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6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아모스 9,11-15 마태오 9,14-17
나쁜 놈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나쁜 놈’은 ‘나뿐인 놈’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나쁜 사람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요?
나쁜 사람은 누구도 그 사람을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을 만큼 사랑해주지 않아서 생깁니다.
누군가를 위해 살 대상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약에 중독되어 3번 죽을 뻔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의 어머니만은 그를 믿어주었습니다.
못된 친구들과 어울릴 때도 어머니는 믿어주었습니다.
술과 마약을 하고 새벽에 들어올 때도 어머니는 깨어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대화 좀 하자고 할 때 마크는 짜증을 내고 방문을 꽝 닫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믿어준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자신과 대화 한 번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어머니가 믿어준 대로 나쁜 친구들을 끊고 술과 마약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최고의 프로레슬러가 되었습니다.
이제 어머니를 편하게 모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일본에서 경기를 마치고 새벽에 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가 내리는 거리를 뛰어나가 울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돌아가신 어머니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일어나요. 엄마가 저의 영웅이에요.
저의 모든 것, 제가 되길 원하는 모든 것은 다 엄마를 위해서였어요.
저를 믿어준 건 오직 엄마뿐이었어요.”
그리고 청년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진짜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지금은 청년들을 위해 전 세계 강연을 하러 다니는 전직 레슬러 ‘마크 메로’(marc mero)의 이야기입니다.
어린이들을 생각해봅시다. 어린이들은 누구를 위해 살까요? 보통은 부모를 위해 삽니다.
부모를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따라서 부모가 나쁜 사람이 아닌 이상 부모 덕택으로 아이들은 어느 정도 나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사랑을 제대로 주지 않을 때는 아이들은 부모에게 원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 살거나 그것도 안 되면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나쁜 아이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이들을 잡아줄 수 있는 나이는 밥을 차려줄 때까지만 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때 부모를 위해 살아야 할 이유가 줄어듭니다.
이때 자신을 잡아줄 새로운 부모님, 즉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자동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면 나쁜 놈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살아도 대부분 그 이웃들에게 이용당하고 상처받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하느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영원한 아기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힘들 때 의지할 신을 찾습니다.
찾아서 그 신을 위해 살면 다행이지만 찾지 못하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단식은 좋은 것입니다.
자기를 절제하면 덜 나쁜 사람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단식하면서도 그 단식이 자기 자신을 위할 때는 그 사람이 나쁜 놈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단식을 하더라도 당신을 위해 하라고 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같은 단식이라도 자신을 존재하게 해 준 하느님을 위해 한다면 그것이 좋은 것이나, 그 단식만의 가치 때문에 한다면 결국 그것도 자기 영광을 위해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이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비록 구약에 있었던 가르침과
다르지 않으나 새로운 가르침인 이유는 그 모든 율법을 당신을 위해 지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절로 나쁜 놈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특정한 날을 중시하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중시하는 것이고,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도 하느님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가려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가려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6-9)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합니다. 자크 라캉이란 학자가 한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살게 창조되었습니다.
성자께서 성부를 위해 사신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도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살라고 하시는 이유는 당신이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나쁜 놈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 때 나쁜 놈이 됩니다.
이는 부모가 아이들이 비뚤어지지 않게 하려고
아이들이 자신에게 순종하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나쁜 놈이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우리 하는 모든 일이 주님께 영광이 되려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아야 나쁜 놈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6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9,14-17
비록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한 아이의 출생이 과거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었는데, 저출산 시대인 요즘은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마을 주민 전체가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다들 아이 얼굴 구경하러 가고, 마을 입구에는 축하 플래카드까지 내걸립니다.
사실 이게 정상인데, 그동안 우리는 비정상이 정상이 시대를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청춘 남녀들이 결혼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시대를 살다 보니, 결혼식이 거행되고,
주님 안에 한 커플이 탄생하는 것이 엄청난 일로 여겨집니다.
요즘 우리 모두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결혼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 혼인이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고, 두 가문이 만나고,
두 가치관과 두 세상이 만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혼자 살아왔는데, 이제는 함께 걸어줄 동반자가 생긴 것입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할 평생 동지가 생겼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기쁨인지 모릅니다.
이토록 기쁨 충만한 혼인 잔칫날에 어두운 표정으로 인상 쓰고 있다면 예의에 크게 어긋나는 일일 것입니다.
잘 차려진 축하연에 단식한다며 숟가락조차 들지 않고 우울하게 앉아있다면 그것보다 더 꼴불견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혼인 잔치의 가장 기본적인 분위기는 축제입니다.
함께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며 축제를 즐기고 만끽하는 것은 혼인 당사자 입장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딱 마음에 드는 짝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우리를 위해,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해 세상 멋진 신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그분과 이 세상, 그분과 그분의 신부인 교회, 그분과 우리 죄인의 혼인을 의미하는 대 사건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매일 새롭게 결합되고 한 몸이 됩니다.
매일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과 우리 사이의 혼인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세례 성사를 통해 주님과 혼인한 우리는 매일의 성찬례를 통해 그 혼인을 갱신한다니, 이 보다 더 큰 은총과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따라서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하루 하루는 매일이 기쁨 충만한 축제여야 마땅합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우리의 이 지상 순례 여정이 비록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매일 주님과 혼인하고, 그 혼인을 갱신하는 우리들이니, 얼굴을 활짝 펴고,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축제를 만끽해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7월6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9,14-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유다인들에게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은 스승의 영향을 받아 자주 단식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별로 단식하지 않았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4절) 묻는다. 예수께서는 결혼식을 예로 들어 설명하신다. 그들의 결혼은 집에 있으면서 일주일 동안 가까운 친지들을 불러 기쁨의 축제를 지냈다. 이때에는 모든 율법의 의무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즐길 수 있었다. 그때에는 단식의 의무에서도 해방된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신랑에, 제자들은 신랑의 친한 친구들로 비유하신다. 그러한 잔치에서 슬퍼하며 단식할 수 없다. 그때는 단식할 때가 아니고 즐기는 때이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을 빼앗기고 슬퍼하는 것처럼, 예수의 제자들도 신랑을 빼앗기고 난 후 단식을 하게 된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영광을 입으시고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가시고 나서 제자들은 단식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요 잔치이다. 주님과 함께 있는데 슬픔과 어두움이 있을 수 없다. 주님을 모시고 항상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하며, 내 잘못으로 주님을 모시지 못했을 때는 우리는 기도하고 단식하며 자선을 베풂으로써, 주님을 다시 모셔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에 매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16-17절). 수축이 강한 새 천을 찢어서 헌 옷을 깁는 사람도 없지만, 새 포도주도 발효가 심하므로 수축 작용이 거의 없는 가죽 부대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려면, 지금까지의 고정화된 나 자신의 틀인, 헌 옷이나, 낡은 가죽 부대를 버려야 한다. 내 마음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화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모두 복음을 새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