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 유족들은 1월23일 재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자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사진/ 한겨레 박종식 기자)
이른바 ‘인혁당’ 사건은 멀리 19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당시 공약으로 내세웠던, ‘군 본연의 업무로 돌아간다’는 약속을 어기고
총선을 거쳐 정권을 장악하였다. 오늘 우리가 ‘인혁당’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으로 알고 있는 이 단체는 대구 지역 교사들이 모여서
시국과 경제와 남북관계를 토론하고 책을 읽던 단순한 학습모임이었다.
중앙정보부는 1964년에 이 단체의 구성원들을 반국가 내란음모 혐의로 검거해서 반혁명 세력과의 연계를 조사했으나
이렇다 할 혐의점을 찾지 못해서 석방한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십년이 지난 뒤 온 나라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 저지와
긴급조치 철폐를 주장하는 시위와 논쟁으로 들끓자, 공안당국은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인혁당 인사들을 다시 검거해서
이번에는 인혁당 재건 혐의와 반국가 내란음모 혐의를 씌웠다. 인민혁명당’이라는 명칭은 이 사건으로 처형당한 이들이 만든 게 아니라
공안기관이 만든 호칭이었다.
당국은 인혁당 인사들이 과거 해체된 단체를 재건해서 북한으로부터 지령과 자금을 받아
이를 민청학련에 전달하여 정부 전복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인혁당 관련 인사는 물론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민청학련 관계 학생들을 체포해서 대거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만난 일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다는 것이 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대법원 판결 뒤 18시간 만에 사형된 8명,
도예종·서도원·하재완·송상진·우홍선·김용원·이수병·여정남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느 가장들처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출퇴근을 하는 생활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침묵을 강요당하면서도 침묵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다 ‘간첩’이 됐고, 그러다 사형당하고 ,가족들은 하루 아침에 ‘빨갱이 가족’이 됐다.
그로부터 32년이 흘러 지난달 23일,(2009.1) 드디어 이들에게 무죄가 선고되고
뒤이어 검찰이 항소를 포기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사필귀정이다.
당시 신문보도에도 최초 몇 번은 ‘가칭 인혁당’이라고 표기하다가 어느 날부터 ‘가칭’이란 말이 사라지고 인혁당으로 기정사실화됐다.
얼마나 많은 시대의 양심들이 인혁당이라는 이름으로 멸시와 박해와 죽임을 당했던가.
그러나 인민혁명당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름이다.
많은 이들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모르거나, 그저 안다. 암울했던 역사의 한 토막으로 기억한다. 기자도 그랬다.
1월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관 문용선)가 재심 선고 공판에서
이미 사형된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후 역사가 ‘현재’가 됐다.
남은 가족들에게는 줄곧 현재였는데도 말이다.
1974년 4월18일 오후 유승옥·이정숙씨 집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아무 설명 없이 집을 뒤지고 책과 라디오 등을 가져갔다. 밤이 돼도 남편은 오지 않았다.
이씨는 젖먹이를 업고 남편을 찾아나섰다. 어떤 이는 중정이 있는 남산으로 가보라고 했고,
어떤 이는 형무소가 있는 서대문으로 가보라고 했다.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사흘쯤 기다린 뒤에야
스쳐 지나가는 검정색 세단을 탄 남편을 볼 수 있었다. 이씨는 걱정 말라고 소리치며 쫓아갔고 남편은 고개를 돌려 웃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그나마 생사를 확인한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아내들은 남편이 왜 며칠째 돌아오지 않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4월25일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의 사건 발표를 통해 알게 됐다.
강순희씨도 5월2일 똑같은 일을 당했다. 인혁당 재건을 위해 일했다면 중정의 발표 뒤에 몸을 피했을 텐데
강씨의 남편 우홍선은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해 회의를 하던 중에 연행됐다.
세 집에서 가져간 라디오는 모두 ‘북괴방송 청취용’으로 둔갑했다.
가장 최신형이었던 강씨네 라디오는 조서에 ‘고성능에 특수장치를 한 라디오’로 기록됐다.
그 라디오가 중정이 제시한 유일한 증거물이었다.
△ 왼쪽부터 강순희(우홍선 아내), 유승옥(김용원 아내), 이정숙(이수병 아내)씨.
구명운동 하던 아내들까지 강제 연행
남편들이 강제로 연행되고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린 뒤에도 아내들은 아직 순진했다.
정성스럽게 탄원서를 작성해 보냈다.
박정희 대통령 앞, 육영수 여사 앞, 민복기 대법원장 앞, 신직수 중정부장 앞, 황산덕 법무부 장관 앞….
강순희씨는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이 실체가 없었던 만큼, ‘재건’은 조작이라는 증거물을 찾아다녔다.
한국전쟁 당시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최전선에서 싸우다 대위로 예편한 남편을
공산주의자로 만들어놨으니 머지않아 진실이 밝혀질 것으로 생각했다.
결론이 정해져 있던 비상군법회의 ‘드라마’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남편을 살리려는 아내들의 구명운동도 치열해졌다. 아내들은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언론사에도 발이 닳도록 찾아다녔지만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곳은 없었다.
