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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홀로 테마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광나루
[조선 재상 열전 8] 한명회(韓明澮)전
월간조선 2023.07.27
布衣에서 단숨에 정승에 오른 책략가
⊙ “마음속에 항상 國務를 잊지 아니하고… 성격이 과대하기를 기뻐하며, 재물을 탐하고 色을 즐겨서”(실록)
⊙ 계유정난 주도하고 사육신의 단종 복위 시도 저지
⊙ 할아버지 한상질은 명나라로부터 ‘조선’ 국호를 받아 와
⊙ 유교 경전 간행 건의하고 私財를 보태서 사림의 찬사 받기도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도〉.
도학(道學)에 물든 후의 조선 성리학은 한명회(韓明澮·1415~1487년)를 매도했지만 사실 한명회는 조선 역사 최대 거물 중 한 사람이다. 위(魏)나라 유소(劉邵)의 《인물지(人物志)》 분류에 따르면 한명회는 청절가(淸節家)도 아니고 법가(法家)도 아닌, 전형적인 술가(術家)이다.
유소는 청절가의 아류(亞流)를 장부가(臧否家)라고 했는데 그저 남의 옳고 그름만 따지는 자들이다. 조선 시대 도학 혹은 주자학에 젖은 이들은 청절가에도 이르지 못한 삼류 장부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술가 한명회의 삶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1415년(태종 15년) 세상에 나온 한명회의 할아버지는 1392년 7월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예문관학사로서 주문사(奏聞使)를 자청해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아 이듬해 2월에 돌아온 한상질(韓尙質·?~1400년)이다.
그의 동생 한상경(韓尙敬·1360~ 1423년)은 개국공신이다. 고려 말 밀직사 우부대언으로 있다가 이성계 추대 모의에 참여하고 옥새를 받들어 이성계에게 바쳐 개국공신 3등에 올랐다. 태종의 지우(知遇)를 받았던 한상경을 통해 당시 한씨 집안 가풍을 미루어 헤아려 볼 수 있다.
《논어》로 맺어진 태종과 한상경
《세종실록》 5년(1423년) 3월 7일 자 한상경 졸기(卒記)를 보자.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경기좌도 도관찰사 한상경에게 일러 말했다. “내가 큰 왕업을 계승하였으나 세상을 다스리는 법을 알지 못해 마음속으로 실상 어렵게 여긴다.” 상경이 말했다. “옛사람의 말에 임금이 임금 노릇 하기를 어렵게 여긴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그 어려움을 능히 아시니 실로 우리 동방의 복이옵니다. 그러나 이는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태종은 이 말을 옳게 여겨 받아들이고 의정부 참지사에 임명했다.〉
의정부 참지사에 임명했다는 말은 장차 그를 정승으로 삼기 위한 예비과정에 편입시켰다는 말이다. 실제로 한상경은 태종으로부터 큰 총애를 받아 훗날 정승에 오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두 사람 대화의 소재가 된 《논어》의 관련 대목이다. 〈(노나라) 정공(定公)이 물었다.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말이 있는가?”
공자가 대답해 말했다. “말(의 효험)이 이와 같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임금 노릇이 어렵고 신하 노릇도 쉽지 않다’는 것이 있으니 만일 임금 노릇의 어려움을 안다면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하기를 바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공이) 말했다.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다고 하는데 그런 말이 있는가?”
공자가 대답해 말했다. “말(의 효험)이 이와 같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나는 임금이 된 것에 즐거운 것이 없고 오직 내가 말을 하면 아무도 나를 어기지 않는 것이 즐겁다’는 것이 있으니 만약에 임금 말이 좋아서 아무도 그것을 어기지 않는다면 실로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임금 말이 좋지 않은데도 아무도 그것을 어기지 않는다면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게 되는 것을 바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상경이 재상감임을 알아본 태종
한상경은 이 대화를 녹여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행을 강조했고 《논어》에 정통했던 태종은 이를 통해 그가 재상감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호조판서 시절 한상경은 삼공신 연회에 참석해 태종에게 술잔을 올린 일이 있었다. 그때 장면이다.
