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매개입자 외 2편
양해기
시간과 사람 사이에도
기억의 강을 흐르게 하고 전달하는
매개입자가 있다
삶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져
매개입자가 필요 없어지는 때가 오면
우리는 처음으로
시간의 맨 얼굴을 보게 된다
매개입자가 사라진 시간은
그 전부터 우리를
잘 알고 있기라도 하듯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한다
머리를 쓰다듬고 턱을 간질여도
시간은 달아나지 않는다
시간은
늙고 주름진 우리의 목과 손등을 핥다가
폴짝 뛰어 안기기도 한다
병들어 우리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옆에 온 시간은
우리 곁에 조용히 눕게 된다
우리들의 장례식
그 마지막 조문이 끝나고 나면
시간도
자신이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퀘이사
이른 시간
지하철을 갈아타고
일산에 일가고 있는 내 아버지는
꼽추다
꼿꼿하게
허리와 고개를 세우고 서 있지만
그의 머리와 등은 이미
어두운 하늘과 구분도 없이 맞닿은
먼 바다의 수평선을 닮아 있다
꼽추가 아니 내 아버지가
아니 아니
불룩하게 솟아오른 저 등이
빈자리를 찾아 가 자리에 앉기 전까지
출근길 사람들의 모든 시선은
동트기 전
천문대 망원경에 기를 쓰고 밀어 넣는 눈처럼
한 곳을 향해 집중해 모여들고 있었다
빛에너지를 충분히 흡수했는지
아니면
어떤 모멸과 부끄러움이 시뻘건 혹에 가득 찼는지
원뿔은 점점 더 크게 부풀어
꼽추의 등에서
눈부시게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온다
아주 멀리서 봐도 유난히 밝게 빛나는
해 뜨기 전
저 새벽 지하철 한 칸
발자국 화석
바닷가 바위에서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수백만 년이 지나도
저렇게 선명한 화석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건
누군가
물 묻은 진흙길을
쉴 새 없이 걸어갔다는 거다
지층 깊은 곳에서
오랜 시간 누군가가
어두운 땅 속을 헤매고 있었다는 거다
― 양해기 시집, 『테라포밍』 (세상의모든시집 / 2018)
양해기
200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서울목공소」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4차원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니었을 때』, 산문집으로는『꿈꾸는 밥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