초대받지 않은 국제앰네스티 행사장에 몰래 들어가 단상에 올라 인혁당 사건의 실체를 알리기도 했다.
처음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이들은 종교인들이었다.
조지 오글 목사, 제임스 시노트 신부와 천주교 인권위원회의 함세웅 신부 등이 발벗고 나섰다.
1심과 2심에서 잇따라 사형이 선고된 뒤에도 “함부로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 기독교 회관에 모여 구명운동을 논의하고 있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아내들(위) 오글 목사 출국 명령 규탄 시위 장면. (사진/ 강순희씨 제공)
구명운동이 본격화되자 중정은 아내들까지 강제로 연행했다.
1975년 1월9일 명동성당 앞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조작”이라는 호소문을 발표한 것이 계기였다.
48시간 동안 잠을 재우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대드느냐”고 협박을 하고 폭행을 했다.
남편이 국가 전복 활동을 한 사실을 목격했다는 진술서를 강요했다.
남편들의 법정 투쟁을 지켜본 아내들은 처음엔 완강히 버텼지만, 난생처음 겪는 폭력을 견디지 못해 몇몇은 그들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중정은 허위 진술서를 받아내기 위해 최음제로 추정되는 약을 사용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물을 받아마신 한 아내는 중정 조사 직후 의지와 다르게 반응했던 몸이 부끄러워 아이들과 동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75년 4월8일 대법원은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아내들은 정신을 놓아버렸다.
다음날 오전 재심을 청구하러 가는 길에 벌써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늘이 무너졌다.
강순희·유승옥씨는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러 갈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 미국 대사관에서 시위를 벌이다 연행되는 강순희씨(위)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기습적으로 벌어진 구명 시위 장면.(사진/ 강순희씨 제공)
“분이 풀리지 않아. 살릴 수 없으니까…”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한 정권은 고인들이 남긴 마지막 말까지 조작했다. 이정숙씨는 “먼저 도착해 유언 기록을 봤던 시누이(이수병의 여동생)가 본 내용과 나중에 유족들에게 보여준 유언의 내용이 달랐다”고 증언했다. 막내였던 김용원의 유언 가운데는 동생에게 가족들을 당부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기록대로라면 고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유언을 했다. 장례시 종교의식을 거부한다고.
사형 판결과 집행 이후 쓰러져버린 유승옥씨는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마저 지켜보지 못했다. 교사 임용고시에서 전국 수석을 한 뒤 경기여고 교사로 재직했던 ‘수재’ 남편은, 그래서 죽어서도 자랑스러운 남편은 죄수복 차림으로 허접한 판자관에 담겨 땅에 묻혔다. 유씨는 그게 한이 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순희씨는 장례를 치른 뒤 100일을 누워 있었다. 강씨는 매주 산소에 가서 하늘과 땅과 세상을 향해 ‘박정희 살인마, 천벌을 받으라’고 세 번씩 크게 외쳤다. 박정희가 머리기사로 실린 신문을 꼭꼭 씹어먹었다.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몇 년을 그렇게 살았다.
아내들은 남편을 묻은 날, 같이 죽었다. 살고 싶어 산 게 아니었다.
목숨을 이어간 유일한 이유는 자식들 때문이었다. 남편의 명예회복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32년의 삶은 각자 소설 한 권씩의 분량이 됐다. 정보원과 담당 형사들의 감시는 그렇다 쳐도
이들이 맺고 있던 사회와의 끈은 모두 끊어졌다. ‘섬’에 살았다. 장사를 하고, 행상을 하고, 학습지를 돌리면서 억지로 살았다.
다시 숨을 제대로 쉬기 시작한 지는 채 몇 년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아내들에게 재심 판결에 대한 솔직한 소회를 들어봤다. 너무 오래 걸렸다고 말했다.
강씨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해결될 줄 알았다. 오늘도 산소에 다녀왔다.
당신이 힘이 있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빨리 통일이 되게 도와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유
승옥씨는 “한편으로 고마우면서도 남편이 돌아올 수 없으니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한숨만 나온다. 한마디로 너무 억울해서… 뭐가 억울하냐면 못된 짓 한 놈들이, 박정희 그놈은 죽었지만 동조해서
죽인 놈들이 우리하고 더도 말고 똑같이 당했으면…. 솔직히 무죄 판결… 분이 풀리지 않아. 사람이 없으니까, 살릴 수 없으니까….
무죄 받은 사람을 죽여놨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솔직히 한마디로 원수 못 갚고 무죄라는 것만 받아야 하나 생각하면 너무 속상하다.”
이정숙씨의 말은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범죄자들은 왜 말이 없나
강순희씨는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편지지에 적힌 시 한 편을 건넸다.
날짜를 보니 남편을 뺏기고 누워 있던 때였다. 홍기선 감독의 작품 제목마냥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며’ 몸으로 쓴 시였다.
