가게 되면 주님으로 부터 버림 받게 되는 비참한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기도에 힘쓰고 전도에 힘쓰면서 깨끗한 마음과 경건한 믿음으로 나가기를 소망해야 할 것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