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기분좋은 토요일 저녁을 맞았다.
불후를 시청하기 전까지는 고 "이어령" 교수님의 별세 소식에 우울모드였던 까닭에
더더욱 반가웠을지도 모를 일이겠다.
고 이어령 교수님은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애정하는 분이어서 그의 세상 떠남이
그 무엇보다도 애석하기까지 하였으며 큰 어른으로서의 무게감을 다시는 느끼지 못할 것 같아 아쉬웠다.
그분으로 부터 알게 모르게 수많은 영향을 받고 가르침을 받고
세상 보는 눈을 더더욱 탄력적으로 기르게 된 탓에 이즈음의 별세가 아쉽기만 하더라는 말이다.
더더욱 교수님으로 부터 전해받은 나라를 사랑하는 법은 멀리 있지 아니하고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혹은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라를 존중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되었고
그래서 그분이 전하는 책속, 행간의 숨겨진 뜻을 파악해낼 수 있는 능력까지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곁에 계실 것 같았던 큰 어른이자 초대 문화부 장관이요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수로서의 활동을 멈추고
향년 89세로서 우리 시대의 석학이자 최고 지성인의 생을 마감하셨다.
아마도 교수님이 사랑하던 따님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그 마음자락이 길게 버티지 못하셨을 것 같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애도를 하며 이제 그분을 세상 속에서 하늘나라로 보내드린다.......그런 마음의 울적함을 뒤로 하고
이미 예고되었던 불후의 명곡 시간을 기다려 가며 우리 시대 최고의 가객이자 소리꾼이며
명인 타이틀이 무색할 "장사익"님 편을 시청하였다.
역시나 너무 감동이고 감격스러웠다.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골수팬이기도 하고 근래 몇년 전에 만나 뵌 이후로 소식이 없어
그저 망중한의 세월을 지내시는가 하였더니만 병원 신세를 지셨다는 말에 울컥.
첫 화면에 보여지던 얼굴이 세월값까지 더해져 깊게 패인 주름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 이유가 있었다 싶었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거의 삼십여년의 세월이다.
장사익님이 무명이던 시절부터 그의 노래 소리를 듣기위해 쫓아다니고
그로부터 몇년이 지나 조금 유명해졌을 때는 그의 소리와 노래를 알리기 위해
그의 첫 테이프를 엄청나게 사들여 차에 비치해두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의 노래를 듣도록
찔레꽃이 수록된 테이프를 얼마나 내돌렸던지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열정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를 위해 쓰여진 경제적 가치는 이제 문화적 가치로 돌아와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하고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얼마나 칭송하고 애정하는 시점까지 이르렀는지
절로 뿌듯하기도 하고 숱하게 찾아다닌 그의 콘서트 공연 때 마다 앞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던지.
하지만 그 언젠가 안산 공연에서 그의 빛나는 비단 자락같은 옷매무새를 보고 인간적인 실망을 하여
나홀로 삐쳐버린 채 장사익님에게 악수를 청한뒤 아듀를 하였던 기억도 있지만
아마도 서민적이고 소탈하였던 그의 모습을 오래도록 간직하기를 기대하였던 나 자신에게 괜히 화났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가치를 얻게되면 그에 걸맞는 차림새도 가능할 일이라 이해하기로 하고
결국 그의 매력적인 노래에 홀릭당하였던 초심을 잊지 않고 추억하다가
개인적으로 배제하였던 것과는 상관 없이 마음을 바꿔 장사익님을 애정하기는 하였다.
그후로는 전선에 나서지 아니하고 뒷선에서 장사익님을 응원하며 그의 노래를 열심히 듣다가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난 뒤에 지인의 책 출간회에서 다시 만나
그로부터 자필 서예 글씨 "봄"-불후의 봄날의 제목이 된-이 쓰여진 손수건을 받고 울컥하였던 기억도 있으며
그 손수건은 아주 소중히 간직하는 장사익님에 관한 소장품, 일명 굿즈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어쨋거나 그 이후로 간간이 들리는 공연과 소식에는 그저 충분히 기꺼워 하면서 지내다가
사회적 요건으로 근래 들리는 소식이 없어 그저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로 싶다가
불후에서 이렇게 만나지니 더더욱 반갑기가 두배.
