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광개토대왕 드라마를 보면서 광개토 태왕 공부를 했습니다.
지난해 백두산 갈때 광개토대왕릉을 가봤습니다.
그아들인 장수왕릉도..
비석이 엄청 컸던 기억이...
고구려가 우리나라인데
지금은 중국에 광개토대왕릉이 있어 좀 이상한 느낌이...
18세에 보위에 올랐는데 요즘 드라마에 왕자로 나오는데
18세 이전모습같지 않은 청년모습이더군요.
그런데 젊은 나이 39세에 요절하고
그의 장남인 (거련巨連:巨璉) 장수왕)이 보위를 이었답니다.
제 19대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 375∼391.말∼413.10) 재위 : 약22년
391년 제 19대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375∼413)(永樂元年) 18세의 나이로 즉위 (재위 391∼413).
고국양왕(故國壤王)의 태자.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그의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생존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다.
광개토태왕은 약칭이고,
그가 쓴 영락(永樂)이란 연호는 한국에 알려진 최초의 연호이다.
즉위 초부터 대방(帶方) 탈환전을 개시하여
백제의 북쪽을 진격하여서 석현(石峴) 등 10성을 함락하였고,
392년 1월 신라 내물왕 실성을 고구려에 보내 화친조약
392년 5월 고국양왕 사망
392년 7월 백제, 왜, 가야 신라공격 조짐에 4만 군사로
백제의 대륙 영토인 요서군과 진평군 일대 공격.
백제의 북변을 쳐서 石峴등 10성을 함락.
이로써 한수(황하) 이북의 여러 부락을 빼앗음.
거란이 변방에 침입 1만의 백성이 거란에 붙잡혀 감.
392년 9월 이에 주둔군을 남겨두고 북진하여 契丹의 본토 공격.
거란군 도망. 거란인 500명과 고구려인 1만을 환국시킴.
392년 10월 그 길로 다시 남진하여 백제 관미성 공격 20일만에 함락.
관미성 함락으로 백제는 요서군을 상실하고
하수(황하) 남쪽으로 완전히 밀려남/백제 한수(황하)북쪽 상실.
이후 백제 고구려 정벌론 대두. 진사왕 사치 향락.
아신왕 진사왕제거. 393년 백제에게서 총 11개 성 획득
393-395 한강 유역을 둘러싸고 백제와 교전
393년 8월 아신왕 외숙부 진무 장군 관미성 공격-별 성과 없이 퇴각
393년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창건
394년 7월 다시 백제군 고구려 남쪽으로 진주 이에
광개토태왕 5천의 군사로 수곡성에서 백제군 격퇴.
백제 침입대비 남쪽변방에 7개의 성을 쌓도록 함.
이로써 관미성주변 10개성은 완전히 고구려 소유가되고
한수(황하)이남으로 몰아냄
395년 8월 백제의 재침에 7천 군사로 친정하여 패수에서 백제군 8천을 죽임.
돌아오는 길에 북상하여 흥안령산록
시라무렌강 유역의 거란부족의 일부인 稗麗를 정벌하고
北豊 등 요동 일원의 土境巡狩. 비려(거란)정벌-말/소금 확보.
잡혀간 백성 환국시킴. 시라무렌강 거란유목민족의 본거지.
395년 11월 아신왕 친정 7천군사로 바다를 건넜으나 폭설로 회군.
396년 병신대원정 : 봄.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상륙작전시도
백제의 일팔성을 비롯 58성과 7백개 촌을 고구려 영토에 편입.
아리수 이북 차지. 남녀 1천명과 세포 1천필을 보내 화친제의.
백제 아신왕에게서 영원한 신국맹세받음.
왕제(王弟)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
하평양을 설치 한반도 정책의 교두보로 삼음
397년 5월 아신왕 태자 전지를 왜에 보내 원병요청
7월 대대적인 군사사열
398년 3월 아신왕 고구려 정벌의 전초기지 쌍현성 쌓음
398년 광개토태왕 숙신정복
398년 고구려 백제의 변경침입 백성 300명 포로로 잡아
백제가 아리수 이북을 넘보지 못하도록함
399년 왜 대선단 파견 신라공격 광개토태왕 하평양에 내려가 병력 순시
399년 2월 모용성이 3만 군사로 신성과 남소성 함락 주변 7백리 땅을 점령. 백성 5천여호 이주. 이에 원군 파병 보류.
