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4:14-21) 2013.11.3(주일설교)
예화) 닭이 아니라 독수리
양계장을 하는 집의 아들이 어느 날 산에 올라갔다가 독수리 알 하나를 둥지에서 꺼냈습니다. 그는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어미닭이 달걀을 품고 있는 곳에 넣어 두었습니다. 얼마 후 병아리가 깨어났고 독수리 새끼도 깨어났습니다. 독수리 새끼는 병아리 틈에서 같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주변이 온통 병아리였습니다. 그는 병아리처럼 먹고 병아리처럼 걷고 병아리처럼 자고 모든 것을 병아리처럼 행동하였습니다. 자기가 독수리인 것을 알리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닭장 위를 독수리가 힘차게 날고 있었습니다. 독수리 새끼는 <아! 멋지다. 나도 저 새처럼 날 수는 없을까?>라고 독백하며 날개에 힘을 주어 보았습니다. 이상스럽게도 힘이 솟구쳤습니다. 날아졌습니다. 그는 창공을 날면서 좋아서 외쳤습니다. <나는 닭이 아니라 독수리였어. 나는 닭이 아니라 독수리야!>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닭이 아니라 독수리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훌륭하게 쓰실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결코 지금의 모습이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다. 다른 모습이 숨겨져 있습니다. 닭의 모습이 감춰지고 독수리의 모습이 나오기까지 하나님은 훈련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수리로 훈련시키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정말 보잘 것 없는 한국 축구팀은 히딩크라는 좋은 스승을 만나서 월드컵 4강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없는 요즘 한국 축구팀은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좋은 스승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그의 6가지 원칙을 보면 첫째가 체력(power)훈련입니다. 체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조직력이나 기술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해도 병든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먼저 모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사람을 바로 쓰는 것(personnel)입니다. 혈연이나 지연, 학연을 떠나 성실성과 실력을 우선시 했습니다. 하나님도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을 쓰십니다. 셋째는, 원칙(principal)과 기본(base)에 충실하게 했습니다. 하나님도 진리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넷째는, 통합(unification)의 능력입니다. 서로 연합을 통해 팀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합할 때, 성령의 임재가 충만하게 됩니다. 다섯째, 확고한 믿음(beliefs)입니다. 선수와 감독간의 확고한 신뢰관계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합니다. 교회도 목회자와 성도간의 믿음이 생명입니다. 여섯째, 환경(environment)을 이용하는 능력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상황과 환경을 선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날 최고의 스승은 단연 스크린입니다. 그 중에서도 텔레비전입니다. 텔레비전에서 가르치는 대로 옷 입고, 텔레비전이 가르치는 대로 말하고, TV가 가르치는 대로 집도 꾸미고 모두 TV를 스승 삼고 사는 것입니다. 요즘 세계 여러 나라에서 대장금이 유행을 한다는데 대장금에서 무슨 요리가 나오면 그 다음날 시장에서는 그 요리 재료가 10-20배가 더 팔린다고 합니다.
사람은 뭘 보고 사느냐에 따라 큰 영향을 받습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 사회가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 믿는 부모들도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 시간이 줄어드니까 분별력 없이 텔레비전을 최고의 스승으로 따라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아이들에게 스승은 어른들입니다. 특히 부모입니다. 아이들 보는 앞에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성경 읽으면 그 자녀들에게 ‘텔레비전 그만 봐라! 컴퓨터 그만해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를 향해 일만 스승보다 더 존경할 스승의 스승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하며 담대히 외치고 있습니다.
1. 스승이 없으면 망합니다.
자기 인생에 스승이 없는 사람은 틀림없이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대통령도 스승이 있는 대통령과 스승이 없는 대통령은 다릅니다. 사장도 스승이 있는 사장과 스승이 없는 사장은 다릅니다. 스승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사람은 완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 다윗과 사울의 차이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왕이 된 후에 아무의 가르침도 듣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왕으로 세운 사무엘 선지자가 있었는데 오히려 사무엘을 무시하고 멸시하였습니다. 거역하였습니다. 스승이 없이 자기 혼자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왕이라는 교만에 빠져 그는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다윗은 늘 스승을 곁에 두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무엘을 스승으로 모셨고, 사무엘이 죽자, 나단 선지자를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나중에서 갓 선지자를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한번은 다윗이 우리야의 처를 빼앗고 우리야를 전쟁에서 함정을 파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희희낙락 하고 있을 때 나단 선지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한 동네에 양 100마리 가진 부자가 있었는데 집에 손님이 왔습니다. 그 부자 근처에는 가난한 노인이 양 한 마리를 자식처럼 키우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노인의 양을 빼앗아서 자기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윗이 대노하며 그런 놈이 내 나라에 있습니까? 알려 주시면 당장에 박살을 내겠습니다. 이때 나단 선지자는 “바로 당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목동에서 왕으로 삼고 많은 부인을 주었는데 당신은 부하장군 우리야의 아내가 탐나서 그녀를 겁탈하고 그 남편을 전쟁에 내 몰아 죽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은 죽습니다. 왕에게 그런 이야기하고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다윗왕은 나단 선지자 앞에 무릎을 꿇고 엎으려 잘못했노라고 울었습니다. 다윗은 항상 자기 곁에 스승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군이 된 것입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님은 많은 사람이 존경하는 분입니다. 그분이 평양 산정현 교회 장로인데 당시 목사님은 자기가 오산 고등학교에서 가르쳤던 주기철 목사님이었습니다. 어느 날 조만식 장로님이 예배 시간에 늦었습니다. 살금살금 들어와서 자리에 앉으려는데 강단에서 목사님이 “장로님이 지각했으니 서서 예배를 드리세요” 하였더니 조만식 장로님은 나이로도 막내 아들뻘이요, 학교로도 고등학교 제자였던 목사인데 그 말 앞에 조용히 서서 예배 마칠 때까지 서서 드렸다고 합니다. 사람이 스승을 둔다는 것은 자기가 최고가 아니라는 것과, 나는 죽는 순간까지 배워야 한다는 것과, 나는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겸손한 마음의 표시입니다. 좋은 성도는 좋은 스승을 둔 사람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람을 스승으로 모셔야 합니다.
