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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주의와 베르그송의 지속의 시간개념
1. 베르그송 철학과 미래주의의 형성배경
2.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과 미래주의
미술에 있어 시간개념은 현대에 이르러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레싱에 의해 조각이 3차원적 공간예술로 정의된 이래로 크라우스에 따르면 오늘날의 시각예술은 공간성과 함께 시간성의 요소가 더해졌으며 이것을 크라우스는 바로 현대조각의 중요한 특이점으로 보고 있다. 본고는 지난 세기초에 유행했던 사조의 하나로 큐비즘과 다른 사조들과 함께 활동했음에도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 부족하게 평가되었던 미래주의에 관한 소고이다. 시간개념에 대한 끈질긴 고찰과 탐구로 표현해낸 전위양식인 이탈리아의 미래주의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미래주의는 한편으로는 기계의 미학과 속도감, 당시 사회의 커다란 변화인 산업적, 과학적 변이를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의 이념과 철학을 시각적 예술을 통해 실험적으로 표현한 예술활동이다. 이에 미래주의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을 살펴봄으로써 미래주의에서의 시간개념이 어떻게 시각적으로 형상화되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본고에서는 베르그송의 철학의 영향하에 미래주의예술을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의 철학이 당대의 예술 사조에 미쳤던 영향관계도 함께 고찰해보도록 한다.
1. 베르그송 철학과 미래주의 형성 배경
19세기말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사회적으로는 이전의 어느 때보다 물질적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로 산업혁명과 자연과학의 진보가 인류에게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각종 기계(자동차, 비행기, 전등, 전차, 영화, 라디오)와 뢴트겐의 X레이도 이 시기에 발명되었다. 또한, 다윈(1809-1882)의 진화론이 나왔으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1905)이 발표된다.
X레이의 발명은 물체를 내부를 투사하여 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전등의 발명은 빛 사이에 있는 먼지의 존재를 일깨워 주었다. 이들은 가시적 세계에 대한 확대 즉, 우리가 사는 세계가 물질로 가득 차 있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이론과 급속한 사회, 기계문명의 발전에 따라 시간, 속도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시간은 공간화되어 4차원 공간이라는 사고로 종합되고 질량은 에너지와 서로 전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공고히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다윈의 진화론과 더불어 니체의 초인 사상이 강한 자만이 생존할 권리가 있으며 살아 남는다는 이론으로 변형되어 유럽에서의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의 틀을 마련한다. 철학에 있어서는 미국의 실용주의, 독일의 관념철학과 함께 앞서 언급했던 베르그송의 생의 철학이 있었으며 문학에서는 상징주의가 이 시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베르그송의 [생의 철학]은 다윈이 주장했던 기계론적 진화와는 다르게 창조적 진화를 주장하며 그 중요한 방법으로 직관을 택하고 있다. 그리고, 보들레르에서 시작된 상징주의, 말라르메(1842-1898)의 유미철학, 베를레느(1844-1896), 랭보(1854-1891)등의 상징주의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미래주의 선언을 처음 주창한 마리네티 역시 상징파 시인 중하나이다.
한편,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에 비해서는 그 발전 속도가 느렸으며 정치적으로도 혼란한 상태로서 상당히 복잡한 과도기적 과정이었다. 이런 와중에 정치적으로는 이탈리아의 옛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재생(risorsimento)운동이 일어났으며 사회적으로는 급격한 다른 유럽의 변화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회화에 있어서는 세간티니, 레가, 세르네지오, 시뇨리니, 파토리와 조각가인 로소등이 프랑스의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으며 마키아이올리 운동과 분할주의를 전개해 나갔다.(도판 1) 시뇨리니, 파토리, 레가등 마키아이올리 화가들은 대중의 삶에서의 인상을 중요시여겨 실제로 받아들여지는 인상을 포착하여 표현하였다. 그리고 과거의 아카데믹한 전통의 파괴를 강조하여 새로운 이탈리아 예술을 창조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미래주의의 전위적 정신에 영향을 주었다. 즉 상징파 시인 마리네티가 주장했던 미래주의 선언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귀를 발견한다.
“우리는 박물관, 도서관을 파괴할 것이고.. .. 또한 박물관, 도서관, 학술원을 자주 가는 것은 헛된 노력이며 꿈을 십자가에 매달았던 갈보리산이자 용수철이 망가진 금전등록기(같은 것이다)”
프랑스 화가 시냑과 쇠라의 영향을 받은 분할주의는 순수한 색점을 통한 색과 빛을 표현한 것으로 미래주의의 화가인 세베리니, 카라, 보치오니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탈리아 조각가인 로소는 일찌기 자연의 경계를 부정하며 대기와 환경과 대상을 한꺼번에 포착하여 유동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조각적 정신은 미래주의에서도 나타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미래주의는 마키아이올리의 영향을 받으며 과거 전통에 대한 거부와 새로운 미에 대한 욕구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성격은 특히 마리네티 개인이 1909년 프랑스의 피가로지에 발표한 <미래주의 선언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보치오니(Umberto Boccioni 1882-1916), 카라(Carlo Carra 1881년생), 발라(Giacomo Balla 1871년생), 세베리니(Gino Severini 1883년생), 루솔로( Ruigi Russolo 1885-1947)의 5인 화가가 1910년 3월 발표한< 미래주의 회화의 선언문(Manifesto of Futurist Painters)>, 4월 <미래주의 회화의 기술선언문(Manifesto of the Technics of Futurist Painting)>이 마리네티의 표명에 대한 화가들의 적극적 활동의 증표로서 그 뒤를 이었다.(도판2) 이들 미래주의 선언문에서는 과거의 전통과 미적 유산의 파괴와 더불어 새로운 미학으로써 기계와 속도에 대한 찬미를 강조하며 미래주의가 이탈리아의 국가주의에 기반한 ‘투쟁’, ‘전쟁’, ‘용기’, ‘대담성’ 등을 내세운 ‘혁명’적 운동임을 표명한다.
