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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범 교수 "박정희-전두환-노태우는 니혼 우익 거두 '세지마'의 충복들" 폭로 "개발독재'-'올림픽'은 세지마의 조언"··· 방한해서 노태우 칭찬도.. | ||||||||||||||||
“특히 그가 주목받는 것은 박정희의 자문역으로 활약했고 수출주도형 종합상사체제의 개발 드라이브를 박정희에게 직접 제시하고 지도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두환에게는 민심수렴을 위한 ‘올림픽유치’를, 노태우에게는 대통령제의 문제점에 관한 대책강구(내각제)를 조언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한국 군사정권의 전임 대통령들은 모두 니혼우익의 거두 "세지마 류조"의 충복이었다.
한 교수는 △세지마 류조와 한국의 친일수구 부류와의 관계와 △제국주의에 대한 세지마의 변호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주일한국대사가 세지마 앞에서 앉지도 못하고 부동자세로 있었다는 충격적인 일화를 밝히기도 했다. 박정희 ‘수출종합상사’ 전두환 ‘올림픽’은 스승 세지마의 조언 세지마 류조가 모델이 된 "야마사키 도요코"의 소설 ‘불모지대’는 한국에서 몇 출판사에서 발간된 인기물로 한 때는 한국기업의 우경엘리트와 군부일각에서 필독 참고서처럼 읽혔다. 세지마 류조의 회상록(산케이 · 신문, 1995년, 419쪽 이하)에 따르면 세지마는 수출주도형 종합상사체제의 개발 드라이브를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직접 제시하는 등 박 전 대통령의 자문지도역으로 활약했다. 박 전 대통령의 뒤를 이은 전두환·노태우정권도 세지마의 제자를 자청했다. 모 재벌총수의 주선으로 세지마를 만난 전임 대통령들은 국가정책의 기본사항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을 구해왔으며 전두환의 경우 12·12쿠데타를 앞두고 니혼대사에게 미리 보고했다는 점을 공개해 눈길을 모았다(영국 웨릭대학 학위논문, 국내 2002년 국제정치 논총(박선원, ‘냉전기 한일협력의 국제정치-1980년 신군부등장과 니혼의 정치적 영향력’ 국제정치논총 제42집 3호 2002년 한국국제정치학회). 세지마는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민심 수습을 위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는 ‘올림픽유치’를 제안했고,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니혼식의 내각제를 제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태우, 니혼이요 열창으로 세지마의 칭찬 받아 이 중에서도 노태우 씨의 경우는 대통령 퇴임 후 처신과 공적 과업에 대해 직접으로 지도를 청했으며 세지마의 방한 시 술좌석에서 니혼의 인기 여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를 열창해 칭찬을 받기도 하는 등 ‘한심한 수준’의 충복노릇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일제 국수주의 교육과 제국대학간판 그늘에서 잔뼈가 굵어온 친일파들의 니혼숭배는 니혼사회의 산업발전뿐 아니라 문화나 정신 전반에 영향을 받아 사실상 90%는 정신적 문화적으로 니혼 극우와 닮은꼴이 되어 있다는 것. 한 교수는 “친일파 부류가 니혼제국의 정신과 업적(?)을 숭상하고 찬양하고 추종하는 심정과 자세는 결코 어느 특정인에 한정되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라며 한승조 씨를 비롯한 부류들을 꼽고, “문제는 일제잔재청산 개혁에 대한 우리 기성세대의 지체와 망설임이 치명상이 되고 있는 것을 반성하고 재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세지마, ‘한국 식민지는 잘된 일’ 세지마는 기본적으로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에 대해 ‘잘된 일’로 평가하는 니혼의 극우주의자. 그는 국가정책의 방향과 구상을 밝힌 그의 저서 ‘우리 니혼에 대한 제안()-조국재생 (PHP연구소 폄, 1997년)’에서 이런 견해를 밝히고 있다. 세지마에 따르면 한국의 식민지화는 당시의 국제정세로 볼 때 당연한 조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견해는 한국의 박종규(박정희 경호실장), 한승조(박정희 추종 교수) 등을 비롯한 대부분의 친일파와 그 아류가 취하고 있는 입장에서 반영되고 있다(같은 책, 94쪽 이하). 한 교수는 “니혼의 아시아정책은 미국과의 동맹을 기본 틀로 해야 한다는 것이 세지마의 주장”이라고 말하고, “이런 입장은 오카사키 히사히코와 같은 지정학적 전략론과도 일치하는 우익극우의 공통된 입장”이라며