아프기는 하셨다지만 여전히 옹골찬 목소리로 무대를 장악하고 그에 걸맞는 그의 밴드와
최백호님과 호형호제인 듯 선배인듯 부모인듯 지내는 모습도 보기에 좋았다.
특히 장사익님은 오픈마인드 소유자 이신지라 후배들과의 교류나 어울림도 좋아하고
아주 까마득한 어린 친구들 일지라도 아주 존중하며 함께 하는 길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다.
정말 열심히 장사익님을 위해 광팬일 시절에는 안성 "래핑스톤", 이름하여 웃는 돌.....
전위무용가 홍신자님의 작업장이자 공연장이었던 그곳에서 장사익님이 공연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남편이랑 찾아들었던 기억 한 켠에는 정말 소탈하게 많은 분들과 얘기를 나누며
너나들이로 찾아든 발길들에게 애정을 담아 노래를 불러주었다는 기억이 선연하다.
그때만 해도 별로 알려지지 않을 때라 알음알음으로 아는 사람들만 찾아들어 그의 노래를 듣곤 하였다.
그러다가 점차로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져 지금에 이르르게 되었으니
흙에 묻혀 살던 그가 가객이 되어 세상의 흙을 정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를 말하자면 또 괴짜 피아니스트 "임동창"을 빼놓고 갈 수 없으나 긴 이야기가 될 터.
어쨋거나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한 그의 노래는 심금을 울리며
시어詩語에 멜로디를 붙여 작곡하는 탁월한 능력도 변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노래를 불러도 자신의 노래로 소화하는 그 능력치는 한국인의 애절함과 맞물려
그에게만 어울리는 노래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대중적 소리의 명인이 있다면 바로 장사익, 그 한 사람이지 아닐까 싶다.
최백호님이 그랬다.
여러명의 최백호는 계속 나올 수 있지만 더이상 두명의 "장사익"은 탄생하지 못한다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그러하다.
더 이상의 장사익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로부터 이어진 소리꾼들도 자신만의 색깔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요즘은 쓸데 없는 기교파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우직하게 불러주는 노래가 더 좋기만 하더라는.
함께 불러준 "소향" 역시 노래는 잘 부른다.
하지만 노래란 지르기만 한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다.
그 전달성이 어디까지 인 것이냐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휘저었는가의 차이지만
암튼 잘부르는 것과 잘한다는 다르다는 말,
그래서 개인적으로 딱 그 시점에 조근조근 의미부여 하며 노래 불러주는 "곽진언"의 목소리가 그립기도 했다.
장사익과 곽진언....어쩐지 강약의 조화가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다.
좌우지간 그렇게 장사익님의 무대를 보면서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는 것....세월값이다.
앞으로 몇년이나 그의 노래 세월을 볼 수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그의 민족적 한이 서린 목소리 만큼은 변함 없기를 바라며 오래도록 건강하게 계시면서
앞으로도 변함없이 장사익님의 둔탁한 그러나 정서적 공감대를 전해줄 보이스를 계속 듣기 원한다.
첫댓글 확실히 라이브로 먼저 만나야 그 진가를 제대로 아는데 싶은게, 아쉽게도 그분 노래 라이브로 들은적 없는지라 tv로만 듣기로는 그리 와 닿지 않더라는...
외려 소향의 노래는 교회에서도 듣고 콘서트에 가서도 들었던지라 그 깊은 영성을 만났던 기억 때문에 쉽게 빠져 들을 수 있더라는...
댓가를 치루고 누렸던 시간의 값은 그 음악의 깊이를 다르게 하곤 하지요.
아마도 취향의 차이일 듯.
장사익 만큼은 웬만한 사람들이
그냥이라도, 알지 못해도 소리를 듣기만 해도 좋아할만큼
매력적이라는 개인적인 생각과 취향.
소향은 어디서든 잘부르는 것은 맞지만
질러대는 고음이 거슬려서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더라는.
요즘은 고음을 불러대는 것이 잘한다고 인식되어 너도나도 고음 찬양이지만
요즘의 내겐 고음이 시끄럽고 피곤하게 들리는 중.
ㅎㅎ 취향이라는 것, 무시 못할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