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28일 연중 제8주간 (목) 말씀 묵상 (1베드 2,2-5.9-12) (이근상 신부)
11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12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로2,11-12)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처신”, 곧 아나스트로페ἀναστροφή는 어떤 특정한 행위 하나로 규정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태도이고, 삶의 방식이다. 해서 처신은 완벽한 행동들의 목록이 아니다. 그것은 방향이다. 넘어지고도 다시 일어나는 방향. 자랑할 것 없는 사람이라도, 다시 복음 쪽으로 몸을 돌리는 삶의 방향.
그 삶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칼라 에르가 καλὰ ἔργα곧 “착한 행실들”이다. 이것 역시 단순히 훌륭한 행동 몇 가지를 뜻하지 않는다. 삶 전체의 움직임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다. 넘어지지 않은 사람의 흠 없는 행위가 아니라, 넘어진 사람이 다시 일어서며 건네는 연대의 위로다. 부족한 사람이 절망하지 않고 다시 사랑하려 할 때, 그게 바로 하느님의 선하심이 드러난 장소라고 우리는 믿는다. 우린 완벽함보다 다시 시작하는 용기에서 더 깊은 위로를 받는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보다, 무너졌으나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다. 그것을 베드로는 아마도 그걸 칼로스καλός (아름답다는 뜻과 함께 착하다는 뜻도 있는데) 착한 것,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착한 행실은 나를 빛내는 도덕적 성취로 드러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부끄러움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고, 실패 뒤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며, 부족함을 숨기지 않은 채 복음의 방향으로 걸어가는 삶이 아니라면 아름다울 수가 없다. 적어도 나같은 죄인에게는... 바로 그 처신, 그 다시 일어서는 태도가 사람들에게 격려와 위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착한 행실이 되어, 마침내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게 한다고 믿는다.
아마도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 자신의 고백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넘어진 사람이었다. 단지 한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건만이 아닐 것이라 나는 그리 믿는 편이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알았으리라. 죄는 그 약함을 더 선명하게 만나는 계기일 뿐.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섰다.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 다시 일어섰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하는 착한 행실은 완벽한 사람의 흠 없는 삶이 아니라, 넘어진 사람을 다시 일으키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증언하는 삶이되었다고 믿는다. 딱 우리를 향하는 그의 방언은 '일어나라'가 아닐까. 그리고 그 방언을 듣고, 해석하는 은사가 우리게 내릴 때, 우리의 해석이란 '이래도 저를 다시 받으시겠습니까'가 아닐까. 그걸 아름답다, 착하다라고 깨달아가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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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베드로가 말하는 착한 행실은 완벽한 사람의 흠 없는 삶이 아니라, 넘어진 사람을 다시 일으키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증언하는 삶이 되었다고 믿는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백번이고 천번이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이신 주님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