〈태종이 일러 말했다. “내가 왕위에 오른 처음에 경이 나에게 ‘임금은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려운 줄을 알아야 하며, 아는 것이 어려움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 어렵다’라고 했는데 내가 지금도 잊지 않았다.” 한상경이 대답했다. “임금께서 신의 말을 잊지 않으셨다고 하니, 다시 한 말씀 아뢰기를 청합니다.” 태종이 “무슨 말인가”라고 하자 대답했다. “시작은 없지 않으나 좋은 끝마침이 있기는 적습니다[靡不有初 鮮克有終].” 또 칭찬하였다.〉 이는 신시이경종(愼始而敬終)을 말한 것이다.
한명회의 집안 자체는 조선 혹은 조선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아버지 한기(韓起)는 이렇다 할 행적이 없고, 일찍 죽어 한명회는 어려서 고아가 됐다. 의지할 데가 없자 작은할아버지인 한상덕(韓尙德·?~1434년)을 찾아가 몸을 맡겼다. 한상덕은 태종 때는 대언, 세종 때는 호조참판에 올랐으나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 다만 매우 진중한 성품이었음을 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태종 11년 6월 14일 한 연회에서 태종은 한상덕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일찍이 대간(臺諫)이 되어 바른말[直言]을 숨기지 않고 하였으므로, 내 매우 가상하게 여기어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터이다.” 한상덕은 어린 한명회의 남다른 언행을 주의 깊게 살펴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그릇이 예사롭지 않으니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浩然之氣를 품었던 청년 한명회
실록 졸기는 일반적으로 매우 건조하다. 그런데 성종 18년 11월 14일 한명회 졸기는 파격적으로 시작한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임신한 지 일곱 달 만에 한명회를 낳았는데, 배 위에 검은 점이 있어, 그 모양이 태성(台星)과 두성(斗星) 같았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가난하여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글을 읽어 자못 얻은 바가 있었으나, 여러 번 과거(科擧)에 합격하지 못하였다.
이에 권람(權擥·1416~1465년)과 더불어 망형우(忘形友)를 맺고, 아름다운 산이나 수려(秀麗)한 물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문득 함께 가서 구경하고, 간혹 한 해를 마치도록 돌아올 줄 몰랐다. 경태(景泰) 임신년(1452년·문종 2년)에 경덕궁직(敬德宮直)에 보직(補職)되어, 일찍이 영통사(靈通寺)에 놀러 갔었는데, 한 노승(老僧)이 사람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그대의 두상(頭上)에 광염(光焰)이 있으니, 이는 귀징(貴徵)이다”라고 하였다.〉
망형우(忘形友)란 서로의 용모나 지위 등을 문제 삼지 않고 마음으로 사귀어 교제하는 벗이라는 뜻이다. 권람은 권근(權近)의 손자로 한명회와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해 학문이 넓었으며, 뜻이 크고 기책(奇策)이 많았다. 책 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 고적을 찾아다니면서 한명회와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지으면서 회포를 나누었다. 한명회와 서로 약속하기를 “남자로 태어나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고 했다. 한명회와의 교우는 관포(管鮑·관중과 포숙아)와 같았다.
35세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있다가, 1450년(문종 즉위년)에 향시와 회시(會試)에서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고, 전시(殿試)에서 4등이 되었다. 그러나 장원인 김의정(金義精)의 출신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장원이 되었다. 그해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이듬해 집현전 교리로서 수양대군(首陽大君)과 함께 《진설(陣設)》을 편찬하는 데 동참했다. 이를 계기로 수양대군과 가까워졌으며, 한명회를 수양대군과 연결시켜준다.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나이가 장성하도록 여러 차례 낙방(落榜)했다. 그러나 이를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개의하지 않았다. 간혹 위로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했다. “궁달(窮達)은 명(命)이 있는 것인데 사군자(士君子)가 어찌 썩은 유자[腐儒]나 속된 선비[俗士]가 하듯이 낙방에 실망하고 비통해하겠는가?” 어린 나이에 벌써 공자가 말한, 50세에 이르러야 한다는 지천명(知天命)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결국 훗날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한명회는 권력을 장악한다.
한명회·권람·수양대군
한명회의 졸기는 계유정난 과정을 이렇게 압축해 전달한다. 〈이때 문종(文宗)이 승하하고 노산(魯山·단종)이 나이가 어리어 정권(政權)이 대신(大臣)에게 있었는데, 한명회가 권람에게 일러 말했다.