세월아 가거라 빨리 가거라 내 슬픔을 안고 빨리 가거라 멀리 멀리세월아 가거라
첫 번째 당신을 죽인다고 할 때는 나, 묶인 당신을 바라보며 울며 몸부림치니 몸짓으로 나를 달래며 괜찮다고 괜찮다고 웃어주던 당신
두 번째 당신을 죽인다고 할 때는 나, 울지 않고 하얀 얼굴로 뒤돌아보는 당신을 향해 나를 믿으라고 내 가슴을 치며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세 번씩이나 뒤돌아보는 당신에게 가슴쳐 보이고 나, 그 길로 달렸건만 그 길이 당신을 살리는 길인 줄 알고 나, 나 그 길로 밤낮으로 쉬지 않고 달렸건만 그 모진 놈들에게 기어이 당신을 뺏기고야 말았네 원통하도다 원통하도다 어쩌다 그 모진 놈들에게 잡히었나 잡히었나
세 번째 열세 놈의 죽일 값어치조차없는 늙은이들이 당신을 죽인다고 할 때는 나, 힘껏 늙은이들을 향해 소리 질렀네
양산 하나 다 산산조각이 나도록 두들기며 소리 질렀네 바닥에 누운 채로 질질 끌려나와 거리로 동댕이쳐졌네
사람 살리시오 사람 죽이는 것 구경만 하지 말고 사람 살리시오
밤이 깊두록 목이 터져라 하고 소리 질렀네
강씨의 바람대로 세월이 빨리 가기는 했는데 의문이 들었다.
그때 그 범죄를 저지른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왜 그들은 아무 말이 없는지.
인민혁명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 초기인 1964년 8월 중앙정보부(중정·현 국가정보원)가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획책한 지하당을 조직한’ 혐의로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하면서 시작됐다.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4명 가운데 부장검사 이용훈과 검사 김병리·장원찬은 20일 동안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중정이 발표한 혐의를 찾지 못해 ‘기소할 가치가 없다’며 사표를 냈다. 김형욱 당시 중정 부장의 압력으로 서울지검 서주연 검사장이 구속 마감일 숙직 담당이던 정명래 검사에게 13명에 대한 기소장에 서명하게 했다.
1965년 1월20일 선거공판에서 도예종, 양춘우는 반공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3년, 2년을 선고받고 나머지 11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은 이에 불복해 항소심을 제기했고, 그해 5월29일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원심을 깨고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1차 인혁당 사건이 불거진 지 10년 만인 1974년 4월 중정은 유신반대 투쟁을 이끌던 전국 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배후로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23명을 구속했다. ‘2차 인혁당 사건’의 서곡이었다. 구속자 중 도예종·여정남·김용원·이수병·하재완·서도원·송상진·우홍선 8명은 이듬해 4월 사형을 선고받고, 나머지 15명도 무기징역에서 징역 15년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사형 선고를 받은 8명은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지 18시간 만인 4월9일 사형이 집행됐다. 이 사건은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건으로 국외에도 알려졌다. 국제법학자협회는 1975년 4월9일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했다.
이들은 지난 1975년 4월 9일 소위 '인민혁명당재건단체 사건'(이를 두고 우리는 ‘인혁당 사건’이라 부른다)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다음날 새벽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인사들이다.
그리고 32년이 흐른 지난 2006년 12월 23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부(재판장 문용선) 311호 법정에서는 죽은 자들에 대한 무죄선고가 내려졌다.
재판부는 이날 피고인 8인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유족들이 지난 2002년 서울지방법원에 재심을 신청했고, 법원이 2005년 12월 재심을 결정한 끝에 최종적으로 내려진 사법부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3년여의 세월이 지났다. 어제 4월 9일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희생된 민주열사를 위한 34주기 추모제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인사들은 저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행사를 보도한 <민중의 소리>에 따르면 이 날 문정현 신부는 “용산참사를 생각하면 인혁당 시절과 똑같다”면서 “당시 사형된 인사들을 화장터로 끌고가 태웠는데 용산참사 때도 시신들을 2시간도 안돼서 토막을 내놨다”고 절규했다.
재판부는 그 날의 판결로 독재정권 당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사형 선고를 받고 대법원 상고 기각 18시간만에 사형된 8명에 대한 명예를 회복시켰다. 동시에 '사법살인',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비난받았던 과거 잘못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
다시 산과 들에 진달래가 붉게 피어난 4월이다. 어김없이 그 날은 돌아왔고 8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버린 사법살인의 역사는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더군다나 경주출신으로 대구대 강사와 영주군교육감을 지낸 도예종, 대구초등학교 교사였던 송상진, 대구출신으로 경북대학교 '정진회필화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던 여정남을 비롯해 당시 민주자주통일협의회 경북협의회 부위원장이었던 하재완은 우리 대구경북 지역의 민족민주운동의 주측들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가슴 아프다.
왜, 누가 이러한 만행을 자행했는가. 인혁당 사건은 무엇인가. 만 34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왜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밖에 없는가. 2009년 4월, 왜 인혁당사건이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또 다시 납덩어리의 무게로 다가 오는 것인가.
