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 정교분리 노선의 허구성과 교회의 정치적 역할
2베드 3,12-18; 마르 12,13-17 / 연중 제9주간 화요일; 2024.6.4.
오늘 말씀의 초점은 성모 찬송을 선포한 마리아 방문 축일의 말씀과 성체 신심 및 성혈 영성을 선포한 성체 성혈 대축일의 말씀에 이어서, 성모 찬송에 담긴 파스카 과업을 이룩해야 할 교회의 정치적 역할과 성체 신심 및 성혈 영성의 균형을 실천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 있습니다. 복음 말씀이 소개하는 상황은 하느님의 적대자들이 이 역할과 사명을 방해하는 교묘한 계략을 폭로하는 한편, 독서 말씀은 이 역할과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 자세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먼저,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 다음 날에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 앙갚음하려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올무를 씌우려다”(마르 12,13) 판정패를 당한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바리사이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지지하고 있었고 그 반대로 헤로데 당원들은 로마의 간접통치에 부역하고 있었는데, 성전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정치적 앙숙인 이 두 패거리를 한데 묶어 예수님께 보내서 세금 문제를 여쭈어 보게 한 것입니다.(마르 12,14) 잔꾀를 내어 올무를 씌우려 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올무를 씌우기는커녕 아무 소리 못하고 물러서야 했던 배경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형식논리상 함정을 피해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하고 명쾌하게 대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위선적 의도로 그럴싸하게 꾸민 함정 질문으로 도전 받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이 도저히 반박할 수 없게끔 완벽한 형식논리와 상황윤리로 곤경을 모면하고자 하신 답변이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정치에 관한 예수님의 본격적인 가르침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치에 관한 본격적인 가르침이 나왔던 때는 이렇게 세금논쟁으로 판정패를 당했던 바리사이들이 재차 올가미를 던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 적대감을 품은 사두가이들은 사형집행권이 없었으므로 그분에게 신성모독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로마 빌라도 총독으로 하여금 사형을 언도하고 십자가형까지 집행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신성모독과 같은 종교적 혐의로는 로마 총독으로서도 로마법상 사형을 시킬 수가 없으므로 바리사이들은 사두가이들을 제치고 약삭빠르게 전면에 나섰습니다. 즉, 유다인의 왕이 되려 했다는 정치적 혐의를 그분에게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사실 이 혐의는 터무니 없는 것이었습니다.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혐의의 발단은 5천 명이 넘는 많은 군중을 카파르나움 평원에서 먹이신 기적 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눈 앞에서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정도로 늘어나는 기적을 목격한 군중은 열광했습니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 군중이 기억해 낸 ‘그 예언자’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제정하여 전해 주었지만 종말의 때에도 자기와 같은 지도자가 나타나리라고 내다보았던 바에 근거하여 나온 종말의 예언자를 말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 18,15). 이 종말의 예언자가 출현하리라는 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던지라 예수님께서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셨을 때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며 그분께 임금이 되어 달라는 기대와 요구를 해 왔던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나온 군중의 기대와 요구에 대하여, 군중 속에 끼어 있었을 바리사이의 끄나풀들은 자신들의 지도자에게 카파르나움 평원에서 일어난 이 기적 사건에 대해 보고를 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빌라도 총독을 내세워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판결하기 위한 비장의 술수로 삼았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임금이 되실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오히려 그 기대와 요구를 피하여 자리를 피하셨을 뿐만 아니라 집요하게 쫓아온 그들에게 ‘생명의 빵’에 대해 가르치셨을 뿐입니다. 하지만 일단 그분을 죽일 음모를 꾸미려 든 바리사이들에게는 실제 진실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었고 그저 형식 논리상으로라도 그분을 사형을 당할 만한 정치범으로 옭아 맬 수 있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민낯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아무런 죄가 없음을 알게 된 빌라도는 그분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지만 그분은 초연하셨습니다. 즉, 사형권과 사면권을 모두 쥐고 있는 총독 앞에서 피고로 서 있는 처지이시면서도 그분은 정치적 반란혐의를 인정하지도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항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시다가, 이렇게 몇 마디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 크다”(요한 19,11)
이렇듯이, 예수님께서는 정치권력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시면서도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들과 다르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최고선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공동선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의 나라들과는 구분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평소에 공동선에 불충실한 정치권력을 비판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섬김의 자세와 행실을 강조하시던 가르침에서 나온 것입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루카 22,25-26).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세속적인 통치로 이루어지기 마련인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 진리로 다스려지는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오고, 이 다가옴을 서로 섬김으로 맞이하라는 이 말씀이야말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하고 따라야 할 본격적인 가르침이요, 정치적 역할과 사명의 메시지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평소에 몸소 솔선수범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것처럼, 베드로 사도 역시 불의한 세속 권력자들이 저지르는 무법한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어버리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가능한 한 그날을 앞당기도록 힘써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2베드 3,12 참조) 이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2베드 3,13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막연하게 수동적으로 행하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분의 언약’에 따라 기다리기는 하지만, 그분의 가르침과 솔선수범에 따라 서로 섬기는 실천을 통해 능동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적 현실을 창조하고자 노력하는 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주도권을 믿고 의지하되 우리의 믿음과 노력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