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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를 읽고...... ( 퍼온글 글쓴이, 임 충규 )
국민학생 시절을 떠올리면 나무로 마루를 깐 긴 복도가 생각난다.
복도의 벽에는 위인들의 큰 액자가 많이 걸려있었는데
강감찬, 을지문덕,유관순등이었고 그 중에서도
이 순신장군은 일대기 형식으로 그림들이 줄줄이 걸려있었다.
장군의 어린시절 전쟁놀이하는 모습, 마당에는 닭이 모이를 ??고
사랑에서 모친과 담소하는 모습, 과거장에서 낙마하여 버들가지로
부러진 뼈를 고정하는 모습, 모함을 받아 달구지에 실려가는 모습,
또 명랑에서 큰 대첩을 이루는 모습과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며
마지막으로 전사하시던 모습들이 금박을 입힌 액자에 그려져
장엄하게 어린 시절 복도의 끝까지 걸려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몇학년 쯤엔가는 치워지고 애들 그림이나 동시가 걸려서 모르는 사이에
장군은 일상에서 멀어졌다. 그러다가 아산 현충탑으로 참배를 갔던
중학교 수학여행때에 장군은 감개무량하게 기억속에 떠올랐고 고등학교때는
원균이 사실은 나쁜 놈이 아니라는 이색적인 책을 읽어서 국어시간에
선생과 열띤 토론끝에 욕을 얻어 먹었고 이제 나이가 들어 조선의 장군이
일본놈을 얼마나 죽였는지는 별로 대수로운 일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5.18때 얼마나 죽었는지가 더 궁금한 시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몇달전에 역사추리인가 하는 TV 프로그램에서 원균과 김유신을
공정하게 놓고 평가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이 것이 이순신장군이 400년의 시공을 건너뛰어 나와 맺어둔 연결고리였다.
그런데 오늘 장군의 '난중일기'를 읽고 나니 그 추상적 위인이
살과 피를 갖춘 한 사람의 인물이 되어 내 앞에 우뚝 서는 것이다.
어쩌면 장군은 구국의 영웅으로써의 뼈만 남고 피와 살이 될 인간적인
모습들은 후세의 정치하는 양반들과 전설만을 좋아하는 이야기꾼들에 의해
다 사라져벼렸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난중일기를 읽으면 장군이 항상
긴 칼 빗겨차고 수루에 홀로 앉아 전쟁 7년동안을 근엄한 얼굴로 있었던
분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분은 동네이장처럼
술에 자주 취하고 놀기를 좋아하신 분이셨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있는가?
병법서에 보면 전쟁이 났을때에 장군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여러부분에서
지적하고 있지만 이순신장군을 병법서의 모범장군과 일대일 비교하는게
가능할까? 오늘 장군의 난중일기를 접하니 비로소 '육도삼략','오자서',
손자병법'등이 이론서일뿐 실전의 기록은 아님을 알수 있었다.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장군이 낭랑한 목소리로 시조를
읊으셨을 그때의 그 밤에 나는 난중일기를 읽었다.
"강림산 비껴질러 달은 넘어가니 사방이 적막하고 기운은 고여하여라.
자세 바로 하고 홀로 책장을 넘기니 장군은 눈앞에서 기침을 하여라"
기침하는 장군 이순신.....
그렇다. 의외로 장군은 난중일기에 보면 몸을 많이 앓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몸이 아주 편치 않았다.......신음으로 밤을 새웠다" 이러한 구절이
군데군데 발견되는 것이다. 또 " 땀을 많이 흘려 새벽에 옷을 갈아입었다"
라는 구절구절에서 보면 장군은 강인한 체력을 소지한 분이 아니셨다니
놀랍다. 난 그야말로 이날 이때껏 장군은 기운센 천하장사로 알았었으니....
중년을 넘어선 장군의 나이에 피로가 쌓여서 그리된 것일까? 하지만 아니다
의외로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하고 호남쪽엔 적이
거의 출몰하지 않았기에 장군의 일상은 매냥 술먹고 노는 것이 일이었다.
