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휘몰아친 학생운동의 폭풍우는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한 면을 들춰냈지만,
무력적인 투쟁으로 변해 어쩔 수 없이 진압됐다. 과격해진 파벌은 분열을
거듭하고, 내분에 따른 폭력투쟁을 되풀이 함으로써 다른 학생들에게서도,
사회로부터도 크게 유리되었다. 그리고 학생사회에서는 어떤 일에도
감동하지 않고 무관심한 현상이 만연하고 있었다. 그런 현상은
생명의 철리도 없고, 변혁의 주체인 인간 자신의 혁명이 결여된 운동의
필연적인 귀결이기도 했다.
그래서 야간대학부를 다니는 대학부원은 바로 이때 모든 일의 원점인
인간 자신의 변혁 즉 인간혁명을 기축으로 사회를 건설한다는 새로운 창조를
주장하고자 했다. 단상 뒤쪽에는 그런 기개를 표현하듯 도안한 '창조'라는
글자가 걸려 있었다.
'근로학생의 사명과 자각'이라는 주제를 발표한 청년은 강하게 역설했다.
'야간대생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는 엄하며, 직장에서도 제일선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되는 경우는 많다. 근로학생으로서 직장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일은 힘들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인간으로서 최고로 단련받을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사회 저변에 사는 사람들의 실정이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야간대학부원이 힘을 키우고 뛰어난
지식과 인간성을 길러서 사회의 지도자로 성장해야 비로소 민중을 지키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그 일이 우리의 사명이다.'라는 주장이었다.
역경에서 가장 큰 의미를 찾아내는 발상의 전환이다.
그 점에 불법(佛法)의 관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그 청년은 이렇게 외쳤다.
"그랬을 때, 야간대생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분명히 바뀔 것입니다.
자기를 둘러싼 환경을 개척하려면 우리 자신이 투쟁해야 합니다!"
사회건설의 주체로서 자각하고 일어선 사람에게는 비애도 푸념도
불평도 없다. 불타오르는 정열과 도전의 기개만이 있을 뿐이다.
'나의 반전(反戰)운동'이라는 주제로 등단한 청년은 핵 군비확대 경쟁에 몰두하는
강대국의 현상을 언급하고, 국가나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하는 사상 대신
인간을 우선시하고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는 철학을 확립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 깃든 다른 나라나 민족에 대한 '불신'과 '멸시'를 '신뢰'로
전환하고, 타자(他者)를 지배하려는 마성에 찬 생명을 근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것을 가능케 하는 법은, 모든 사람에게 부처의 생명이 있음을 발견하고
생명을 변혁하는 길을 밝힌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소리 높여 외치며 이야기를 끝맺었다.
"항구평화의 길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평화를 구축하는 것도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캠퍼스와
지역에 생명존엄을 설하는 불법철리를 전하고, 민중의 마음에 반전과 평화의 요새를
구축하는 일이 가장 본원적인 평화의 길입니다."
'노동과 인간의 완성'이라는 주장을 전개한 청년은 자유에 관한 문제를 언급했다.
"인간이 행복을 획득하는 데에 자유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외적으로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운 시간과 돈이 있다고 해서 진정한 자유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늘 욕망에 지배되고 농락당한다면 욕망이라는 쇠사슬에 묶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상태로는 생명이 해방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자기 욕망을
통제하며, 아무리 혜택받지 못한 어려운 환경에 놓여도 성장의 도약대로 만드는
생명의 힘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모두 불법에 대한 대확신이 있었다.
광선유포라는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환희와 긍지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창가 언론운동의 정신이다.
이어서 주장대회 실행위원장이 등단했다.
실행위원장은 사회의 새로운 조류(潮流)를 만들어야 할 학생의 주장이,
시대를 건설하는 언론이 되지 못하는 현상을 지적하며 그 이유를 분석했다.
"현대 학생의 언론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는 까닭은 세가지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생활자로서 실천과 행동이 결여되었고,
둘째는 사회건설의 주체라는 의식이 결여되었으며, 셋째는 언론을 뒷받침할
철리가 결여되었습니다. 우리 야간대학부원은 그런 점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가의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조를 창조하는 시대로
전환해야 할 언론의 투사로서 끊임없이 정의를 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청년이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는 혼의 외침을 잊어버렸다면 미래는 암흑처럼 변한다.
어느 대학교수는 주장대회가 끝나자 상기된 표정으로 희망을 의탁하듯 이렇게
말했다. "요즘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지극히 당연한 일도 피하려고만 드는
경향이 강한 듯합니다. 또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을 위해 배우는가.'라는
목표를 상실하고 방황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그런 속에서 어떤 어려움에도 감연히
도전하자고 힘차게 주장하고,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굳게 연대를 맺는 일은
대단히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디 이 건전한 청년의 유대가 앞으로도 더욱
확대되기를 염원합니다."
또 어느 교수는 "진지하고 활력이 가득 넘친 주장에서 신앙이 지닌 힘을 생생히
느꼈습니다."하고 감탄했다.
야마모토 신이치(이케다 선생님)는 '근로학생 주장대회'에 담당간부로 참석한
청년부 간부에게서 상세한 보고를 들었다. 신이치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가, 대성공이었군. 야간대학부원들이 '비상회'라는
긍지를 가슴에 품고 자진해서 언론전을 일으키다니 믿음직스럽지 않은가!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광선유포를 위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일이 중요하다.