한 교수는 “이런 세지마를 한국 전경련은 자문위원으로 모셔서 예우하고 있었다”며 세지마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했다. 한 교수는 세지마가 1990년대에 전경련 초청으로 내한했을 때 이 문제를 제기해 전경련 측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고 이는 당시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도 기사로 보도됐지만 전경련 측은 “정치와 무관하다”며 답변을 회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교수는 “세지마를 비롯한 니혼 극우수구의 입김이 한국 곳곳에 배어 있다”고 지적하고, “1961년부터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친일파 군인의 지배 속에서 30여년 동안 친일명사(?)가 이 나라를 주름잡으며 더럽히고 망쳐놓았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보수의 뜻도 모르면서 무슨 보수우익 “보수의 본래 의미라고 할 수 있는 서양 사회과학의 정의에 따르면 이들은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근대 보수주의의 사상적 원조라 할 수 있는 에드먼드 버크에 의하면 보수할 것은 전통을 중심개념으로 해서 사회관이나 인간관, 진보관 등에서 인간 이성과 합리주의의 한계를 강조한다.” 한 교수는 “한국의 자칭 보수우익의 정체는 사실상 진정한 보수와 거리가 멀다”며 ‘사이비 보수우익’으로 폄하했다. 또 한국의 보수우익을 서양의 사회과학의 정의와 비교하며 “보수주의자도 아니다”라고 신랄한 비난을 날렸다. 그는 ‘보수우익을 자처해 온 부류’에 대해 △주로 친일파 및 그 아류와 추종자로 민족주의자가 외세의존의 부류라는 것 △이들은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아니며 그들이 보수한 것은 구부패기득권 △자유 민주주의를 자처하면서도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거부 △참된 의미의 자유주의는 반공이 아니라는 점 등을 지적했다. 한 교수는 “한국의 보수우익은 매카시즘에 매몰돼 반대파에 대한 압살·모략·비방으로 일관했으며 관용성이 결여됐다”며 “보수우익을 자처할 수 없는 세력”으로 규정했다.
세지마 류조 앞에선 주일한국대사도 서서 부동자세 니혼의 인명사전에 수록된 ‘니혼 군국주의의 신화적 인물’ 세지마 류조의 프로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산세이도, 콘사이스 니혼인명사전 참조). 1911년 출생. 육군사관학교 우등졸업, 육군대학 수석졸업. 1939년 다이홍에이(니혼 최고통수부)부원 2차 세계대전 등 작전기획 참여담당. 1945년 만주관동군 참모(중좌) 박정희 등 만군 하급장교인 한국인 일제군인의 최고상관이 됨. 이 관계는 한국군 군대의 일제군 출신 모두의 장로로 그가 예우되게 됨. ㅊ아무개는 일군출신으로 예비역 예편으로 박정희 밑에서 주일한국대사가 되었는데 세지마 앞에서는 앉지도 못하고 부동자세로 그의 말을 경청하는 정도였음. 니혼제국주의의가 패전하자 세지마는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억류. 니혼 전범재판 당시에는 소련군 측 증인으로 출석 증언. 그 일에 대해선 소련 정보기관과의 석연치 않은 설이 분분하다(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 세지마류조 참모(參謀)의 소화사(昭和史), 문예춘추사, 2000年, 23쪽 및 63쪽 이하 참조). 시베리아에서 귀국 후 1958년 이토추상사 취직. 1972년 부사장, 1978년 회장, 1981년 상담역. 그는 제국군대의 전략 전술을 기업경영에 적용해 성공한 사례로 인정되고 있음. 나카소네 수상시절 임시행정개혁추진심의회 회장으로 활약. 나카소네 수상(1982년-1987년)의 정책참모이고 니혼 우익 군국주의 수구의 장로격. | ||||||||||||||||
2005/03/21 오후 7:37 |
첫댓글 기성세대와 부패기득권 세력이 과거사 정리 문제에 대하여 '지체' 와 '망설임'을 계속하는 것은 그들자신이 정리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코 지체와 망설임을 거주지 않을 것이며 최근의 경우에서 보듯이 오히려 역습(?)을 하는 지경입니다. 그러니 그 세력의 외부에서 이들을 정리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있고
당연한 것이며 역사의 단죄를 위하고 재발의 역사를 막기 위해서 냉정한 책임을 물어야 된다고 봅니다.... 일군 출신 주일대사가 부동자세로....이런것들이 우리군을 지금까지 차지하고 있으니 기차 찹니다. 현직 군인이 전투중 적에게 부동자세로..차라리 받들어 총을 하지 그러냐. 더 이상 할 말 없습니다.
솔직히 제 심정을 말하자면, 암세포는 잘라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한국 국방부에 소속된 모든 똥별들부터 잘라내고, 썩어빠진 영관급도 추려서 모두 잘라내고, 하는 방식으로 한국군 전체를 뒤집어야 진정한 자주국방을 이룩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