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8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마태오 9,18-26
바람과 희망의 차이
오늘 복음에서 회당장은 엄청난 믿음을 보여줍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이는 믿음은 하느님 능력을 말해줍니다.
“당신은 손만 대면 죽은 이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이는 하느님 능력은 물론이요, 자비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능력자시요 자비로우신 분으로 여기게 되면 우리 마음에 생기는 것이 ‘희망’입니다.
믿음과 희망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생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믿음과 희망이 우리를 주님께로 이끕니다.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분의 능력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희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칫 우리는 희망과 바람을 착각합니다. 희망은 믿음이고 바람은 인간적인 욕구입니다.
바람으로 구원되지는 못하지만, 희망으로는 구원에 이릅니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김형규 씨가 담배꽁초 20만 개로 실물 크기의 자동차를 만들어 금연 캠페인을
하였습니다.
담배꽁초 수집에만 2달, 분류하는 것만 2주가 걸려 거의 3달에 걸친 작업이었습니다.
작업이 끝나자 두드러기가 나서 병원에 가보니 면역체계가 무너졌다는 소견을 들었습니다.
함께 작업한 30명 대동소이한 반응이었습니다.
그 중의 흡연자가 15명이었는데 모두 금연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 15명 모두 다시 담배를 다시 피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희망한 것일까요, 아니면 원했던 것일까요? 인간적인 바람으로는 얻어지는 게 없습니다.
희망은 믿음과 함께하기에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고 끝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제가 유학 다녀와서 피부 알레르기 때문에 여러 병원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해결책을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레이저로 붉게 된 얼굴을 짖었습니다. 그래도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한약도 먹어 보았습니다.
여전히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찾으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계면활성제에 대한 일부 의사의 소견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10년째 비누를 쓰지 않습니다.
그때 시도해 보았더니 효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믿음과 하나입니다.
‘죽은 아이에게 예수님께서 손을 얹으면,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면 나을 거야!’란 생각 안에 ‘방법’과 멈추지 않게 하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성녀 요셉피나 바키타는 어렸을 때 납치되어 매일 매를 안 맞는 날이 없는 노예 생활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쇠사슬에 묶여 900킬로를 걸어서 끌려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매일 때리고 그 상처에 소금을 끼얹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아이는 자연을 만드신 분을 찾고 싶었고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 사람이 주인이 되었을 때 그에게 매달려 이탈리아로 넘어옵니다.
거기에서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다시 수단으로 보내지려 할 때 그녀는 이탈리아 법정에까지 나아가 그들과 싸우며 자유를 쟁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녀원에 들어가 겸손하고 온화하고 위로하는 수녀님으로 47년을 삽니다.
그녀는 자기 삶에 관해 쓴 책으로 많은 이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희망하는 삶입니다.
희망하는 삶이 반드시 열매를 맺는 이유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선물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연옥의 한순간의 고통은 지상의 모든 고통을 합친 것보다 더 무섭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연옥에 가지 않기를 원해야 합니다.
원하는 사람은 구체적인 방법을 찾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희망하는 사람은 찾습니다.
연옥에 안 가게 하는 유일한 기도가 있습니다.
비르짓다의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입니다.
사실 이것을 바치지 않는다면 원하기는 하지만,
희망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법을 찾고 꾸준할 수 있어야 기적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이 희망이 단순한 바람과 다른 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8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마태오 9,18-26
<우리는 절망하지만 주님은 희망하십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 대한 치유뿐 아니라, 이미 완전히 죽은 열두 살 소녀를 소생시킨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생명과 죽음조차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참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열두 해’라는 표현이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성경 안에서 12라는 숫자는 각별합니다.
‘완전함’ ‘꽉 찬’이라는 의미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증세는 그 어떤 명의(名醫)도 더 이상 손써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중증이었던 것입니다.
극에 달한 통증, 극단적 고통, 따라서 부족한 인간의 힘으로는 방법이 없는, 다시 말해서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주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는, 그런 상황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다 장례식때 등장하는 피리부는 이들까지 등장한 것을 봐서, 완전히 죽었다가 예수님의 손에 이끌려 생명을 되찾은 회당장 딸의 나이도 열두 살이었습니다.
여기서도 12라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회당장의 딸 역시 사경을 헤맨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술로도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상태, 완전히 끝난 상태를 말합니다.
오직 생명의 주관자이자 완전하신 주님만이 소생시키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치유와 소생 사화를 통해 우리는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진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그분 앞에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망하지만 그분은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포기하지만 그분은 다시 원점에서 다시 한번 출발하십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 낡은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 말라 죽은 고목에서도 새싹을 돋게 하시는 분,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와 소생 사건 앞에서, 진정한 의미의 치유와 소생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그리도 간절히 반복해서 원하는 육체적 치유는 다분히 제한적이고 유한한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의 끝도 없는 치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더 가치있고 중요한 치유, 그래서 우리가 더 간절히 청해야 할 치유는 영적인 치유요, 내적인 치유입니다.
내면의 치유요, 마음의 치유입니다.
그릇된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치유요, 고정관념의 치유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이 땅 위에서 살것이라는 착각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는 오류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이라는 그릇된 신앙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그 날이 올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지는 그 날 말입니다.
그 때 우리는 평생토록 그리워했던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 하느님과 더불어 수많은 성인성녀들, 의인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더 이상 병고도, 죽음도 없는 삶, 불사불멸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희망을 안고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다양한 삶의 십자가 앞에 당당히 맞서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강론>
(2024. 7. 8. 월)(마태 9,18-26)
<살든지 죽든지 주님 뜻대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마태 9,18-26).”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권한’이란, 무엇인가를 할 권한과 하지 않을 권한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생살여탈권’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권한입니다.
병을 고쳐 주거나 고쳐 주지 않거나, 사람을 살리거나 살리지 않거나, 그것은 모두 예수님께서 결정하시는 일입니다.
그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주님이신 분”입니다.
<만일에 그 권한이 없다면, 주님이 아닙니다.>
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여자의 병이 치유되었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여자에게 일어난 기적의 주체는
그 여자의 믿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적의 원인은, 또는 기적을 일으킨 힘은, 바로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언제나 항상,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을 믿는 일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라는 말씀을 하셨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에 관한 말씀의 뜻은, 작은 믿음이라도 있으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을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로 오해하면, “믿기만 하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라는 그릇된 믿음으로 변질됩니다.
<사이비 종교 사람들이 흔히 그런 말을 합니다.>
또 병이 들어서 누워 있는 병자에게 가서, “너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은, 너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라고 꾸짖는 말이나 하는, 잘못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3) 불치병에 걸려도 믿음만 있으면 그 병이 낫고,
죽어가던 사람도 믿음만 있으면 살아나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2코린 12,7ㄴ-9ㄴ).”
바오로 사도는 몸을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일으키는 어떤 병에 걸려서 평생 고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그 병의 치유를 주님께 간청했는데, 주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 주기를 거절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 외에도, 평생 병고를 겪다가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난 성인 성녀들이 많습니다.
<병이 낫지 않아서 고생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성인 성녀들이 믿음이 부족해서 여러 가지 질병을 앓는 고통을 겪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아주 많은 것이 우리의 실제 현실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라고 말합니다.
어떤 병에 걸렸을 때, 또는 어떤 불행한 일을 만났을 때, 간절하게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지만, 모든 결과는 주님 뜻에 맡겨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로 그 결과만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기도는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바치되, 살든지 죽든지 주님 뜻에 맡기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라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해도.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