“지금 임금이 어리고 나라가 위태로운데, 간사한 무리가 권세를 함부로 부리고, 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마음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대신(大臣)들과 친밀하게 교결(交結)하며, 여러 소인을 불러 모으니, 화기(禍機)가 매우 급박(急迫)하오. 듣자니 수양대군이 활달(豁達)하기가 한고조(漢高祖)와 같고 영무(英武)하기가 당태종(唐太宗)과 같다 하니, 진실로 난세를 평정할 재목이오. 그대가 문필[筆碩]에 종사하는 즈음에 모신 지가 오래인데, 어찌 은밀한 말로 그 뜻을 떠보지 아니하였소.”
권람이 한명회가 한 이 말을 아뢰니 세조(世祖)가 한명회를 불러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한 번 만나보고 의기가 상통하여 마치 옛날부터 사귄 친구와 같았다. 마침내 무사(武士) 홍달손(洪達孫) 등 30여 인을 천거하고, 계유년(1453년) 겨울 10월 초 10일에 세조가 거의(擧義)하여,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살(誅殺)하고, 한명회를 추천하여 군기녹사(軍器錄事)로 삼고,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의 호(號)를 내려주고, 곧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으로 올렸다.〉
한명회, 단종 복위를 좌절시키다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사육신공원. 서울 노량진에 있다. 사진=동작구 |
일일구천(一日九遷), 하루에 아홉 번 승진한다는 말로, 다름 아닌 한명회를 두고 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정난공신 1등에 책봉된 한명회는 계유정난을 일으킨 이듬해 동부승지,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올랐다. 그해 가을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오르며 우승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년)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주살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실록이 전하는 그날의 현장이다.
〈병자년(1456년) 여름에 성삼문 등이 노산을 복립(復立)할 것을 꾀하고, 은밀히 장사(將士)들과 교결하여, 창덕궁(昌德宮)에서 중국 사신들[華使]을 연회(宴會)하는 날에 거사(擧事)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이날에 이르러 한명회가 아뢰기를 “창덕궁은 좁고 무더우니, 세자(世子)가 입시(入侍)하는 것은 불편(不便)하고, 운검(雲劍·의장용 큰 칼)의 제장(諸將)도 시위(侍衛)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장차 연회가 시작되려 하자, 성삼문의 아비 성승(成勝·?~1456년)이 운검으로서 장차 들어가려 하자, 한명회가 꾸짖어 저지하기를 “이미 제장들로 하여금 입시하지 말게 하였소”라고 하니, 성승이 마침내 나갔다.
성삼문 등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말하기를 “세자가 오지 아니하고, 제장이 입시하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무리 가운데에 한명회를 해치려는 자가 있자, 성삼문이 말하기를 “대사(大事)를 이루지 못하였는데, 비록 한명회를 제거한다 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튿날 일이 발각되어, 모두 복주(伏誅)되었다.〉
세조, “한명회는 다른 공신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를 풀어보자. 아주 흥미롭게도 좌익공신 3등에 사육신으로 유명한 성삼문이 포함돼 있었다. 외견상 책봉 이유는 수양이 왕위에 오를 때 승지로서 옥새를 올린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현전 학사들을 포용하려는 수양의 전략적 구상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사실 충절(忠節)이라는 면에서 성삼문의 기개는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실록에 따를 경우 단종 복위에 결정적인 실기(失機)를 가져온 장본인이 바로 성삼문이고 반대로 그것을 정확히 포착한 인물이 바로 한명회다.
권력 찬탈 이후에도 한명회는 여전히 우승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세조는 중궁과 함께 수시로 한명회에게 술을 하사하며 “한명회는 다른 공신에 비할 바가 아니다”며 각별한 총애를 표시하곤 했다. 이런 한명회가 또 한 번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된다. 집권 2년째인 1456년(세조 2년) 6월 1일 유응부(兪應孚·?~1456년)와 성승이 주동이 된 단종 복위 세력이 마침내 행동에 들어갔다. 창덕궁에서 열리는 명나라 사신 환영연을 거사의 무대로 삼기로 한 것이다.