‘세계 사법사상 최악의 사건', 박정희가 만들어낸 사악한 ‘사법살인'
▲ 재판을 받고 있는 인혁당열사들
인혁당 사건. 강산이 서너 번이 바뀌고도 남을 세월, 3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내외 사법단체들로부터 ‘세계 사법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규정되고 있는 기막힌 우리 역사의 한이다. ‘박정희 18년 독재의 가장 사악한 죄상'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1964년 8월 14일, 박정희 정권의 저승사자라 불리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인민혁명당 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여 57명의 청년들을 잡아들인다. 이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지명수배하게 된다. 그해 6월에 있었던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반정권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정권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었다.
이것이 ‘1차 인혁당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4명의 검사 중 3명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이유로 사표를 제출했다고 전해진다. 사법부도 기소된 57명의 중 12명에게만 실형을 선고했다. 그들조차도 3년에서 1년의 가벼운 형량을 선고 받았다. 1차 인혁당 사건은 독재 정권의 민심돌리기용으로 적당히 결말을 맺었다. 적어도 사법살인으로까지 가지는 않았다.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중심 ‘민청학련’ 죽이기 위해 10년전 사건 끌어내다
▲ 도예종, 송상진 등 8명에 대한 사형이 확정되자 가족들이 울부짖고 있다.
▲ 동아투위사건 등 시국 사건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제임스 시노트 신부,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지난2004년 10월 인혁당 사건을 증언한 책 <1975년 4월 9일>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10년 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터지고 만다. 바로 ‘2차 인혁당 사건'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1974년은 한국 근대사에서 반유신 독재운동이 한창이던 때로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 정권이 비상적 헌법조치인 긴급조치 4호를 발령한 시점이었다. 당시 반유신 독재운동을 주도한 학생운동 단체가 바로 ‘민청학련'이다.
민청학련은 조직적인 반유신운동을 전개할 필요성을 느낀 전국의 학생운동 세력이 전국 대학의 일제 시위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직되었다. 나아가 민청학련은 반유신 독재운동을 학생운동과 같은 단순히 특정 집단의 운동이 아닌 종교계, 학계 등의 광범위한 세력과 연계해 추진하게 된다. 따라서 민청학련은 이후 전개될 여러 노동, 재야, 민주, 통일 운동의 토대가 된다.
이러한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던 민청학련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위기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을 잠재울 궁리 끝에 10년 전 ‘인혁당'을 기억해 낸다. 민청학련의 배후세력으로 인혁당을 지목했던 것이다.
1974년 4월 3일 교수와 학생 등 무려 254명이 구속되는 대규모 시국공안사건이 터진다. 민청학련이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재건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및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정부를 전복하려하고 있다는 것이 당시 사건의 핵심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인혁당 사건의 연루자들은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를 통해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내란죄, 내란선동 등으로 기소되어 주요 주모자로 지목된 우홍선, 송상진,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도예종, 김용원, 여정남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그리고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상고심이 열린다. 대법원은 관련자 254명 중 36명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도예종 등의 8명에 대해서는 사형을 확정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튿날 가족을 만날 기회조차 없이 새벽 4시부터 시작해 차례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죽어서도 이들은 시신조차 가족의 품으로 가지 못하고 정부당국에 의해 경기도 벽제 화장터에서 태워지는 한을 안고 갔다.
이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은 많은 점에서 지적되어 왔다. 인혁당 사건의 증거로 채택된 것은 고문과 강압의해 작성된 피의자들의 진술서뿐이었다. 또한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피의자들은 가족은 물론 변호사들조차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정권은 사건을 완전히 은폐하기 위해 피의자들의 법정진술까지 조작했으며 가족들이 보관한 항소이유서와 공소장까지 압수해 사건의 증거를 모두 인멸하려고 했다는 점이 이 사건이 정권과 정보기관에 의한 날조임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수와 학생 254명 구속, 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조서까지 날조한 사기극
국제법학자회의 4월 8일을 '세계 사법사상의 암흑의 날'로 선포
▲ 대구칠곡 현대공원 '인혁열사묘역'. 이 곳에는 지역출신의 도예종, 송상진, 하재완, 여정남 인혁당열사가 잠들어 있다.
인혁당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많은 지탄을 받아 왔다. 당시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법학자 회의는 ‘인혁당 사건'의 최종판결이 있었던 4월 8일을 “세계 사법사상의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또한 세계 대다수 인권단체에서 박정희 정권을 비난했다.
당시 국내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며 이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유신체제의 부당함을 비판한 시노트 신부와 오지오글 목사는 박 정권에 의해 추방당하기도 했다. 전 세계 수 많은 인권단체와 학자들이 박정희 정권의 야만성을 성토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지난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었다고 밝혔다.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중앙정보부는 도예종 등 23명에 대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인민혁명당 재건위를 구성, 학생들을 배후조종하고 국가전복을 꾀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러한 조사결과 이를 입증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혐의는 모두 피의자의 신문조서와 진술조서 위조를 통해 조작됐음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리고 2006년 12월 23일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 법원은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 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유족들은 회한에 받쳐 오열했다. 그리고 또 다시 4월은 찾아왔고 산과 들에는 진달래가 어김없이 붉은데,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 유족들은 1월23일 재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자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사진/ 한겨레 박종식 기자)
이른바 ‘인혁당’ 사건은 멀리 19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당시 공약으로 내세웠던, ‘군 본연의 업무로 돌아간다’는 약속을 어기고
총선을 거쳐 정권을 장악하였다. 오늘 우리가 ‘인혁당’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으로 알고 있는 이 단체는 대구 지역 교사들이 모여서
시국과 경제와 남북관계를 토론하고 책을 읽던 단순한 학습모임이었다.