그렇다면 40대의 피로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장군은 몸이 약했던 것이다.
오호! 장군은 몸이 약하셨구나....끌끌.
술 잘먹는 장군 이 순신....
오자병법의 오자서가 그렇고 손자병법에서 최고로 높이치는 '덕장'이라는
장수들은 군졸들과 먹는 것 자는 것을 같이한다고 했는데....
이 순신 장군은 휘하 장수들과 전쟁이 장기화된 기간동안 거의 매일이다시피
술을 드시고 있다. " 술이 몹시 취했다" 하는 구절도 보이고 또 누가 누가
와서 술을 먹여 보냈다. 등등의 구절이 일주일에 서너차례나 나오는 것을
보면 크게 이상하다. 그러면서 또 몸은 몸대로 아프다. 그렇지만 군졸들에게
술을 나눠 먹였다는 대목은 두 세달에 한 번쯤이다.즉 동료장수들과는
술을 수시로 마시지만 군졸들은 아주 드물게 한 번씩 술을 하사한 것이다.
좋은 장수, 일명 '덕장'이라 불리우는 영웅들은 침식을 졸병들과 함께
하는 것인데 이렇다면 장군 이순신은 덕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단지
'학익진'이라는 전술에서 보여주는 '지장'이고
또 전투중에 돌격하는 모습에서 보여주는 '용장'이 아니었나 싶다.
목 잘치는 장군 이 순신....
장군은 매우 엄하신 분이었던 것 같다. 왜냐면 부하들을 자주 곤장치고
또 심하게는 목을 많이 배어버리는 것을 본다. 이상한 것은 군졸들의 탈영이
심심치 않게 있다는 것이다. 로마의 명장 시이저는 군졸들이 오랜 전쟁동안에도
한 명의 (분명히 한명도) 탈영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 말은 비록 죽음을
눈앞에서 보더라도 장군을 믿고 따랐다는 말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왜 장군 이순신의 부하들 중엔 이렇게 탈영자가 많고 또 때때로 잡아와서
목을 베어야 했을까? 장군의 용병이 절정에 이르지는 못한 것이 아닐까?
매우 자주 부하들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는데 계급으로 봐서는 고급장교들인
것 같다. 그런데 한가지 우스운 것은 술을 함께 자주 마시는 장수들은
벌을 받지 않는데 아주 드물게 참석하는 자들이 벌을 받고 곤장을 받는 다는
것이다. 후후...
법률을 위반하는 장군 이순신....
제목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다하고
싶으니까. 후후 장군의 일기중에는 분명히 서너차례 암행어사가 조정에 올리는
장계를 비밀리에 즉 사사로이 보고 있는 것이다. 가령 한 대목은 이렇다.
"맑음, 홍양과 순천이 암행어사의 비밀장계 초안을 얻어 가지고 와서
보이는 바 임실,....등은 파면하고 순천은 탐관오리로 논란하고..."
등의 구절이다. 사연인 즉,
암행어사 유몽인이(어우야담의 저자) 호남 고을 수령의 과실과 덕망을 적어
장계를 올리는데 그 비밀문건은 탄핵대상인 홍양과 순천수령이 가지고 온 것이다.
그럼 마땅히 나라의 높은관리되는 자는 그 사사로움을 엄히 다스려야 하거늘
장군은 체모도 없이 들여다 보며 울분을 토하는 것이다. 참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유몽인을 임금을 속이는 무리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어떤게 진실일까?
나는 며칠전에 어우야담을 읽을 기회가 있어 유몽인을 잠시 사모했는데
장군이 진실하면 유몽인이 그릇된 자일 것이고 또 유몽인의 장계가 옳다면
이순신은 옳지 못하다. 역사속에 두 인물이 서로 상반된 자리에 있다.
만약 고전을 한 두가지 읽고 만다면 그것에서 이런 묘미는 얻지 못할 것이다.