2.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과 미래주의
급격한 사회의 변화와 당시 이탈리아 내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이 미래주의에 주었던 영향과 함께 미래주의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앙리 베르그송 철학과의 긴밀한 관계였다. 당시 열정적으로 유럽에서 받아들여졌던 베르그송의 철학은 이들 미래주의자에 의해 시각적으로 실험되고 표현되었다. 베르그송 철학의 이념은 방법으로서의 직관, 직접적 자료로서의 지속, 잠재적 공존으로서의 기억, 총체적 운동으로서의 생명의 도약 등으로 간추릴 수 있다.
. 등질적 시간과 참된 지속(Duree)적 시간에서의 ‘운동’과 ‘다이나미즘’
베르그송은 시간을 셀 수 있고 등질적인 물질적 시간과 불가분하고 상호침투하는 지속적 개념의 의식적 시간으로 이분화한다.
우리가 시간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면 대개의 경우 우리는 여러 의식 상태들을 공간 속에서 병렬시키게 된다. 그리고 양적으로 구별된 다양성을 형성하기에 이르는 등질적 환경을 만든다. 베르그송의 이론에 따르면 등질적 환경에서 생각된 시간은 순수의식의 영역에 공간의 관념이 침투함으로써 생긴 사생아적 개념이다. 이러한 물질적 시간에 대한 개념은 지성과 자연과학과 관련한 것으로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러한 등질적 시간은 오류(거짓 문제)에 해당한다. 즉, 그렇게 설명될 수 없는 상황을 일부러 인위적으로 설정함으로써 문제제기 자체에 오류를 가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머릿속에서 생각되는 개념과 그것을 편리하게 생각하기 위해 고의로 만든 개념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머릿속 즉, 의식속에서의 생각이란 끊임없이 이어지고 늘 현재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계산하고 설명하기 쉽게 배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머릿속의 시간적 개념을 공간화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때 바로 오류가 생긴다고 보는 것이 베르그송의 주장이다. 베르그송은 의식에 기반한 시간에 따른 개념만을 참으로 보았으며 공간적으로 배열한 후자의 개념은 거짓이자 오류로 본 것이다. 이에 의식에 따른 시간은 항상 연속적이며 진행하는 것이고 무수한 상에 의해 지속(Duree)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대상을 접할 때 일어나는 연상작용을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는 대상을 대할 때 그와 연관한 과거의 개념을 현재로 이끌어들여 연관시켜 생각한다. 의식이란 습관적으로 그러하며 그것은 대상을 대하지 않을 때조차 그러하다. 왜냐하면 대상을 대하지 않고 순수하게 혼자인 순간조차도 우리는 ‘자아’라는 대상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아가 만들어내는 무수한 개념 즉, 연관된 의식들과 우리는 현재의 의식상태에서 매순간 만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이란 지속적이고 이미지가 상호침투되며 기억에 의해 떠올려지는 다양한 질의 의식을 가진다. 그 의식의 연속성은 마치 ‘음악이 흐를때의 멜로디처럼 연이어서 흘러가는 흐름의 형태’이다. 그것은 아마도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서 묘사한 어떤 부분과 일치할지도 모른다. 즉, 마르셀이 마들렌느(과자)를 통해 떠올리는 유년시절의 기억에 해당되는 경험이다. 마르셀은 마들렌느를 먹으며 과거의 시간을 현재에 재경험하는데 베르그송에서의 시간 개념은 이와 유사한 경험을 토대로 하는 듯 하다. 마르셀이 과자를 먹으며 떠올렸던 과거의 인상은 압축된 과거의 기억임과 동시에 현재의 의식이다. 그리고 우리의 시간은 매순간 일어나는 이러한 의식상태의 지속으로 이루어진다.
이에 반해, 의식속에서의 주관적 시간개념을 편리에 의해 공간화한 객관적 시간개념은 물질적이다. 이때의 연속은 각각의 부분들이 상호침투하지 않고 서로 접해있기만 하는 사슬이나 연속된 선의 형태를 띤다. 따라서 지속되는 공간적, 물질적 순간들은 수와 관련되고 이 순간들은 (공간적으로) 셀 수 있게 된다. 세어질 수 있는 순서가 있다는 것은 질적 다양성을 갖는 순수 지속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등질적 시간(=물질적 시간, 공간화된 시간)을 표현한 것으로 영화의 연속적 모션, 연속적 동작을 찍은 머이브릿지나 머레이의 사진(도판3) 그리고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Nude Descnding a Staircase>(도판4)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작업은 운동을 직관에 의해 주관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물의 운동을 나란히 배열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그 정태적인 모습만을 서로 접하게 한 것에 불과하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것은 죽은 시간이며 살아 있는 동적인 시간은 아니다. 입체파의 그림 역시 이 물리적(=등질적) 시간개념에 해당 될 것이다. 입체파인 피카소의 그림에서는 대상에 대한 관찰을 통해 대상을 파악하고 표현하는데 있어 정적으로 고정된 형상을 단편적으로 조합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이에 그림에서 베르그송이 강조하는 생기는 사라지게 되고 오직 사물의 죽은 면들이 파편화되어 한 화면에 불규칙하게 나열된다. 뒤샹의 그림<계단을 내려오는 나부>가 규칙적으로 형상을 배열하였다면 피카소는 불규칙하게 파편화된 단편을 모음으로서(collage) 화면을 구성해 나갔다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입체파 그림에 대해 미래주의 화가인 보치오니는 ‘죽은 그림’이라는 비난을 하였다고 한다.