중앙정보부는 1964년에 이 단체의 구성원들을 반국가 내란음모 혐의로 검거해서 반혁명 세력과의 연계를 조사했으나
이렇다 할 혐의점을 찾지 못해서 석방한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십년이 지난 뒤 온 나라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 저지와
긴급조치 철폐를 주장하는 시위와 논쟁으로 들끓자, 공안당국은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인혁당 인사들을 다시 검거해서
이번에는 인혁당 재건 혐의와 반국가 내란음모 혐의를 씌웠다. 인민혁명당’이라는 명칭은 이 사건으로 처형당한 이들이 만든 게 아니라
공안기관이 만든 호칭이었다.
당국은 인혁당 인사들이 과거 해체된 단체를 재건해서 북한으로부터 지령과 자금을 받아
이를 민청학련에 전달하여 정부 전복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인혁당 관련 인사는 물론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민청학련 관계 학생들을 체포해서 대거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만난 일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다는 것이 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대법원 판결 뒤 18시간 만에 사형된 8명,
도예종·서도원·하재완·송상진·우홍선·김용원·이수병·여정남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느 가장들처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출퇴근을 하는 생활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침묵을 강요당하면서도 침묵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다 ‘간첩’이 됐고, 그러다 사형당하고 ,가족들은 하루 아침에 ‘빨갱이 가족’이 됐다.
그로부터 32년이 흘러 지난달 23일,(2009.1) 드디어 이들에게 무죄가 선고되고
뒤이어 검찰이 항소를 포기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사필귀정이다.
당시 신문보도에도 최초 몇 번은 ‘가칭 인혁당’이라고 표기하다가 어느 날부터 ‘가칭’이란 말이 사라지고 인혁당으로 기정사실화됐다.
얼마나 많은 시대의 양심들이 인혁당이라는 이름으로 멸시와 박해와 죽임을 당했던가.
그러나 인민혁명당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름이다.
많은 이들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모르거나, 그저 안다. 암울했던 역사의 한 토막으로 기억한다. 기자도 그랬다.
1월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관 문용선)가 재심 선고 공판에서
이미 사형된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후 역사가 ‘현재’가 됐다.
남은 가족들에게는 줄곧 현재였는데도 말이다.
1974년 4월18일 오후 유승옥·이정숙씨 집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아무 설명 없이 집을 뒤지고 책과 라디오 등을 가져갔다. 밤이 돼도 남편은 오지 않았다.
이씨는 젖먹이를 업고 남편을 찾아나섰다. 어떤 이는 중정이 있는 남산으로 가보라고 했고,
어떤 이는 형무소가 있는 서대문으로 가보라고 했다.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사흘쯤 기다린 뒤에야
스쳐 지나가는 검정색 세단을 탄 남편을 볼 수 있었다. 이씨는 걱정 말라고 소리치며 쫓아갔고 남편은 고개를 돌려 웃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그나마 생사를 확인한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아내들은 남편이 왜 며칠째 돌아오지 않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4월25일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의 사건 발표를 통해 알게 됐다.
강순희씨도 5월2일 똑같은 일을 당했다. 인혁당 재건을 위해 일했다면 중정의 발표 뒤에 몸을 피했을 텐데
강씨의 남편 우홍선은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해 회의를 하던 중에 연행됐다.
세 집에서 가져간 라디오는 모두 ‘북괴방송 청취용’으로 둔갑했다.
가장 최신형이었던 강씨네 라디오는 조서에 ‘고성능에 특수장치를 한 라디오’로 기록됐다.
그 라디오가 중정이 제시한 유일한 증거물이었다.
△ 왼쪽부터 강순희(우홍선 아내), 유승옥(김용원 아내), 이정숙(이수병 아내)씨.
구명운동 하던 아내들까지 강제 연행
남편들이 강제로 연행되고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린 뒤에도 아내들은 아직 순진했다.
정성스럽게 탄원서를 작성해 보냈다.
박정희 대통령 앞, 육영수 여사 앞, 민복기 대법원장 앞, 신직수 중정부장 앞, 황산덕 법무부 장관 앞….
강순희씨는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이 실체가 없었던 만큼, ‘재건’은 조작이라는 증거물을 찾아다녔다.
한국전쟁 당시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최전선에서 싸우다 대위로 예편한 남편을
공산주의자로 만들어놨으니 머지않아 진실이 밝혀질 것으로 생각했다.
결론이 정해져 있던 비상군법회의 ‘드라마’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남편을 살리려는 아내들의 구명운동도 치열해졌다. 아내들은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언론사에도 발이 닳도록 찾아다녔지만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곳은 없었다.