여러 책을 읽으니 책들의 저자가 서로 논란하는 대목이 드러나고 그것이
바로 흥미있는 부분이다. 후후
가정을 중시하는 장군 이순신....
장군은 전쟁중에도 이 삼일 간격으로 충청도 아산의 집에서 소식이 안 오면
애닯아 한다.일기의 많은 부분이 고향에서 소식이 왔다는 내용이고 모친의
건강을 항상 기록하고 있다."요사이 탐선이 엿새가 되도록 오지않는다.
어머님 소식을 알 수 없어 걱정스럽다" 하고 장군은 말한다. 그렇지만
이것도 성웅 이순신을 보고 싶은 독자인 나에게는 안타깝다. 전쟁의 와중에
백성들은 갈갈이 찢겨져 부모형제의 생사가 아득한데 장군은 고향에서 일주일에
두세번씩 아들,조카와 종들, 심지어는 조카딸까지 왕래를 하니 장군에게서
공사의 구별이 확실하지 않음을 본다. 백제의 장군 계백은 황산벌에 나아갈때
그 처자를 모두 죽이고 결사항전을 불태우는데 이에 비히면 이 순신은 못
미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 효성은 정말로 지극하다. 모친이 죽었을때
상중이라는 이유로 전쟁중에도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아서 아랫장수들도
민망하여 고기를 먹지 못하니 임금이 유시를 내려 그를 책망하는 구절이 있다.
공사의 경중을 가리지 못한다 할 수 밖에 없다.
놀이를 즐기는 장군 이 순신....
휘하의 장수들이 장군의 거소에 찾아오면 술을 함께 마시거나 혹은 바둑을
두거나 어쩌다가 한 번씩은 종정도(벼슬놀이) 같은 것을 즐긴다. 하지만
가장 즐기는 놀이는 활을 쏘는 건데 거의 매일 10순에서 20순 가량을 쏘신다.
이 것이 장군에게서 무인의 체취를 느끼는 덕목중의 하나다. 여기서 순이란
화살 다섯개 그러니까 10순이면 화살 50대를 날리는 것이다. 장군은
다른 장수와 화살을 쏘아서 이기면 무척이나 즐거운지 꼬박꼬박 기록하셨다.
첩을 가진 장군 이 순신....
난중일기에서 이 대목을 만났을때 나는 무척 재미있어서 줄을 두 세번 그었는데
'부안댁'이라는 장군의 첩이 있었는데 하루는 꿈에 첩이 애를 낳는 꿈을 꾸었다.
일어나 보니 아직 낳을 때가 아니라 그 꿈을 치워 버렸다 하시는 대목이 있다.
성웅 이 순신 장군은 첩살림을 하신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와중에는 여자를
멀리 하신듯 한데 휘하의 장수중에 하나가 그 배속에 첩을 숨겨 태우고 다니는
것을 아시고는 매우 비웃는 대목이 있다. 이렇게.." 참 우습다."
기인으로써 장군 이 순신....
요 근래에 본 어떤 책에서 이 순신 장군도 선가의 사람이라서 조선의
침화를 예측하고 또 도를 닦는 사람이라서 한 두가지의 도술이라든지
선경지명 등등을 가진 도인 비슷하게 묘사한 것을 보았는데..실제로
난중일기에서 장군은 꿈을 기록하기 좋아하고 또 해몽을 하신다. 하지만
꿈이 맞았다는 대목은 별로 없고 단지..이게 무슨 꿈일까? 불안하다. 하는
정도 이시다. 또 가끔 주역을 펼쳐놓으시고 점을 치시는데 점의 내용을
기록하였다가 그 다음날 맞았는지 살펴보면 반은 맞고 반은 결과가 없다.
하지만 대개의 의도가 도인처럼 잘 알아맞추는 사람으로써 점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밑져야 본전이다는 생각으로 점을 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점에 크게 좌우하지도 않는다. 갑자기 어떤 대목이 생각난다.