다른 한 편으로 등질적 시간과는 다른 우리 의식 내부의 주관적 시간은 순간 순간 다른 체험의 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시에 하나의 선율처럼 연속해서 흐르고 있다. 우리가 실제로 느끼고 살아가는 시간은 구체적인 지속적 배열로는 계산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순수지속의 시간성은 고유의 질과 우리가 살아온 과거가 전체적으로 리듬있게 침투되어 있기 때문에 분명한 윤곽 없이 서로가 서로에 의해 상호 융합되고 상호침투하는 질적인 변화들의 연속이다. 그것을 순수다질성이라고 하며 엄격히 말해 우리에게 시간 일반(객관적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우리 각자의 지속(주관적 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즉, 자아의 지속을 이루는 의식의 여러 상태는 기억의 다질성, 이미지의 불가분성, 상호침투성, 상호내재성을 특징으로 하는 다양한 질의 의식이다. 이러한 개념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미래주의 예술로서 미래주의는 베르그송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시각화하고 있다.
발라의 <발코니위를 뛰어가는 소녀Girl Running on a Balcony>(도판5-14)는 뒤샹의 그림과는 다르게 운동을 분할되고 연속된 점으로서 ‘무한히 중복되고 확장된 것으로’ 표현한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는 단순히 운동을 반복적으로 배열하여 시네마토 그라피처럼 차갑게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그 운동의 연속성을 경험할 수 없는 반면에 발라는 그 운동의 내부적 속성을 점으로 파악하여 분할주의적 방법에 의해 다이나믹하게 표현한 것이다. 즉, 운동 속에 내재한 에너지와 의식을 상호 침투하는 무수히 작은 점으로 분석하며, 지속의 개념으로서의 시간성을 의식의 내부로부터 포착해낸 것이다. 이로써 운동의 연속성을 보는 이가 동시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표현하고 있다. 그림에서는 연속되는 동작의 병렬에 의해 뛰어가는 소녀의 운동이 다이나믹하게 묘사된다. 여기에서 운동(motion)이란 미래주의자들이 애호하던 개념으로 미래주의자들은 움직이는 사물의 운동(motion)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 그림에서는 인체의 운동을 주제로 하지만, 미래주의자들의 주된 관심은 도시에서의 운동감이었다. 이를테면, 당시 큰 변혁이었던 기계적 산물의 운동감이 그 예가 된다. 자동차의 운동감, 달리는 기차의 운동감, 빠른 도시의 일상에서의 운동감등 미래주의자들은 이러한 모션에 대한 관심을 적절히 표현하기 위해 다이나미즘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즉, 다이나미즘은 미래주의가 베르그송의 지속적 내면의 흐름을 나타내는데 있어서의 매개이자 미래주의자의 관심사인 기계, 속도, 도시 등의 주제를 속도감있고 본질적으로 나타내는데 유용한 방법이었다. 미래주의자들은 다이나미즘을 통해 작품에 생기와 연속적 운동감, 역동적 흐름을 연출하도록 하였으며, 현대기계문명에 관심을 두었던 미래주의자들의 주된 정서였다.
발라의 <발코니위를 뛰어가는 소녀Girl Running on a Balcony>(1912)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1912)는 말레비치의 <칼을 가는 사람(The Ginder)>(1912)(도판15)과도 비교된다. 뒤샹은 미래주의가 혐오했던 여성 나부를 일부러 소재로 이용함으로써 미래주의를 의식하되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였던 흔적을 보여준다. 후에 뒤샹의 작업은 기계에 대한 소재 탐구, 연속적 움직임에 대한 오르피즘적 작업등으로 이어짐으로써 미래주의와의 연관을 상기시킨다. 뒤샹 자신은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에 대해 ‘그것은 정확한 의미에서 그림이 아니’며 ‘기계를 조립할 경우 그렇게 하듯이 기하학과 수학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언급하는데 이것은 그의 그림이 베르그송의 이론에서 과학적, 물질적, 등질적 시간을 시각화한 것임을 보여준다.
