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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5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일]
마태오 10,17-22
김대건 신부님의 모범으로 보는 '사제직 수행의 목적 '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일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동상이 성 베드로 대성당 외벽에 커다랗게 세워진 것을 다들 아실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교회가 성장하였고 또 김대건 신부님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김대건 신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범을 명확히 알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을 동상으로 외국에 보내놓고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격이 될 것입니다.
성인은 본받자고 정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우리가 성인으로 칭하지 않아도 이미 하느님께 성인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제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생각할 때는 단 한 가지 모범밖에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물론 많은 일을 하기는 하셨지만, 결국 한 가지 목적이셨습니다.
그분이 어렸을 때 먼 길을 걸어가셔서 공부하시고 조선 땅을 밟기 위해 육로로, 또 해로로 길을 개척하시며 하신 고생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고생하셨을까요?
당신만으로는 조선의 모든 신자의 배를 불릴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왜 신자들의 배를 불리려 하셨을까요? 그래야 착해지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시인 알프레드 데 뮈세는 ‘5월의 밤’이라는 시로 유명합니다.
이 아름다운 시 속에 어미 새 펠리칸이 등장합니다.
어미 새 펠리칸은 갓 낳은 굶주린 새끼 새들을 해변에 놓아두고 먹이를 구하러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오랜 여행에도 어미 새는 단 한 줌의 먹이도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맙니다.
여행에 지친 어미 새 펠리칸이 돌아올 때 엄마를 본 굶주린 새끼 떼들은 어미 새에게 몰려갑니다.
그걸 본 어미 새는 날개 속으로 새끼들을 포옹합니다.
그리고 어미 새는 그 자리에 누운 채 부리로 자기 가슴을 쪼아서 자기 피와 심장을 새끼들의 먹이로 내어놓습니다.
어미 새는 새끼들이 엄마의 피를 마시고 엄마의 살을 먹는 모습을 보며 그렇게 서서히 숨을 거두고 맙니다.
새 중에서 가장 모성애가 강한 새가 펠리칸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펠리칸은 새끼 새들이 병약하고 아플 때 부리로 자기 힘줄을 터뜨려 피를 먹이고 배고플 때는 가슴을 쪼아 살을 뜯어 먹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어미가 그렇게 해서 새끼들도 커서 그렇게 자기 새끼들에게 할 수 있습니다.
잘 먹는 새끼들은 어미를 믿기에 악해지지 않습니다.
반면 뻐꾸기를 생각해봅시다.
뻐꾸기는 어미에게 사랑받지 못합니다.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면 새끼는 살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몸집이 크니까 자리를 더 많이 차지해야 하고 먹이를 더 많이 받아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알들을 밖으로 밀어내 떨어뜨리고 자기만 어미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소유욕, 식욕, 권력욕이 자기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주위에 있는 것들은 목숨을 잃습니다.
나중에 새들이 회의하면 제일 먼저 쫓겨날 새가 뻐꾸기일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는 인간에게 하느님과의 통로를 제공하여 하느님의 생명의 양식과 가르침으로 신자들이 더는 세상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일을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세속-육신-마귀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종교만 버리면 돈도 많이 주고 결혼도 시켜주고 높은 벼슬도 주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런 편지를 남깁니다.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할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어려운 시절을 만나 부디 마음을
허실(虛失)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도우심(主佑)을 빌어, 마귀와 세속과 육신의
세 원수(三仇)를 대적하십시오.
박해를 참아 받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큰일(靈魂大事)을 경영하십시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한국교회에 천국의 음식을 전할 길을 준비하다가 붙잡혀 순교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새끼들이 뻐꾸기가 아니라 펠리칸이 되게 하려는 이유였습니다.
사람은 받은 사랑만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사제가 무엇 하는 사람인지
명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돈 좋아하면 안 되고 십일조 내라고 하면 반발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또 이런 것 때문에 돈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제들도 있습니다.
이는 김대건 신부님을 수호자로 둔 사제들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습니다.
오히려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이 더 격해졌고 더 많이 지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마지막으로 신자들에게
가르치려 했던 가장 중요한 교리가 삼구와의 싸움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를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면서까지 하늘 양식을 전해주는 길을
트기 위해 노력하셨음을.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5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복음: 마태 10,17-22
고작 24세의 나이에! 참으로 대단하신 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1821~1846)의 축일입니다.
그간 배출된 한국인 사제 숫자는 7천명을 넘어 섰는데, 신부님은 1호 사제로서, 한국 모든 사제들의 맏형이요 모델이십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생애를 묵상할 때마다 우선 드는 느낌은 안쓰럽고 짠한 느낌입니다.
사제직을 꿈꾸며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소년 김대건은 물설고 낯선 곳에서 8년 세월을 고생한 끝에 부제품을 받게 됩니다.
사제직을 준비 중이던 청년 김대건 안드레아의 조국과 동포를 향한 사랑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은 아직도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조국의 동포를 향한 안타까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자 없이 살아가는 조선 천주교 교우들을 향한 연민의 정도 컸습니다.