하루는 일기에 기록하길 "점쟁이집을 돌보는 하인이 작은 가산을 훔쳐
달아났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후후 장군도 점쟁이가 자기집
도둑들 일은 못 알아챈 것을 유쾌하게 생각하신 것이다.
소탈하신 장군 이 순신......
난중일기에서 몇군데 실소를 터치는 부분이 있는데 가령 "휘하장수 아무개의
첩이 본집에 들어가 강짜를 부렸다니 자못 우습다" 이런 부분은 웃음이 나온다.
이 런 구절이 몇 군데 있는데 볼펜으로 선을 그으며 읽었다. 후후 장군은
아무리 사사로운 일기지만 남의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를 자못 흥미롭다는 듯이
어쩌면 가소롭다는 듯이 기록하고 있으니 내가 사랑하던 장군의 체모에 아무래도
흠이 많이 간다.
원 균 장군과의 관계속의 이 순신....
이 부분이 나에게는 정말 쉽게 수긍이 안가는 부분인데 장군은 지나치게 원균을
싫어하신것 같다. 전술상의 의견차이라고 보기에는 그 정도가 심해서 장군이
원균을 인간적으로 증오하시지 않았나 싶다. "원수사의 음험하고 흉악한 품은
이를 길이 없었다" 이와 같은 구절이 수십차례에 걸쳐서 난중일기에 나오고
있으니 그 까닭이 명쾌하지 않다. 전쟁초기에 장군은 전라수사이고 원균은
경상수사인데 서로 엇비슷한 계급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사사건건 밉다는
말을 기록하였고 부하장수들이 모이면 원균을 흉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이런 대목도 있다 "...점심 후 원수사 혼자서 술을 대접하는데 상은 그득하건만
집어 먹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스웠다...." 하하하 영웅의 마음이
이토록 소박한 것이다. 이 대목은 명나라 장수에게 이 순신을 비롯한 장수들이
예물을 드리고 원균이 술을 대접한 대목을 흠 잡는 것이다. 말하자면 밴뎅이
속을 내보이는 것이다. 하하하하
그런데 왜 장군은 원균을 싫어할까? 원흉, 원적, 원가 등등 그 지칭하는 표현도
자못 정도를 넘어서는데 왜 그랬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가끔씩은
만나서 술을 마신다. 그리고 술을 먹고 나면 원균이 꼭 술주정을 한듯한
기록을 덧붙인다.".....원이 몹시 취했다. 해괴했다..." 나중에는 이 일로
조정에서 사이좋게 지내라는 질책을 받는다. 음 이 수신은 원균을 무척이나
싫어했고 부하장수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서 장군앞에서 원균을 헐뜯는
고자질을 많이 하고 있음을 본다.
윗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한 장군 이 순신...
장군은 정승 유성룡을 매우 공경하는 투로 글에 적는데 사시사철 때때로
유성룡을 비롯한 몇몇의 판서와 정승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은 물론이고
물품을 진상하는 대목이 있다. 가끔 꿈에서 유정승을 만나 대화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무래도 장군은 유정승을 관직의 보호자로 느끼고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후견인인 셈이다. 장군의 후견인이라...파벌이라..
백성들과 단절된 장군 이 순신....
백성들의 이야기가 예상외로 나오지 않는다. 즉 다시 말하면
민정시찰이라든가 해서 백성들의 곤궁함을 구제하는데에 큰 힘을 쏟았다는
부분이 없는 것이다. 전쟁이 벌써 4년째에 접어들어 관내를 순시하다가
피폐함에 놀랐다는 대목이 있는데..장군이 그 동안 무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쓸쓸하다. 장군은 매번 군율을 어긴 장수들을 곤장치고 탈영하는
병사들을 목치고 이틀에 한번꼴로 술을 마시고 화살을 쏘는 걸로 소일하고
있으되 백성들의 호구나 전쟁통의 비참함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아산 고향집에는 때때로 물품을 싸서 보내니 이것은 도리가 아닌가
싶다. 또 휘하 장수들이 때때로 사슴이나 쇠고기를 보내왔다. 는 대목이
있는데 백성들과는 달리 장군의 식량사정은 항상 풍족했음을 볼 수 있다.