. 지속이 나타나는 미적 방식 : 이마쥬(Image)와 리듬
베르그송의 지속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즉, [의식의 직접적 자료에 관한 시론]에서는 연속적 다양성을 지니는 내면적 지속을 중심으로, [물질과 기억]에서는 이마쥬들이 공존하는 기억으로서의 지속을 중심으로 한다. 그리고 이후의 저작들 - [물질과 기억],[창조적 진화],[지속과 동시성]에서는 각기 리듬을 지니는 여러 지속들을 중심으로 설명되고 있다. 여기에서 이마쥬는 지속의 횡단면이고 리듬은 지속의 종적 측면으로서 이해될 수 있겠다. 베르그송에게 있어 순수지속은 “질의 다양성, 진행의 연속성, 방향의 단일성”을 지닌다. 그리고 내적인, 연속의, 융합의, 유기체의, 다질성의, 질적 분별의 수로 환원될 수 없는 잠재적이고 연속적인 다양성이다. 즉, 이러한 연속적 다양성은 의식 상태의 다양성으로서 “분명한 윤곽없이, 서로가 서로에 의해 외재화되는 어떤 경향도 없이, 수와의 어떤 유사성도 없이 섞이고 상호침투하는, 질적인 변화들의 계속이자 순수한 다질성이다. 그리고, 그 각각이 전체를 표상하는 요소들의 상호침투이자 연대성이고 긴밀한 조직화”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앞서 언급했듯이 이들 개념은 과거의 기억이 현재화되는 경험에 기초한다. 자아의 내부에서 과거란 지나간 것이고 늘 현재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 지속되는 현재 속에서는 과거의 의식이 필연적으로 이미지를 통해 침투하게 되는데 이로써 의식은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질을 갖게 된다. 이러한 다양한 질의 의식은 항상 지속(=연속)되며 현재를 이끄는 동시에 미래로 나아가게 된다.
이에 베르그송은 이러한 연속적 다양성으로서의 순수한 지속을 멜로디에 비유하고 있다. 그는 참된 지속을 구성하는 불가분적 변화의 연속성을 가장 순수한 계속의 인상을 주는 멜로디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참된 지속이란 자아의 내적 의식의 지속을 일컫는다. 이 내적 의식이란 과거의 기억과 통합되며 상호 불가분성을 갖고 끊임없이 지속하여 현재의 의식이 된다. 이에 [물질과 기억]에서 베르그송은 순수 회상(과거의 기억이 현재의식과 융합), 회상-이마쥬(과거의 기억과 현재의식의 융합이 이마쥬로서 나타남)를 사실상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지각은 결코 정신과 현재의 대상과의 단순한 접촉이 아니다. 지각에는 그것을 해석하면서 완성시키는 회상-이마쥬가 전적으로 배어있다. 이마쥬-회상은 자신이 물질화하기 시작하는 순수 회상의 성질을 지니면서... 순수회상은 이것을 드러내는 컬러풀하고 생기가 감도는 이마쥬 안에서만 정상적으로 표명된다.. 즉, 기억은 이마쥬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지각된 이마쥬들은 ‘기억 안에 잠재적으로 존속’되며, 회상-이마쥬로서 현재의 지각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이마쥬와 리듬(멜로디)에 관한 감성은 미래주의 회화에서 역시 주된 감성이자 방법으로 작용한다. 작곡가이기도 했던 루솔로의 <음악>(1911-12)(도판16)은 가운데 하단에 위치한 어두운 인물로부터 흘러나오는 음악적 선율이 문자 그대로 리드미컬한 선으로 표현된다. 그 인물의 뒤로 밝은 면들의 빛이 단계적으로 동심원 방향으로 중심에서 바깥으로 퍼져 나가며 그 밝은 빛은 점점 어두운 색조인 초록으로 변한다. 이 그림에서는 미래주의자들이 테크니컬 선언서에서 외쳤듯이 ‘보색에 대한 강조’가 이루어지는데 동심원을 둘러싼 배경의 중심에서 밖으로 여러 이미지들의 얼굴이 보색 대비를 이루며 방사되어 흘러 나가고 있다. 지속적 의식의 직관적 대상인 ‘이마쥬’는 붉은색의 얼굴로 표현되어 각각의 시간의 단면처럼 흩어지고 그 흐름을 주도하는 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언급했던 ‘리듬’의 선과 표현이다.
이마쥬에 대한 응용은 루솔로의 <밤의 기억Memories of Night>(도판17)에서 주된 정조가 된다. 여기에서도 중첩된 인물의 연속적 표현과 함께 밤의 이미지들-붉은 톤의 사람들 얼굴, 말, 여자의 얼굴-이 나타난다. 시간의 지속적인 흐름인 리듬에 의해 이미지들은 분산되고 특히 빛에 대한 표현은 주목할 만 하다. 루솔로의 빛은 연속적으로 분할되며 퍼져나가는 밝은 톤과 어두운 톤의 대조에 의해 드러난다.
