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부터 남달랐던 ‘어학의 천재’ 신숙주
신숙주와 성삼문.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세종의 집현전을 묘사할 때 세트처럼 등장한다. 신숙주는 1439년, 성삼문은 1438년 각각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신숙주가 더 많은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과거에 3등으로 급제했으며, 어학 천재로 불렸다. 대제학을 역임했고, 뛰어난 학문과 문장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장의 아들이라는 후광도 더해졌다. 이에 비해 성삼문 합격등수는 33명 중 29등. 돋보이기에는 힘든 성적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 성삼문은 세종의 눈에 든다. 그의 잠재력과 인품을 알아본 세종은 그를 집현전 학사로 발탁했고, 신숙주, 박팽년, 이개 등과 사가독서(능력 있는 젊은 문신에게 유급휴가를 주어 학문과 독서에 전념토록 한 것) 인원으로 선발됐다. 이후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여러 책의 편찬에도 관여했다. 중국학자에게 자문을 받기 위해 여러 차례 중국을 오가기도 하였는데, 항상 신숙주와 함께할 정도로 우정이 돈독하였다고 한다.
계속 붙어서 일을 하다 보니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하고 경쟁심을 갖는 모습도 나타나긴 했다. 그렇지만 나이도 한 살 차이. 세종의 관심과 격려를 받으며 집현전에서 같이 생활하고, 같은 프로젝트에 참여하다 보니 끈끈한 유대감을 갖게 되고, 상대에게 배우며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원칙이 무너지고 도(道)를 따를 수 없는 상황이 와도, 지조를 잃지 말고 올바름을 지켜내라는 것이다. 곤궁함을 감내해야 할 때 벼슬을 위해 정치에 참여하면 덕을 해치게 된다는 의미다. 훗날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지지한 신숙주의 행보를 여기에 대입시켜본다면, 성삼문의 시는 일종의 경고처럼 느껴진다.
성삼문이 옳고 신숙주가 틀렸다는 건 아니다. 그가 단종을 지켜달라는 세종과 문종의 부탁을 저버리고 수양대군을 선택한 것이 부귀나 권력만을 원해서가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아직 조선의 기틀이 완전히 다져지지 않은 상황에서, 신숙주는 단종보다 세조가 임금의 자리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하관 대상 중시에서 장원 차지한 성삼문
성삼문은 원칙을 고수했고, 신숙주는 현실에서 옳다고 생각한 목표를 위해 원칙에서 이탈하는 것을 감수했다고 볼 수 있다. 1447년 세종은 요즘의 논술시험에 해당하는 ‘책문’에서 아래와 같이 출제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 법을 만들었는데, 그 법에서 다시 폐단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성삼문은 장원하고 신숙주는 4등을 차지했다.
성삼문 : 새로운 법을 만들 필요 없이 지금의 법을 잘 지키되, 왕의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통치자의 마음이 올바르면 상황을 바르게 인식, 판단하고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으니 좋은 정치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숙주 : 상황이 변하고 시간이 흐르면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폐단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현실을 직시하고 시의적절하게 법을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폐단이 누적될 틈을 주지 말고 능동적으로 대응하자는 것이다. 성삼문이 원칙을 중시했다면 신숙주는 현실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세종처럼 이상과 현실, 원칙과 실리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군주가 계속 통치했다면 달랐겠지만, 세종 사후 권력 공백이 발생하고 정치적 혼란기가 도래하면서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신념에 따라 갈라서고 만다. 세종을 보좌해 눈부신 성과를 이뤘던 날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첫댓글 옛날의 사건을 지금의 우리가 판단하기는
조금 그렇고
그시절에는 충의를 잣대로 사초에 썼으리니
워낙 비교되는 두 분인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