초대받지 않은 국제앰네스티 행사장에 몰래 들어가 단상에 올라 인혁당 사건의 실체를 알리기도 했다.
처음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이들은 종교인들이었다.
조지 오글 목사, 제임스 시노트 신부와 천주교 인권위원회의 함세웅 신부 등이 발벗고 나섰다.
1심과 2심에서 잇따라 사형이 선고된 뒤에도 “함부로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 기독교 회관에 모여 구명운동을 논의하고 있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아내들(위) 오글 목사 출국 명령 규탄 시위 장면. (사진/ 강순희씨 제공)
구명운동이 본격화되자 중정은 아내들까지 강제로 연행했다.
1975년 1월9일 명동성당 앞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조작”이라는 호소문을 발표한 것이 계기였다.
48시간 동안 잠을 재우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대드느냐”고 협박을 하고 폭행을 했다.
남편이 국가 전복 활동을 한 사실을 목격했다는 진술서를 강요했다.
남편들의 법정 투쟁을 지켜본 아내들은 처음엔 완강히 버텼지만, 난생처음 겪는 폭력을 견디지 못해 몇몇은 그들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중정은 허위 진술서를 받아내기 위해 최음제로 추정되는 약을 사용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물을 받아마신 한 아내는 중정 조사 직후 의지와 다르게 반응했던 몸이 부끄러워 아이들과 동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75년 4월8일 대법원은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아내들은 정신을 놓아버렸다.
다음날 오전 재심을 청구하러 가는 길에 벌써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늘이 무너졌다.
강순희·유승옥씨는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러 갈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 미국 대사관에서 시위를 벌이다 연행되는 강순희씨(위)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기습적으로 벌어진 구명 시위 장면.(사진/ 강순희씨 제공)
“분이 풀리지 않아. 살릴 수 없으니까…”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한 정권은 고인들이 남긴 마지막 말까지 조작했다. 이정숙씨는 “먼저 도착해 유언 기록을 봤던 시누이(이수병의 여동생)가 본 내용과 나중에 유족들에게 보여준 유언의 내용이 달랐다”고 증언했다. 막내였던 김용원의 유언 가운데는 동생에게 가족들을 당부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기록대로라면 고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유언을 했다. 장례시 종교의식을 거부한다고.
사형 판결과 집행 이후 쓰러져버린 유승옥씨는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마저 지켜보지 못했다. 교사 임용고시에서 전국 수석을 한 뒤 경기여고 교사로 재직했던 ‘수재’ 남편은, 그래서 죽어서도 자랑스러운 남편은 죄수복 차림으로 허접한 판자관에 담겨 땅에 묻혔다. 유씨는 그게 한이 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순희씨는 장례를 치른 뒤 100일을 누워 있었다. 강씨는 매주 산소에 가서 하늘과 땅과 세상을 향해 ‘박정희 살인마, 천벌을 받으라’고 세 번씩 크게 외쳤다. 박정희가 머리기사로 실린 신문을 꼭꼭 씹어먹었다.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몇 년을 그렇게 살았다.
아내들은 남편을 묻은 날, 같이 죽었다. 살고 싶어 산 게 아니었다.
목숨을 이어간 유일한 이유는 자식들 때문이었다. 남편의 명예회복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32년의 삶은 각자 소설 한 권씩의 분량이 됐다. 정보원과 담당 형사들의 감시는 그렇다 쳐도
이들이 맺고 있던 사회와의 끈은 모두 끊어졌다. ‘섬’에 살았다. 장사를 하고, 행상을 하고, 학습지를 돌리면서 억지로 살았다.
다시 숨을 제대로 쉬기 시작한 지는 채 몇 년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아내들에게 재심 판결에 대한 솔직한 소회를 들어봤다. 너무 오래 걸렸다고 말했다.
강씨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해결될 줄 알았다. 오늘도 산소에 다녀왔다.
당신이 힘이 있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빨리 통일이 되게 도와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유
승옥씨는 “한편으로 고마우면서도 남편이 돌아올 수 없으니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한숨만 나온다. 한마디로 너무 억울해서… 뭐가 억울하냐면 못된 짓 한 놈들이, 박정희 그놈은 죽었지만 동조해서
죽인 놈들이 우리하고 더도 말고 똑같이 당했으면…. 솔직히 무죄 판결… 분이 풀리지 않아. 사람이 없으니까, 살릴 수 없으니까….
무죄 받은 사람을 죽여놨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솔직히 한마디로 원수 못 갚고 무죄라는 것만 받아야 하나 생각하면 너무 속상하다.”
이정숙씨의 말은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범죄자들은 왜 말이 없나
강순희씨는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편지지에 적힌 시 한 편을 건넸다.
날짜를 보니 남편을 뺏기고 누워 있던 때였다. 홍기선 감독의 작품 제목마냥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며’ 몸으로 쓴 시였다.