빛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서 발라의 <가로등Street Lamp>(도판18)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서 빛은 분자화된 에너지의 형태로 나타난다. 화면의 중앙으로부터 방사되는 강력한 빛은 캔버스의 밖으로 방사되며 베르그송의 순수지속이자 직관의 파악으로 인해 그 에너지의 진동, 율동, 파동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발라는 낱낱의 빛이 속도감 있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에 퍼져 나가는 모습을 작품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빛은 ‘구형으로 팽창하는’ ‘색채의 진동, 즉 모션’으로 표현된다. 작가가 느낀 빛에 대한 감동을 관람자에게 전하기 위해 색채의 대비, 리드미컬하고 반복적이며 연속적인 붓놀림등으로 빛의 표현을 무수히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신의 감동을 전등의 감동으로 감정 이입시켜 표현’한 발라의 작품은 다른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빛에 대한 분석과는 상대적으로 그 빛을 에너지이자 속도감이 있는 질량의 일종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이는 발라가 프랑스 인상주의라기 보다는 이태리 분할주의자들인 ‘마키아이올리’ 그룹과 ‘롬바르디아’ 그룹의 영향을 받았음을 증명해 준다. 빛과 색채에 대한 발라의 탐구는 1912년 <무지개빛의 상호침투 no 1>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은 지속하는 시간속에서의 상호침투하고 융합되고 동시화하는 면들처럼 빛 역시 그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 지속과 기억으로서의 시간성
기억 없는 의식, 즉 지나가버린 순간의 기억을 현재의 느낌에 첨가하지 않는 상태의 연속이란 없다. 바로 이것이 지속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내적 지속이란 곧 과거를 현재에로 연장시켜주는 기억의 연속적인 삶이다. 따라서 현재는 끊임없이 커가는 과거의 이미지를 뚜렷하게 포함하고 있거나, 아니면 오히려 우리가 끌고 가는 짐이 우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더 무거워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이렇게 현재 속에 과거가 존속하지 않는다면, 지속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순간성만이 있을 것이다. .. 의식적인 존재에게 뒤따르는 순간은 언제나 선행하는 순간을 넘어서 그 선행하는 순간이 남겨놓고 간 기억을 포함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기억이 수반되지 않은 의식이란 있을 수 없으며 동시에 기억이 연속적으로 침투하지 않은 현재의 의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한 계기의 수축으로서의 기억은 과거의 것이 지속적으로 현재로 이어지면서 수축되거나 응축하여 아직 사라지지 않은 현재가 이어지도록 만든다. 따라서 감각은 기억이 응축되어 현재에 동시적으로 표현되며 그 동시성에 의해 미래로 이어지게 된다. 끊임없는 시간속에서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 맞물려 이어지게 되는 의식의 내부에는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의 순간속에는 다양한 질의 과거가 상호침투적으로 그리고 불가분해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우리의 모든 과거는 그것이 그려내는 모든 수준들 위에서 상연되고 한꺼번에 다시 시작되고 동시에 반복되며 현재로 도약한다. 현재는 바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 과거로 도약하게 된다. 과거는 그것이 있던 현재를 뒤잇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공존하며 각각의 현재가 되는 것이다. 현재는 통합된 채로 수축과 이완의 다양한 수준들에 있는 과거 전체이다.
이러한 시간에서의 지속과 기억의 개념이 미래주의 회화에서 실험되고 있음을 뚜렷하게 살펴볼 수 있다. 카라의 <무정부주의자 갈리의 장례식>(1911)(도판20)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성이 화면에 어떻게 동시에 포착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예이다. 카라는 자신이 직접 참석했던 데모에서 살해당한 무정부주의자 갈리의 장례식에 대한 경험을 화면에 표현하고 있다. 당시 장례식은 공동묘지 앞의 광장에서 열렸고 갈리의 동료인 무정부주의자들의 시위대와 경찰과의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카라는 붉은 톤을 화면의 중앙으로부터 왼쪽 화면의 밖에까지 넓게 표현함으로써 당시의 격렬한 저항과 장례식의 슬픔에 대한 의식적 변화를 붉은색의 색채로 나타내고 있다. 색채와 함께 사선으로 그어진 붓질과 인물들의 요동치는 동작은 반복되고 중첩됨으로써 사람들의 기억과 의식을 화면에 채우고 있다. 여기에서 기억이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까지 포함하는 지속적인 시간의 집적이다. 그리고 그 행동의 지속적인 운동감을 속도감있고 다이나믹하게 한 화면에 동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화면의 오른쪽 윗부분은 색채의 다양한 측면이 거의 추상화의 한 면처럼 어우러져 화면과 대기를 채우고 있다. 그것은 다양한 질을 내포한 의식의 흐름에 기반한 ‘마음의 상태’에 대한 은유인 듯 하다. 겹쳐진 그림자와 지속적으로 이어진 동작의 연속성은 그림의 등장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처럼 격렬하고 다이나믹하다. 카라는 다이나믹한 소동 상태를 화면에 그려 넣는데, 관람객 역시 그림 안에서 등장인물(시위대)의 ‘마음의 상태’를 동시에 경험하며 체험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서 직관을 실행하고자 한다.
