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시가 있는 월요일] 비와 슬픔
오늘 비는 아무에게나 슬픔을 나눠 준다 우기에는 네 슬픔이 옳았다 오래오래 젖다가 수채화 같은 슬픔이 온다는 말, 몹쓸 흉터에서 잎사귀 같은 불행이 생겨난다는 말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사과나무 가지 끝 풋사과 옆이 무너졌다 나도 저렇게 슬픈 데를 씻다가 무너졌다 슬픔이 없다면 슬픈 게 여럿이던 나도 없을 것이다 (중략) 짧게 말할 수 없어서 슬픔은 머리카락이 길고 형용사처럼 영롱하다 우기에는 슬픈 게 슬픈 걸 찾아낸다 슬픔을 그만둘 수 없는 자들이 맹렬하게 기쁨을 잃는다 점 하나 없는 슬픔 언제 그칠까?
ㅡ최문자 作 <우기>

■ 비는 환희보다는 슬픔과 더 가깝다. 비가 오는 날 꺼내 읽게 되는 시다. 마침표 하나 없는 산문시인데도 리듬이 살아 있어 물 흐르듯 읽힌다. 우기에 생각하는 슬픔에 관한 단상이다. 깊고 그윽하고 낭만적이다. "우기에는 슬픈 게 슬픈 걸 찾아낸다"는 구절은 훔쳐오고 싶을 만큼 빼어난 절창이다.
좋은 시에는 발걸음을 멈춰서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시가 그렇다. 몇 번을 멈춰서서 다시 읽게 된다
"몹쓸 흉터에서 잎사귀 같은 불행이 생겨난다는 말" 그 말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그렇다. 비에는 앞만 보고 가던 발걸음을 거두어들이게 하는 힘이 있다. 비는 멈춤이고 사색이다. [허연 문화전문 기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