청년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학회는 발전하지 못한다. 본디 청년이 모이면
미래를 위해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며 여러 가지 의견이 많이 나와야 한다.
비상회 멤버들에게는 그런 활기와 모범적인 모습이 있다. 기쁘다. 정말 기쁘다."
청년부 간부는 이어서 이렇게 보고했다.
"다하라 대학부장 이야기로는 '비상회'를 결성한 이래 야간대학부원이 정예 5만
결집의 돌파구를 열며 크게 활약하고 있다고 합니다."
"굉장하구나 … …."
신이치는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실은 그 점에 '비상회'의 영원한 사명이 있다. 장래 학회는 광선유포의 중요한
국면이 될 법전을 몇전이고 치러야 한다. 모두 '이길 수 없다.'고 체념하거나,
싸우는 모습만 보이고 말만 하면서 진지한 승부를 피하려는 경우도 생길지 모른다.
그럴 때 비상회 멤버는 '내 투쟁을 보라!' '장애를 무릅쓰고 승리해내는 진지한
승부란 이런 투쟁을 말한다!' 라고 맹렬히 앞장서서 달리며 대승리의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 즉 나는 결전을 책임지고 일기당천하는 투장의 모임으로서 '비상회'를 결성했다.
비상회 멤버들은 반드시 해낼 것이다.
왜냐하면 나와 같은 청춘의 길을 걸은 제자이기 때문이다.
야마모토 신이치의 후계자가 모인 그룹이기 때문이다.
나는 믿고 있다. 멤버들은 30년, 40년 후에 엄연히 역사로서 반드시 증명할 것이다."
스승의 마음에 보답해야 제자다.
'비상회' 멤버의 활약은 눈부셨다. 멤버들은 일편단심으로 도전했다.
진지했다. 야간대학부원은 가장 시간도 없고 바쁘기 그지없는 청년들이다.
그런 청년들이 어느 캠퍼스에서도, 대학부의 어느 부에서도 가장 불타오르고 빛나며
크게 활약했다. 늦은 밤 강의를 듣고 돌아가는 길에 멤버를 격려하러 가는 일은
많은 야간대학부원의 일과로 정착했다.
출장이 잦은 회사에 근무하며 대학부에서 부장을 맡고 있는 어느 청년은 늘 가방에
엽서를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짬을 내어 부지런히 멤버에게 격려의 글을 썼다.
그 수는 매달 백 통이 넘었다.
또 회사에서 날마다 동전을 많이 준비해놓고, 점심시간이 되면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공중전화로 달려가 연락과 보고 그리고 격려에 여념이 없는 멤버도 있었다.
아직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의 일이다.
시간이 나면, 환경과 조건이 갖춰지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사명을 자각하는 일이다. 광선유포를 향한 강한 일념이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비상회 멤버들에게 사명을 위해 사는 정신의 씨앗을 심은 것이다.
'비상회'를 결성하고 1년이 지난 1976년 8월 29일, 제2회 총회가 열렸다.
장소는 도쿄 오타구체육관이었으며 전국에서 야간대학부 대표가 모였다.
시종일관 환희와 구도의 불길이 타오르는 총회였다.
네살이 더 많은 선배 집을 16차례나 방문한 끝에 드디어 그 선배도 회합에
참석하기에 이르렀다. 성실함과 끈기가 벗의 마음을 연다.
끝까지 인내해
승리를 쟁취하라
한평생
체험발표에 이어 제2회 총회 실행위원장을 맡은 대학부 주임부장 후키하라 도시미가
등단했다. 그리고 '비상회'를 결성한 이래 1년간의 발자취를 소개하며 소리 높이
외쳤다. "우리는 '비상회' 멤버가 되어 야마모토 선생님 슬하에서 사제(師弟)의 길을
걸으면서 좌절을 결의로, 비애를 환희로, 숙명을 사명으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번영과 사람들의 행복을 구축하는 광선유포운동의 선구자로서
최고의 긍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캠퍼스에서 직장에서 지역에서
'내 청춘을 보라!'고 당당히 외치며 모든 분야에서 선생님의 제자로서 훌륭한 실증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키하라는 아키타에서 태어났는데, 돈을 벌러 간 아버지가 불러서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도쿄로 나갔다. 하지만 그 후 부모님 사이가 안 좋아져 별거하기에 이르렀다.
중학교 때 일이다. 어머니가 여자 혼자 몸으로 후키하라와 여동생을 키웠다.
이미 신심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자신의 숙명에 감연히 도전했다.
후키하라도 학회활동을 열심히 하기에 이르렀다.
고등학교는 정시제고교에 진학하고 낮에는 대학교 도서관에서 일했다.
졸업 후에는 증권회사에서 근무하며 영업사원으로 분투했다. 밤에는 외국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웠으며 나중에는 주오대학교 법학부 야간대학부에 진학했다.
그리고 이해 1976년 봄에 대학을 졸업했다.
'내 청춘을 보라!' 이 말은 '비상회'를 결성한 이래
후키하라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외침이었다.
'내 상황에서는 숙명의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리며, 꿈도 희망도 찾지 못하고
비뚤어진 채로 살 수도 있었다. 그런 내가 인생의 스승에게 큰 기대를 받으며
나날이 환희와 약동 속에, 광선유포라는 숭고한 사명을 위해 살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