.직관과 힘의 선
직관이란 베르그송 철학의 주된 테마이자 철학적 성과를 이루어 내는 방법이다. 베르그송은 대상을 인식하는데 두 가지 방법으로 나누는데 하나는 사물의 주위를 맴도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사물의 내부에 들어가는 것이다. 전자는 상대적 지식에 도달하는 것으로 분석이라 하고, 후자는 가능한 절대에 도달하려는 인식으로 직관이라고 한다. 직관이란 사물의 내부에 들어가 스스로 그 대상이 되어 그 대상을 내감해야만 하는 방법이다. 물질에 대한 직관은 의식의 투사로 의식을 통해 사물을 내부로부터 인식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우리 자신의 자아와 공감하는 것이야말로 직관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지속하는 실재의 참모습을 인식하는 것이 직관이며 여기에서 “지속이란 우리 자아가 현재의 상태와 이전의 상태의 사이에 구분을 지으려 할 때에 의식상태의 계속이 보이는 형태이다.” 이러한 직관을 표현하는 미래주의자의 방법이 힘의 선이다. 베르그송을 따르는 미래주의자는 운동을 대상내의 직관에 의해 지각하는 절대적 운동과 외부의 시각적 감지인 상대적 운동으로 구분한다. 절대적 운동은 다이나믹한 법칙에 의해 표현되며 상대적 운동은 대상의 운동과 운동의 추이속에서 다른 대상 혹은 환경과 리듬감 있게 융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적 운동과 상대적 운동을 결합한 미래주의의 다이나미즘의 법칙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해 낸 방법이 힘의 선(Linee Forze)이다. 미래주의자들은 ‘인물을 그릴 때 문자그대로 그리지 않고 그 인물의 주변분위기의 전체로 표현한다.’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모든 사물은 보편적인 진동의 지속적인 상징들’이 된다. 따라서 사물로부터 인식되는 다양한 질의 ‘마음의 상태’를 다이나믹한 감성으로 조형적으로 표현하고 그 상호침투성, 역동성, 힘, 생명을 강조하기 위해 강력한 방향성을 지닌 ‘힘의 선’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힘의 선’이란 작가의 직관에 의해 파악된 감성을 관객들에게 동시에 직접 체험하여 작품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도록 하는 매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힘의 선’을 통해 미래주의자는 조형적 감수성에 있어 관객과 화가, 대상의 삼자의 일체를 이끌도록 하는 것이다. 보치오니의 <축구선수의 역동성>(1913)은 이러한 ‘힘의 선’이 극대화되어 표현된 예이다.(도판22) 이 작품은 대상의 운동감을 분자의 핵이 화면에 폭발하고 있는 듯이 강렬하고 역동적으로 구사한 것이다. 푸른색과 붉은색, 어두움과 밝은 빛이 다이나믹하게 충돌하고 상호침투하며 융합하여 엉겨 있는 이 작품은 축구 선수라는 대상에 대한 형태 표현이 아닌 그 내부로부터의 운동감과 지속적인 시간의 흐름에 실려있는 인물의 역동성, 팽팽한 긴장과 활기, 속도감을 거의 추상에 가깝게 그려내고 있다. 작품의 중앙 집중적 구도는 대상의 현재, 과거의 상태와 절대적 자아, 상대적 세계가 서로 침투하고 융합되게 파악하도록 한다. 동시에 화면의 중앙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여러 방향의 강력한 힘의 선들은 폭발적으로 분출해내는 에너지를 묘사하고 있다. 보치오니의 작품은 일년후에 제작된 마르크의 거의 유일한 추상작품인 <적과 흑의 추상형태들>(1914) 또는 일명 <싸우는 형태들>에 영향을 준 듯하다.(도판23)
마르크의 작품은 검은색과 붉은색 그리고 그 보다 밝은 색을 충돌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에너지에 대한 추상적 표현이다. 마르크는 그의 제작방식에 관해 [우리는 자연을 분해하여 그것을 우리의 의지에 따라 재구상한다. 우리의 물질을 관통해 꿰뚫어보려는 정밀한 노력은 결국 그것이 공기에 부유하듯 가볍게 질량을 가로질러 진동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느 신비주의자도 이러한 현대적 사고의 완전한 추상, 물질을 꿰뚫어보는 비전에는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고 언급한다. 이에 미래주의의 힘의 선이 마르크의 방식으로 수용되었을 뿐 아니라 베르그송의 철학에 대한 마르크의 지식 역시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보치오니의 <도시의 폭동The City Rise>에서 역시 힘의 선을 통한 다이나미즘이 그림을 활기있고 생기있게 해주는 주된 방법으로 이용된다.(도판24) 미래주의자들에게 있어서의 주된 주제가 되었던 도시를 배경으로 도시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는 화면 중앙으로부터 밖으로 힘차고 다이나믹하게 흘러나오는 에너지의 방향성과 소용돌이치듯 화면을 구성하였다. 도시에서의 빠른 시간과 인물들의 바쁘고 열정적인 의식 상태, 그 의식들이 지속되면서 공간을 가득 채우는 지속의 기억으로서의 도시 리얼리티를 표현함으로써 이 작품은 미래주의자들의 주된 목표를 완성해나가고 있다.
.물질의 지속과 조각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에서 물질을 견고한 입자가 아닌 흐름으로 보고 있다. 그 흐름은 일초에도 몇 조 번이나 진동하는 끊임없는 변화로 이루어져 있어서 사실상 우리의 감각질도 그러한 진동의 수축된 양에 불과한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물질적 대상은 주위 환경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성질은 전체 우주와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물질의 모든 부분들은 서로 상호작용한다. 분자라고 상정된 물질적 요소들 간에도 인력과 반발력이 있으며, 혹성 간의 공간을 통해서도 중력의 영향이라는 것이 있다. 패러데이에 의하면 원자는 힘의 중심으로서 중력이 전개되는 전체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상호침투한다. 또 톰슨에 의하면 완전하고 연속적이며 등질적이고 압축할 수 없는 하나의 완전한 흐름이 세계를 채우고 있으며 원자는 이 속에서 회전하는 불변적인 고리형태에다. 이러한 가설에 따르면 물질의 궁극적 요소로 접근함에 따라서 우리의 지각이 표면적으로 설정한 불연속성이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주는 상호침투하는 것으로서 분할되지 않는 전체를 형성한다. 이에 독립된 객관적 대상이란 있을 수 없으며 전체와의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에서만 이해 될 수 있다.
베르그송은 우리의 의식적 지각과 지성의 공간적 사유가 우리가 보듯 물질적 공간안에서 사물을 독립된 윤곽을 가진 물체들로 자르고 부동화 시킨다고 말한다. 즉, “물체는 지각에 의해 자연이라는 천에서 잘라내진 것으로, 지각이란 가위는 행동이 지나게 될 선들을 나타내는 점선을 뒤따라간다” 사물, 물질과 환경, 공간을 전체적 흐름으로 보는 이러한 사유는 독특하게도 이탈리아의 조각가 로소에게서 이미 관찰되어진다. 다음은 로소의 언급이다.