이런 이유로 신학생 김대건 안드레아는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이 안전하게 입국할 수 있는 길을 뚫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그가 21세이던 1841년 연말 마침내 의주를 통해 밀입국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의 여정은 한양으로 향하던 길목에서 눈물을 머금고 멈춥니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무렵 김대건 안드레아는 부친 김제준의 순교 소식과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어린 동생과 함께 머물 곳이 없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참으로 가슴 찢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 같았으면 부모님과 가족이 저 지경인데 사제는 무슨 사제, 하며 다 팽개치고 어머니를 찾아 떠났을 것입니다.
1844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학생은 드디어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습니다.
보다 안전하게 조선 입국로를 뚫기 위한 그의 노력은 점점 배가되었습니다.
드디어 1845년 1월 꿈에 그리던 입국이 성사됩니다.
천주교 박해가 한창이던 시절이었기에, 육로를 통한 정식 입국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청년 김대건 안드레아는 걷고 또 걸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국경에 도달한 그였지만, 여권이 없었습니다.
기지를 발휘해 아슬아슬하게 국경을 통과했지만, 가는 곳마다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홀로 밤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큰길로는 걷지 못하고 숲이 무성한 산길로만 걸으니, 그 여정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날씨는 한겨울, 눈은 펑펑 오지, 먹은 것은 없지, 결국 그는 눈 위에 쓰러져 정신을 잃기까지 했습니다.
조선지목구장 페레올 주교와 파리외방선교회 사제들을 조선으로 모셔오기 위한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고초는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상해에서 출발한 라파엘호는 큰 바다를 건너다니는 배가 아니었습니다.
연안에서 조기잡이 정도나 할 수 있는 작은 황포돛배였습니다.
바닷가에 살다 보니 바다의 위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제 그리 잔잔했었는데, 오늘은 완전히 돌변해서 무섭고 거친 모습입니다.
그런 날 황포돛배를 타고 큰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상해 바로 건너편은 제주도입니다.
따라서 선장 김대건 신부의 계획은 인천과 가까운 산동 반도 쪽으로 올라가서 한강 하구를 통해
입국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친 파도와 풍랑에 떠 밀려 정처 없이 흘러가던 라파엘호는 제주도 앞까지 떠내려갔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새 사제의 전도 여행길은 거의 목숨을 건 여행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의 여정이 마치 바오로 사도의 여정과 흡사합니다.
고작 24세의 나이에!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 모습 앞에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외국말로 그 어려운 신학 공부한다고 10년 가까이 쌩고생했지, 입국로 뚫는다고 거의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었지, 뱃길로 선교사 동반하려다 죽을 고생한 새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를 고작 24세의 나이로 당신 나라에 데려가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조국과 동포를 향한 극진한 사랑, 선교사 영입을 위한 불굴의 의지,
목숨을 내건 선교 열정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부족한 사제들의 수호자시니, 천상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계속 격려하고 계심을 굳게 믿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 강론>
(2024. 7. 5. 금)(마태 10,17-22)
<지금 이 시대에도 순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17-22).”
1) 이 말씀 바로 앞에는,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라는 말씀이 있고, 바로 뒤에는,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마태 10,23ㄱ).”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7절-22절의 말씀은, 신앙인들이 이리 떼 가운데에 놓여 있는 양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을 때 슬기롭고 순박하게 그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라는 말씀은, 신앙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순교’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신앙을 증언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순교가 가장 거룩하고, 가장 위대한 방법이긴 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순교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그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는, “사람들이 미워하고
박해하더라도 신앙을 잃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1-12).”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선한 처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여러분을 중상하는 바로 그 일로 부끄러운 일을 당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1베드 3,15-17).”
이리 떼 가운데에서 양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온유함과 선으로 이리들을 감화시켜서 양들로 변화시키는 것뿐입니다.
만일에 ‘양’이 양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이리’로 전향하거나, ‘이리’ 편에 선다면, 육신의 목숨은 지킬 수 있겠지만, 영혼의 생명은 잃게 됩니다.
이리를 양으로 변화시켜야만 양과 이리가 모두 살게 되고, 모두가 함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사실 바로 그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에서,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은 박해를 참고 견디는 일, 또는 순교를 가리키는 말이고,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은 악인이 지옥에서 처벌받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3) 예수님 말씀에서 ‘증언할 것이다.’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입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는
“인간적인 말재주로 신앙을 증언하려고 하지 마라.”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는, “모든 것을 성령의 인도에 맡겨라.”입니다.
여기서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이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박해자들에게’ 말씀하신다는 뜻이고, 그들에게 맞설 수 있는 힘과 지혜와 용기를 성령께서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4) 박해가 항상 신체적인 폭력의 모습인 것은 아닙니다.
노골적인 것이든 은밀한 것이든 ‘유혹’도 심각한 박해입니다.
신앙을 크게 흔든다는 점만 생각하면, 사실 유혹이 더 위험한 박해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신앙인들도 옛날의 신앙인들 못지않게 고난과 시련을 겪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집요하고, 더 끈질기고, 더 강렬한 유혹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옛날의 순교 성인들의 신앙과 희생과 헌신을 본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옛날의 순교 성인들만 현양하면서,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전부 다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다는 고정관념이나 열등감에 빠져 있을 이유는 없습니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오늘날의 신앙인들 중에도 훌륭하고 위대한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배운 대로 믿고, 믿는 대로 실천하고, 어떤 유혹을 받아도 흔들리지 않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누구든지 순교의 길을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