렘 7:25 “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예수 열심히 믿는 사람 중에는 이상한 교만이 있습니다. 그 교만은 “내 스승은 하나님이시고 내 스승은 성령님이시고, 내 스승은 성경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1)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친히 스승이 되시고 하나님이 친히 가르쳐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은 다른 좋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서 가르칩니다.
다윗에게도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서 가르쳤습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보내셨고, 히스기야에게는 이사야를 보내셨습니다. 아볼로에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에게는 아나니아를 보내셔서 가르쳤습니다.
2)준비된 사람은 누립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보내고 어떤 사람에게는 보내지 않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보냅니다. 다만 그가 교만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겸손해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더욱 많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서 가르치십니다.
사울왕에게는 사무엘을 보냈지만 그는 사무엘에게서 성령도 받고, 예언도 하며,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으나 결국은 사무엘을 무시하고 교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을 스승으로 모셨고, 그가 죽자 하나님은 나단 선지를 보내셨고, 그가 죽자 갓 선지자를 보내서 계속 가르쳤습니다.
제일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에게마져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서 가르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망했습니다.
3)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15-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스승으로 모시고 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을지라도 나는 그 스승위에 뛰어난 아버지 같은 스승이니 나를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내가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이해가 갑니다. 갈4:19“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나니”얼마나 아름다운 선언입니까? 사실 부목사로 섬길 때는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 해산하는 수고”이런 표현에 대해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슴에서 찡하면서 와 닿습니다.
2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러분 아파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아프지 말고 건강하세요’라고 백 마디 천 마디 하는 것보다 고쳐주는 것이 능력입니다. 마귀에게 묶인 사람에게 ‘마귀에게서 해방 되세요’라는 만 마디 말보다 마귀를 쫓아 주는 것이 능력입니다. 말보다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릴 자격도 지위도 실력도 없습니다. 다만 기도하길 저는 광영교회 목사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목사가 되도록 최선을 다 할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좋은 스승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3. 고난을 스승으로 모셔야 합니다.
시 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스승을 보내는데 사람을 보내기도 하지만 고난을 우리 인생의 스승으로 보내십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백열전구를 발명하려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당신은 만번이나 실패했지만 하나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때 에디슨이 대답했습니다. “틀렸습니다. 나는 전등을 만들 수 없는 만 가지 방법을 배웠습니다.”에디슨은 일만 번 실패 후에 전구를 발명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만나서 그 고난으로 배운 것이 절망, 낙심, 포기, 원망, 불평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희망, 인내, 겸손,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숨은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요셉을 통해 주는 교훈입니다.
요셉은 인생의 많은 고난을 보았습니다. 형들에게 팔려서 어려서 노예가 되어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 어디에서 절망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자기 삶을 포기 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형들에게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구하려고 나를 먼저 이 땅으로 보내셨다” 고 하며 하나님의 숨을 뜻을 발견한 사람이었습니다.
2) 고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숨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시 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을 스승으로 알고 우리가 배울 때, 하나님은 행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십시다.
스승 두기를 싫어하면 우린 사울처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스승으로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고난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워야 합니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 사랑, 지나친 자긍심, 교만 등으로 스승을 모시지 않는다고합니다. 그래서 뭔가 항상 배우지만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잘못할 때 나를 꾸짖고, 넘어졌을 때 나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주고, 나를 세워줄 스승이 없다면 그런 스승 두기를 거절한다면 우린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광영교회 성도들 모두가 서로서로 좋은 스승이 되어 서로 세우고, 서로 기도하고, 서로 밀어주고 이끌어줄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통성기도 :
선포기도 : 예수 이름으로 교만은 떠날지어다(x2) 예수 이름으로 낙심은 떠날지어다(x2)
축 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