세월아 가거라 빨리 가거라 내 슬픔을 안고 빨리 가거라 멀리 멀리세월아 가거라
첫 번째 당신을 죽인다고 할 때는 나, 묶인 당신을 바라보며 울며 몸부림치니 몸짓으로 나를 달래며 괜찮다고 괜찮다고 웃어주던 당신
두 번째 당신을 죽인다고 할 때는 나, 울지 않고 하얀 얼굴로 뒤돌아보는 당신을 향해 나를 믿으라고 내 가슴을 치며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세 번씩이나 뒤돌아보는 당신에게 가슴쳐 보이고 나, 그 길로 달렸건만 그 길이 당신을 살리는 길인 줄 알고 나, 나 그 길로 밤낮으로 쉬지 않고 달렸건만 그 모진 놈들에게 기어이 당신을 뺏기고야 말았네 원통하도다 원통하도다 어쩌다 그 모진 놈들에게 잡히었나 잡히었나
세 번째 열세 놈의 죽일 값어치조차없는 늙은이들이 당신을 죽인다고 할 때는 나, 힘껏 늙은이들을 향해 소리 질렀네
양산 하나 다 산산조각이 나도록 두들기며 소리 질렀네 바닥에 누운 채로 질질 끌려나와 거리로 동댕이쳐졌네
사람 살리시오 사람 죽이는 것 구경만 하지 말고 사람 살리시오
밤이 깊두록 목이 터져라 하고 소리 질렀네
강씨의 바람대로 세월이 빨리 가기는 했는데 의문이 들었다.
그때 그 범죄를 저지른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왜 그들은 아무 말이 없는지.
인민혁명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 초기인 1964년 8월 중앙정보부(중정·현 국가정보원)가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획책한 지하당을 조직한’ 혐의로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하면서 시작됐다.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4명 가운데 부장검사 이용훈과 검사 김병리·장원찬은 20일 동안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중정이 발표한 혐의를 찾지 못해 ‘기소할 가치가 없다’며 사표를 냈다. 김형욱 당시 중정 부장의 압력으로 서울지검 서주연 검사장이 구속 마감일 숙직 담당이던 정명래 검사에게 13명에 대한 기소장에 서명하게 했다.
1965년 1월20일 선거공판에서 도예종, 양춘우는 반공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3년, 2년을 선고받고 나머지 11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은 이에 불복해 항소심을 제기했고, 그해 5월29일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원심을 깨고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1차 인혁당 사건이 불거진 지 10년 만인 1974년 4월 중정은 유신반대 투쟁을 이끌던 전국 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배후로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23명을 구속했다. ‘2차 인혁당 사건’의 서곡이었다. 구속자 중 도예종·여정남·김용원·이수병·하재완·서도원·송상진·우홍선 8명은 이듬해 4월 사형을 선고받고, 나머지 15명도 무기징역에서 징역 15년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사형 선고를 받은 8명은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지 18시간 만인 4월9일 사형이 집행됐다. 이 사건은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건으로 국외에도 알려졌다. 국제법학자협회는 1975년 4월9일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했다.
이들은 지난 1975년 4월 9일 소위 '인민혁명당재건단체 사건'(이를 두고 우리는 ‘인혁당 사건’이라 부른다)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다음날 새벽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인사들이다.
그리고 32년이 흐른 지난 2006년 12월 23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부(재판장 문용선) 311호 법정에서는 죽은 자들에 대한 무죄선고가 내려졌다.
재판부는 이날 피고인 8인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유족들이 지난 2002년 서울지방법원에 재심을 신청했고, 법원이 2005년 12월 재심을 결정한 끝에 최종적으로 내려진 사법부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3년여의 세월이 지났다. 어제 4월 9일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희생된 민주열사를 위한 34주기 추모제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인사들은 저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행사를 보도한 <민중의 소리>에 따르면 이 날 문정현 신부는 “용산참사를 생각하면 인혁당 시절과 똑같다”면서 “당시 사형된 인사들을 화장터로 끌고가 태웠는데 용산참사 때도 시신들을 2시간도 안돼서 토막을 내놨다”고 절규했다.
재판부는 그 날의 판결로 독재정권 당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사형 선고를 받고 대법원 상고 기각 18시간만에 사형된 8명에 대한 명예를 회복시켰다. 동시에 '사법살인',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비난받았던 과거 잘못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
다시 산과 들에 진달래가 붉게 피어난 4월이다. 어김없이 그 날은 돌아왔고 8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버린 사법살인의 역사는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더군다나 경주출신으로 대구대 강사와 영주군교육감을 지낸 도예종, 대구초등학교 교사였던 송상진, 대구출신으로 경북대학교 '정진회필화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던 여정남을 비롯해 당시 민주자주통일협의회 경북협의회 부위원장이었던 하재완은 우리 대구경북 지역의 민족민주운동의 주측들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가슴 아프다.
왜, 누가 이러한 만행을 자행했는가. 인혁당 사건은 무엇인가. 만 34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왜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밖에 없는가. 2009년 4월, 왜 인혁당사건이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또 다시 납덩어리의 무게로 다가 오는 것인가.