난중일기에서 보여주는 백성들.....
진주에서 피난온 백성들이 왜의 복장을 하고 광양에 들이닥쳐 약탈했다는
대목에서 백성들이 전쟁중에 비윤적인 면도 있었음을 본다. 또 어떤 놈은
왜놈들을 이끌고 와서 동리 사람을 골라 죽였는데 이순신이 그 놈들을
잡아서 처형했음을 보여준다. 또 선비집의 처녀를 겁탈한 자를 처단한
대목, 음녀 12명을 처벌했다는 구절, 또 소를 잡아가기위해 거짓으로
왜놈들이 나타났다고 소리치다가 잡혀서 죽은 백성들 이야기도 있고 후후
어떤 구절에서는 요동땅에서 왕씨후손이 고려를 일으킬 목적으로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그래서 이순신은 가슴이 항상 아프다.
난중일기는 살과 피는 사라지고 뼈만 남아있는 일기다. 전투는 임진년과
정유년의 일기에만 주로 나오고 그 사이의 계사년 갑오년 을미년 병심년은
전투는 거의 없다. 기껏해야 어쩌다 배 1-2척을 쫓아갔다가 돌아왔다는
정도이다. 그러므로 일기의 전체적인 내용은 모두다 매일 반복되는
활쏘기와 누가찾아와서 누구를 만났다는 이야기뿐이라서 별로 흥미있는
줄거리는 없는 것이다. 책의 초반부에 임진년에 전쟁이 일어나 전투를
치루지만 적선 30여척을 불질렀다 정도로 사연을 끝내고 마니 전투의 과정도
별로 없다. 단지 책의 후반부에 가면 정유재란이 일어날 무렵에 장군이
백의종군의 과정으로 서울에서 여수로 다시 내려올때의 행적이 자세히 기록
되어 있고 또 정유재란때의 전투는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어
전투중의 긴박감이 흐르는 대목도 서너차례 볼 수 있다.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이야기는 해 뜨고 해지는 이야기 뿐이며 비 오면 몸이 부실부실 아프다는 것과
찾아온 손님들의 이름이 날짜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나는 이와같이 난중일기를 읽으며 재미난 의외의 일들에만 초첨을 맞춰
독후감을 써낸다. 이것은 장군의 무게가 나에게 너무나 커 이렇게 하여
본 것이다. 나는 어릴적에 동네에서 전쟁놀이를 하면 항상 이순신 장군이
아이들에게 단연 인기가 많았던 것을 기억한다. 장군의 모습이 항상
긴칼 비껴차고 수루에 앉아 조국을 근심하는 모습에서
술을 많이 취하시고 즐거이 노신 분으로 다가와도 좋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사실속의 인물이야 말로 현대에서도 새롭게 부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장군의 인품에 크게 훼손을 가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일반독자는 모르는 채로 장군을 성웅이순신으로써만 존경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자랑스럽다.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꼿꼿하게 살아갔던 금속같은 장군이 아니라 따뜻한 온기를 뿌리며
많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 장군이 오히려 가깝기 때문이다.
1997년 2월 22일 낮 11시에 읽기를 마친다.
2시에 쓰기를 마친다.
날은 화창하고 원기는 왕성한데 방구석에서 책을 읽는 것도
못할 일이다. 읽는 것도 쓰는 것도 하나같이 못할 짓이다.
긴 칼 대신 이쁜 처녀 데리고 달 밝은 한산섬에나 가 봤으면...좋겠다.
『내가 읽은 책 (go MYBOOK)』 2474번
첫댓글 리플다신 분들 안읽었다에 올인
ㅎㅎ
중간에 읽다 포기 ㅠㅠ
선리플후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