“자연에는 경계가 없고 예술작품이란 것도 없다. 그것은 물체를 둘러싼 주위의 대기에 의해 포획되어져야 하며, 색채는 그것을 생기 있게 한다. 원근법은 그것을 한 위치에 고정시킨다. 내가 초상화를 그릴 때 나는 스스로 머리의 선에 제한시킬 수 없었다. 왜냐하면 머리는 몸에 속해 있었고 그것에 영향을 주는 환경속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억제할 수 없는 존재의 한 부분이다”
1882년에 발표된 작품 <가로등 아래에서의 입맞춤>(도판25)에서 가로등 아래의 인물의 두 형태는 윤곽선을 잃고 서로 포개어져 있어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 시간과 공간속에서의 동일한 실체로 간주하도록 만든다. 1893년의 <정원에서의 대화>(도판26)는 이러한 점이 더욱 심화되어 인물들은 대기에 혼합되어 윤곽선이 없이 자연과 동일시되며 주조된 진흙의 물질감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물과 인물들의 대화를 실재적으로 흐르는 것으로 만든다. 여기에서 물질적 대상은 환경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상호 침투하고 융합되며 객체의 절대적 시간과 물질적 공간의 상대적 시간은 서로 흘러들어 전체로 통합되는 것으로 표현된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앉아있는 소파를 관통하며 소파는 우리를 관통한다. 지나가는 버스는 거리의 집으로 달려들어간다.’는 미래주의 테크니컬 선언의 일부처럼 로소의 작품이 발표된 약 20년 후에 보치오니는 베르그송의 철학을 기초로 회화에서의 실험정신을 조각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공간에서의 병의 전개>(1912-13)(도판27)는 병과 테이블, 집 블록 등 정태적인 물질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보치오니는 ‘상대적 움직임과 절대적 움직임이라는 범주’에서 대상의 내부를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흐르는 의식의 유동성에 따라 작품의 내부를 소용돌이치는 듯한 형태로 외현화하고 있다. 즉, 병의 중앙을 통해 관통되는 의식을 외부의 사물과 대기로까지 확장시켜 투사한 것이다. 이는 대상의 시간성과 물질성에 대한 보치오니의 탐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등질적 공간에서의 물질성을 흐르는 시간속에서 탐구한 작품이다. 따라서, 접시와 집 블록은 병 안으로 침투되었으며 각 객체와 물질적 공간은 서로 상호침투하여 엉겨 있는 상태로 표현된다. 다시 말해, ‘물질적 대상은 환경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상호 침투하고 융합되며 객체의 절대적 시간과 물질적 공간의 상대적 시간은 서로 흘러들어 전체로 통합되는 것’이다.
보치오니의 실험은 정태적인 사물뿐 아니라 운동하는 인체에로까지 확장된다. 보치오니의 <반(反)품위(작가의 어머니)>(1912)(도판29)는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상과 화가, 관객의 ‘마음의 상태’가 삼자 일치되도록 인물을 내부로부터 파악한 것이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소용돌이치듯 포착되어지는 시각의 인지를 따라 인물의 얼굴 표면도 소용돌이치는 파도처럼 일정하지 않다. 인물의 얼굴은 인물 주위의 사물, 대기와 융합되어 심하게는 머리에 사물이 꽂혀있는 듯한 형태로 환경과 인물이 상호침투하여 통합되도록 심화된다. 그의 이러한 실험적 태도는 <머리와 창문의 혼합>(1912)(도판30)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동일하게 머리의 주제를 다룬 피카소의 작품(도판31)은 상대적으로 인물의 표정이 경직되고 태도는 정적이다. 삼차원적 공간에서의 인물의 표현을 다루었지만 분석적이며 고정적인 전통적 시각을 피카소는 그대로 취하고 있는 듯 하다. 피카소의 머리는 분석화된 3차원의 분할된 인물의 파편을 일정하지 않게 한 인물에 다시(多視)점으로 정적으로 재배치하고 있다.
보치오니가 인물을 구성한 시지각의 직관에 의한 절대적 인지는 가보의 <구축된 머리>에서 유사하게 응용되고 있음을 관찰해 볼 수 있다.(도판33) 보치오니의 작품과 형태적 유사를 넘어서 시지각의 절대성에 의존하고 있는 듯한 가보의 <구축된 머리>(1915)는 내부의 골격을 의식적으로 외현화함으로써 ‘얼굴과 두개골의 구조를 드러내는 교차면들을 돌출시키고 있다.’ 신체의 내부 구조를 투명하게 외부로 드러내는 가보의 머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유동성의 운동감을 나타낸다기보다는 그러한 지속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면들의 구조를 파악하여 통합시키고 있다.
이어서 행해지는 보치오니의 다른 작품<공간속의 연속적인 특이한 형태>(도판36)는 얼굴이 아니라 신체 전체로 운동감을 확대하여 표현하고자 한 작품으로 로댕의 <걸어가는 사람>(도판37)에서 착상한 듯 보인다. 로댕의 ‘걸어가는 사람’은 이쪽 공간과 저쪽 공간 사이를 통과해 가는 진보의 한 순간의 인체를 형상화 한 것이다. 잘려나간 팔의 상체에서 시간의 추이에 따른 조각가의 표현이 매끄럽지 못한 신체표면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에서 시간과 시간이 흘러가는 그 순간적인 운동감이란 한쪽을 내뻗은 채 팽창된 다리의 근육에서 유일하게 포착될 수 있다. 그나마 오른쪽 다리의 약간 들려진 듯한 느낌은 조각의 지지대에 견고히 고정된 발 때문에 운동감이 감소되고 있다.
