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구원받은 자가 나중에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나?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벧후 2:21)
“너 자꾸 아빠 말 안 들으면 호적에서 지워버릴 거야.” 이렇게 말하는 양부모가 있다면 그 입양아의 심정이 어떨까? 교육상 바람직할까? “너는 나랑 같이 살면서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내 자식인 것만은 변함이 없다. 나는 너를 절대로 안 버릴 거야.” 감성적으로는 이렇게 위로해주는 양부모가 더 따듯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성경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입양한 자녀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실까?
신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한 번 구원받은 자가 나중에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나?’ 하는 문제다. 이 이슈를 놓고 개신교 안에는 크게 두 갈래로 의견이 나뉜다. 존 칼빈을 창시자로 둔 장로교의 칼빈주의자들은 “한 번 구원받은 성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존 웨슬리의 가르침을 따르는 감리교와 성결교의 웨슬리안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한 번 구원받은 성도도 순종 여부에 따라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견해가 다 성경을 토대로 하고 있어 복음주의적이고도 성경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문제를 놓고 웨슬리안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중요한 성경적 근거들 중 하나가 바로 베드로후서 2장 20-22절이다. 이 구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고 의의 도를 안 후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거룩한 명령에 순종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벧후 2:21).
그 명령에 불순종한 채 다시 세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면 차라리 예수님을 안 믿었던 게 낫다고 말한다. 자신들의 불순종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합리화하며 스스로 회개의 기회를 저버린 채 살아가기 쉽고, 믿음의 길을 같이 걸어가는 다른 동료 신자들까지 실족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벧후 2:20).
문맥상 베드로가 이 대목에서 지칭하는 ‘그들’은 당시 초대교회를 어지럽히던 거짓 교사들이었다. 그들은 한때 정통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그들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벧후 1:9) 자들이거나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벧후 2:20)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한 번 믿고 구원받았다가 타락한 사람들의 전형이다. 이 대목만으로 보면 성경은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인 것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성경에서 이런 가르침은 이 구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는 말씀을 들 수 있다. 이 말씀에 나오는 타락한 이들이 이전에 한 번 십자가의 은혜로 구속받았던 자들이 아니라면, 타락한다 해도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짜로 한 번 신자가 된 적이 없었던 자들은 배교할 수도 없다. 배교라는 말 자체가 한때 진정으로 믿었던 진리를 배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히 10:26). 포도나무에 가지로 한 번이라도 붙어 있었던 적이 없는 자에게는 밖에 버려져 말라 불살라지는 일도 없다(요 15:4-6).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마 7:19).
예수님께 달란트나 므나를 받은 자들은 다 구원받은 종들이었지만, 아무런 이윤을 남기지 못한 종들은 그들 각자가 원래 가졌던 하나의 달란트나 므나마저 빼앗긴 채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난다(마 25:24-30, 눅 19:20-26). 므나 비유에서 예수님은 세 유형의 종들에 속하지 않은 비신자들에 대해서는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눅 19:27)이라고 따로 지칭해서 구원받았던 종들과는 엄연히 구별하신다.
신자가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베드로의 경고를 뒷받침해주는 구절들은 구약성경에도 적지 않다. 이스라엘 백성은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신 30:9)라는 하나님의 초대에 응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 응대는 구원의 여정의 출발점일 뿐 그 자체로 끝이거나 완성이 아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사 1:19-20)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면 그가 그 가운데에서 죽을 것”(겔 33:18)이라고 거듭 천명하셨다.
이런 말씀들은 처음에 믿었다가 나중에 신앙을 떠나는 신자들은 애초부터 진짜 신자가 아니었다는 식의 이해는 성경적 근거가 확고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심지어 칼빈주의자들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는 성경 구절들도 전후 문맥을 들여다 보면 다른 해석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신자를 끊을 수 없다(롬 8:38-39)는 바울의 말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롬 8:35)을 무릅쓰고 주께 충성한 자들에 한해서만 적용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이셨다. 그 예수님을 구원자요 주님으로 믿는다는 건 구속의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지적 동의나 고백만이 아니라 실제로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건짐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상에서 죄를 미워하는 영적 분별력을 갖고 죄를 이기는 성령의 권세 또한 받아 누린다는 것이다. 구원의 여정은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바뀐 신분에 걸맞게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거룩한 주의 사람으로 사는 것까지다. 속죄와 세례의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그 성화의 과정을 거쳐 가나안땅 천국에 이르고 나면 죄의 존재 자체에서 벗어나는 영화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거룩한 삶에 대한 실질적인 권세가 없다면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찰스 스펄전은 <목회자 후보생들에게>(생명의말씀사)라는 책에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입장을 사람의 신학으로 조화시키려 하거나 어느 한 쪽의 완승만을 노리려 하기보다 둘 다를 성경에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때에 따라 목회적 강조점을 달리하는 게 최선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구원의 여정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함께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다 중요하다. 이 두 영역 중 어느 하나를 더 강조하거나 덜 강조하는 데서 신학적 입장이 나뉜다. 그러나 두 입장이 백중세라면, 단 한 번뿐인 삶에서 행여라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주의 말씀에 신실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고 뒤늦게 후회할 일 없는 지혜로운 선택이 되지 않을까?
물론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나의 어떤 힘이나 공로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의 인도하심 가운데 성령충만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처음부터 내 공로나 자랑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다. 오히려 “내가 분명히 믿었는데 왜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거냐?”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내용은 무시한 채 믿었다는 그 특정 행위 자체에만 의존하려는 영적 나태함의 위험성이 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행하시면서도 자녀의 자유의지와 책임 또한 동시에 존중하신다. 진정한 사랑의 요건은 강제적이지 않은 데 있다. 제한 없는 무조건적인 보호보다 부모에 대한 사랑을 자발적으로 성숙시켜가도록 끝까지 격려하고 때마다 힘과 지혜를 더해주는 것이 자녀를 향한 부모의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나님 편에서는 항상 어떤 입양아도 차별하지 않고 끝까지 붙잡아주시길 원하신다. 그런데 입양아가 스스로 그 사랑을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끝내 가출해버릴 경우 매번 무조건 억지로 막으시지도 않는다.
만일 막는다면 베드로의 말은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다시 붙잡아 들여 억지로라도 그 명령을 지키게 하신다.” 더구나 베드로는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 4:18)라고도 부언하는데, 조나단 에드워즈도 <신앙감정론>(부흥과개혁사)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영생을 얻는다”는 말로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또한 월터 카이저를 비롯한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IVP 성경 난제 주석>(IVP)에서 베드로후서 2장 20-22절을 해석하며 종합적으로 내린 결론 역시 동일하다.
“구원이란 죄로 가득한 삶의 방식을 회개하고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돌아가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죄의 힘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림이 없는데도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있으리라는 생각을 단 한 순간이라도 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특히 그들이 자신의 죄를 전혀 슬퍼하지 않거나 그 죄를 버리려고 하지 않을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더군다나 이런 사람들도 하늘로 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게 말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만드는 일이요, 다른 이들에게도 하늘에 이르는 ‘쉽고 편한 길’이 있으니 진정 그리스도께 그 삶을 바치지 않고도 하늘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안환균, <주만나>(꿈이 있는 미래) 2021년 3월호 바이블 칼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