연의 동태 주시
400년 후연 모용성의 침공받음
400년 경자대원정 결국 보병과 기병 5만을 신라에 보내고
도성에 머물며 연의 동태 주시. 별 피해없이 倭寇를 격퇴 물리치고
구원하는 동시에 任那加羅,安羅등 가야 여러나라를 복속시킴.
내물왕의 조공약속받음
402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성(新城)과 남소(南蘇)성을 회복하고
후연의 평주공격점령. 유주압박.
402년 광개토태왕 大凌河유역에 진출하여 後燕의 宿軍城을 공격
404년 광개토태왕 대방고지에서 왜구침임격파 / 후연 모용희의 목제성 침입 격퇴하여 요하 이동 지역에 대한 장악을 확고히 함.
404년 갑진왜란. 402년 빼앗겼던 남소와 신성을 회복하기 위해
후연의 평주공격, 남소와 신성회복, 11월 후연의 평주함락.
여세를 몰아 후연의 도성공격.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백제와 왜의 연합군의 공격으로
고구려군은 평주와 신성 남소
등을 모두 잃고 요동성까지 밀림. 백제와 왜의 연합군은
산동에 백제군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고구려 대방지역 공략.
수세에 몰리다 후연군에 밀려 요동성 함락위험에
광개토 태왕 중앙의 정예군을 대방에 투입 연합군 격퇴.
요동성을 에워싼 연군도 고구려군의 수성전에 밀려 퇴각.
하지만 고구려의 국력소모 심각.
404년 후연 연군 공격
405년∼406년 후연(後燕)의 모용 희의 침입을 2번 받았으나
요동성(遼東城)과 목저성(木底城)에서 모두 격퇴
406년 7월 모용희(慕容熙) 거란정벌길에 반격에 밀려 올랐으나
퇴각하는 길에 퇴로차단 우려 고구려 목저성 선제공격.
지쳐서 패주.
407년 2월 후연에 대비 평양 동황성 및 평양성을 증축 수리 전쟁대비.
한편 보병과 기병 5만 동원 백제의 후방을 공략하여
沙溝城등 6개성 함락. 백제군 전체 초토화. 백제의 대륙기지 현격히 초토화. 407년 백제에게서 총 6개 성 획득
이무렵 후연이 무너져 남연과 북연으로 갈라짐. 북연의 왕 고구려출신의 고운. 고운은 고구려에 호의. 화친. 북방안정.
407-408년 후연을 붕괴시키고 이를 계승한 북연왕 高雲에게
종족의 禮 를 베품, 이후 북연은 고구려의 종속국이 됨
407년 광개토태왕 후연 공격
407년 모용희를 죽이고 자립한 고운(高雲)과는 수교를 맺기도 하였다.
409년 변방의 안정으로 거련을 태자로 삼고
평양의 백성들을 동쪽의 독산 등 새로 쌓은 6개성으로 이주.
410년 국력이 쇠약해지던 동부여 정벌-조공약속 동부여 귀족 대거 귀순
409년 (광개토대왕 19) 거련(巨連:巨璉) 태자 책봉
410년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철령(鐵嶺:安邊) 이북의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편입.
연해주 일원 정복. 남하하여 한강선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
411년 광개토태왕 거란, 후연을 정복해 북방을 정복
413년 10월 광개토태왕 죽음(39세 永樂22年 붕어)
있는곳 :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
중국 집안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로,
호태왕비라고도 부른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다.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으로 비신의 높이는 5.34m, 각 면의 너비는 1.5m이다.
4면에는 총 1,802자의 비문이 적혀져 있다.
이 기록은 한국의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광개토태왕비
작아 보이지만 엄청큽니다.
구경하는 사람들 키와 비교하면 3배는 넘어 보이지요?
대전부르스 / 가수별 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