‘세계 사법사상 최악의 사건', 박정희가 만들어낸 사악한 ‘사법살인'
▲ 재판을 받고 있는 인혁당열사들
인혁당 사건. 강산이 서너 번이 바뀌고도 남을 세월, 3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내외 사법단체들로부터 ‘세계 사법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규정되고 있는 기막힌 우리 역사의 한이다. ‘박정희 18년 독재의 가장 사악한 죄상'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1964년 8월 14일, 박정희 정권의 저승사자라 불리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인민혁명당 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여 57명의 청년들을 잡아들인다. 이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지명수배하게 된다. 그해 6월에 있었던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반정권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정권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었다.
이것이 ‘1차 인혁당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4명의 검사 중 3명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이유로 사표를 제출했다고 전해진다. 사법부도 기소된 57명의 중 12명에게만 실형을 선고했다. 그들조차도 3년에서 1년의 가벼운 형량을 선고 받았다. 1차 인혁당 사건은 독재 정권의 민심돌리기용으로 적당히 결말을 맺었다. 적어도 사법살인으로까지 가지는 않았다.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중심 ‘민청학련’ 죽이기 위해 10년전 사건 끌어내다
▲ 도예종, 송상진 등 8명에 대한 사형이 확정되자 가족들이 울부짖고 있다.
▲ 동아투위사건 등 시국 사건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제임스 시노트 신부,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지난2004년 10월 인혁당 사건을 증언한 책 <1975년 4월 9일>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10년 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터지고 만다. 바로 ‘2차 인혁당 사건'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1974년은 한국 근대사에서 반유신 독재운동이 한창이던 때로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 정권이 비상적 헌법조치인 긴급조치 4호를 발령한 시점이었다. 당시 반유신 독재운동을 주도한 학생운동 단체가 바로 ‘민청학련'이다.
민청학련은 조직적인 반유신운동을 전개할 필요성을 느낀 전국의 학생운동 세력이 전국 대학의 일제 시위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직되었다. 나아가 민청학련은 반유신 독재운동을 학생운동과 같은 단순히 특정 집단의 운동이 아닌 종교계, 학계 등의 광범위한 세력과 연계해 추진하게 된다. 따라서 민청학련은 이후 전개될 여러 노동, 재야, 민주, 통일 운동의 토대가 된다.
이러한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던 민청학련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위기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을 잠재울 궁리 끝에 10년 전 ‘인혁당'을 기억해 낸다. 민청학련의 배후세력으로 인혁당을 지목했던 것이다.
1974년 4월 3일 교수와 학생 등 무려 254명이 구속되는 대규모 시국공안사건이 터진다. 민청학련이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재건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및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정부를 전복하려하고 있다는 것이 당시 사건의 핵심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인혁당 사건의 연루자들은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를 통해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내란죄, 내란선동 등으로 기소되어 주요 주모자로 지목된 우홍선, 송상진,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도예종, 김용원, 여정남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그리고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상고심이 열린다. 대법원은 관련자 254명 중 36명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도예종 등의 8명에 대해서는 사형을 확정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튿날 가족을 만날 기회조차 없이 새벽 4시부터 시작해 차례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죽어서도 이들은 시신조차 가족의 품으로 가지 못하고 정부당국에 의해 경기도 벽제 화장터에서 태워지는 한을 안고 갔다.
이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은 많은 점에서 지적되어 왔다. 인혁당 사건의 증거로 채택된 것은 고문과 강압의해 작성된 피의자들의 진술서뿐이었다. 또한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피의자들은 가족은 물론 변호사들조차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정권은 사건을 완전히 은폐하기 위해 피의자들의 법정진술까지 조작했으며 가족들이 보관한 항소이유서와 공소장까지 압수해 사건의 증거를 모두 인멸하려고 했다는 점이 이 사건이 정권과 정보기관에 의한 날조임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수와 학생 254명 구속, 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조서까지 날조한 사기극
국제법학자회의 4월 8일을 '세계 사법사상의 암흑의 날'로 선포
▲ 대구칠곡 현대공원 '인혁열사묘역'. 이 곳에는 지역출신의 도예종, 송상진, 하재완, 여정남 인혁당열사가 잠들어 있다.
인혁당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많은 지탄을 받아 왔다. 당시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법학자 회의는 ‘인혁당 사건'의 최종판결이 있었던 4월 8일을 “세계 사법사상의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또한 세계 대다수 인권단체에서 박정희 정권을 비난했다.
당시 국내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며 이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유신체제의 부당함을 비판한 시노트 신부와 오지오글 목사는 박 정권에 의해 추방당하기도 했다. 전 세계 수 많은 인권단체와 학자들이 박정희 정권의 야만성을 성토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지난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었다고 밝혔다.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중앙정보부는 도예종 등 23명에 대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인민혁명당 재건위를 구성, 학생들을 배후조종하고 국가전복을 꾀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러한 조사결과 이를 입증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혐의는 모두 피의자의 신문조서와 진술조서 위조를 통해 조작됐음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리고 2006년 12월 23일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 법원은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 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유족들은 회한에 받쳐 오열했다. 그리고 또 다시 4월은 찾아왔고 산과 들에는 진달래가 어김없이 붉은데,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