보치오니가 실험한 일련의 작품은 시간의 추이에 따른 인물의 운동감을 주제화한 것이다. 깃발처럼 펄럭이는 양쪽 다리 아래에서부터 신체 전체에 걸쳐 있는 뾰족 튀어나온 면들은 운동감과 에너지의 은유인 듯 하다. 움직이는 근육을 표상화한 절단되며 연속적인 단순화된 신체의 면들, 고정된 신체의 윤곽을 부정하는 조각에서의 일정하지 않은 표면의 흐름 등은 움직이는 인물의 신체를 내부적으로 포착한 보치오니의 조각에서의 실험 결과일 것이다. 보치오니의 조각적 선의 단순화는 베르그송이 주장한 ‘직관은 단순한 행동을 통해 실천된다’는 구절을 행동으로 표상한 것인 듯 하다. 신체의 움직임과 더불어 신체가 지나가는 대기 역시 조각에서는 (로소와 마찬가지로) 물질화하여 신체의 여러 측면이 부가되거나 떨어져 나감으로써 나타난다. 보치오니는 조각에서 역시 흐르는 시간과 물질적 대기의 상호침투와 융합, 시간의 흐름에 따른 빠른 속도감, 역동적인 인물의 내부적 에너지를 물질적인 ‘힘의선’으로 동시에 표상화 하고 있다. 보치오니의 이러한 전위적 실험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발라의 <Boccioni's First>(1915)(도판)는 미래주의에서 강조된 힘의 선을 시각화한 듯한 느낌으로 보치오니 작품 시도에 대한 발라의 느낌의 조각적 구축으로 보인다. 보치오니에게 있어서 조각의 핵심은 ‘현대적 삶의 외적인 면들을 재생산하되 내적인 지속에서 나오는 시각, 선들과 덩어리들의 개념 안에서 표현해야 한다’고 한 것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전통적인 대리석과 청동상에 대한 위엄을 파괴하고 전체 조각의 구축에 있어서 단일 물질의 독점적 사용을 거부하였다. 조각적 운동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심지어 스무 종류의 다른 물질이 한 예술품에 사용될 수도 있다고 봄으로써 그는 과거 조각과의 결별을 확실하게 고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는 유리, 나무, 철, 시멘트, 머리카락, 가죽, 옷, 거울에 전등까지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의 모든 작품은 하나 이상의 재료로 사용되어진 것이다.
1914년 보치오니가 미래주의 이념에 대한 저술을 마지막으로 발표한 이래로 전쟁에 의해 그룹은 해체되었으며 그룹의 동력이었던 보치오니가 1916년 사고로 사망함으로써 이후 미래주의 그룹은 재건되지 못했다. 세베리니는 일시적으로 입체파로 전향했고, 카라는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그림의 영향 아래 들어갔으며 발라는 아카데믹한 리얼리즘으로 전향했고 최초의 미래주의 작곡가였던 루솔로 역시 그림에는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주의는 전통을 부정하며 짧은 시기에 활발히 일어난 운동으로서 다른 사조들과는 다르게 그 명칭에서부터 예술가들 자신이 직접 부여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운동의 자발성과 활동의 전위적 성격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미래주의는 당대의 대표적 철학이었던 베르그송 이론에 기반한 것으로서 그 철학을 시각적으로 시도하고자 부단히 노력한 실험정신이기도 하다. 지속으로서의 시간과 절대적 의식인 직관에 기초한 베르그송의 철학을 표현하는데 운동감, 다이나미즘의 법칙, 힘의 선, 색채와 빛의 분할 등을 그 방법으로 하였다. 또한 미래주의가 경도되었던 당시 사회의 변화, 기계문명, 도시에 대한 정서를 표현하는데 역시 그러한 방법은 적절했다. 베르그송의 철학이 직관에 의해 과학적, 물질적 세계를 초월하여 절대적이며 자유로운 의식에 이르려고 하였듯이 미래주의 역시 세계에 대한 직관적인 조망을 그림과 조각에 투사시킴으로써 그 절대적 가치에 접근하고자 했다. 미래주의의 조형적 방법은 크라우스도 언급했듯이 방법에 있어서는 아직 이전 전통의 근대적 방법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그 특유의 사고와 지극한 탐구로서 이루어낸 예술에서의 사유와 표현은 그 내부에 현대의 조형적 사고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의식의 내부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추상으로의 진입에 영향을 주었으며 절대적 세계의 자유에 대한 의지는 자유롭고 선구적인 현대 예술표현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고 있는 듯 하다. 또한 미래주의의 기본개념인 다이나미즘과 모션, 기계주의 및 빛의 속도, 베르그송에 의거한 ‘직관’, ‘지속’의 감성 및 ‘마음의 상태’는 큐비즘에서 파생된 올피즘의 미학뿐 아니라 독일의 표현주의 (칸딘스키, 마르크)와 닿아 있고 또한 영국의 소용돌이파(Vorticism),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사조들(광선주의, 절대주의, 구성주의에 이르는)에 직접적 영향을 주게 된다. 미래주의의 개념은 무엇보다도 베르그송의 철학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지속의 개념으로서의 시간에 관한 연구와 해석은 현재에까지 이르는 모더니즘적 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