별운검(別雲劍), 운검이란 국왕의 좌우에 무장을 하고 시립하는 2품 이상의 무관을 말한다. 이날 행사에는 성삼문의 아버지이자 조선 초 대표적인 무장 성달생의 아들인 성승과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무과 출신 중추원 동지사 유응부가 별운검을 맡도록 돼 있었다. 두 사람은 이 자리에서 세조와 세자를 제거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해서 한명회를 비롯한 공신들을 처단키로 했다.
반왕(反王) 세력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한명회는 모반의 기미를 알아차렸다. 원래 정보전의 1인자 한명회 아니던가? 일단 한명회는 세조를 은밀하게 찾아가 “행사장인 창덕궁 광연전은 좁고 날씨가 무더우니 세자 저하는 오시지 말게 하시고 운검도 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세조도 순순히 따랐다. 그러고 칼을 찬 성승이 연회장에 들어가려 하자 한명회는 어명이라며 “운검을 들이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갈림길이었다. 여기서 무장인 성승과 유응부는 칼을 뽑았으니 거사를 계속 진행하자고 말했다. 성승은 한명회부터 죽이자고 했다. 그러나 정작 아들 성삼문이 “세자가 오지 않았으니 한명회를 죽인들 무슨 소용이 있냐”며 거사를 늦출 것을 제안했다. 유응부는 “이런 일은 번개같이 해치우는 것이 상책”이라며 강행 의사를 밝혔으나 결국 성삼문과 박팽년(朴彭年·1417~1456년)의 연기론이 먹혀들었다.
세조의 총애, 한명회의 출세
수양대군의 왕위 등극에 공헌한 문신인 한명회의 일대기를 새긴 지석. 사진=천안시 |
역사의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 거사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金礩·1422~1478년)이 장인 정창손(鄭昌孫·1402~1487년)에게 의논했고 정창손이 그 길로 김질을 세조에게 데려갔다. 이로써 단종 복위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고 사육신과 생육신(生六臣)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1년 후인 1457년 6월 21일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금성대군은 마침내 9월 거사를 결심했다. 그러나 관노의 밀고로 발각되어 사사(賜死)되었다. 더불어 혜빈 양씨도 한남군, 영풍군과 함께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그러고 10월 21일 더 이상의 후원 세력을 잃은 단종도 목을 매 자살한다. 아니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한명회는 1457년 이조판서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등 4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1461년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이듬해 우의정, 1463년 좌의정에 올랐다. 계유년이 1453년이니 일개 포의(布衣)였던 한명회는 정확히 10년 만에 최고 정승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물론 시련도 있었다. 1466년 이시애(李施愛)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와 함께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신문을 당했으나 혐의가 없어 곧 석방됐다.
“풍류 즐겨 압구정 그 이름이 자자하네”
한명회는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했다가 1년여 만에 세상을 떠나고 성종이 즉위하게 되는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명회는 예종의 장인이자 성종의 장인이기도 했다. 성종에게 학문을 진흥시킬 방안을 제시했고, 서적이 부족한 성균관의 장서 확충을 위해 경사(經史) 관계의 서적을 많이 인출해 비치하게 하였다. 1484년 70세로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세조 즉위 이래 성종조까지 고관 요직을 두루 역임, 군국(軍國) 대사에 참여하였다. 특히 세조는 그를 총애해 “나의 장량(張良)”이라고까지 하였다. 4차례에 걸쳐 1등 공신으로 책봉되면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상으로 받아 권세와 부를 누렸다.
한강 남쪽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압구(狎鷗)’라 하였다. 다산 정약용이 압구정에 올라 지은 시다.
승상이라 공명은 청사에 빛나는데 / 丞相勳名國史靑
풍류 즐겨 압구정 그 이름이 자자하네 / 風流尙說狎鷗亭
삼한의 주옥 비단 자리에 전부 쌓였고 / 三韓玉帛全堆席
팔부의 가수 악기 뜰에 모두 있었다오 / 八部歌鍾盡在庭
가련할사 뜬세상은 흐르는 물 똑같은데 / 浮世可憐同逝水
고깃배는 어인 일로 빈 물가에 떠 있나 / 漁舟何意汎空汀
지는 꽃 향기로운 나무 찾을 만한 곳은 없고 / 落花芳樹無尋處
석양빛만 낡은 난간 쓸쓸하게 비추누나 / 唯有殘暉照古欞
한명회를 이야기하면서 압구정 사건을 빼놓을 수는 없다. 성종 12년(1481년) 6월 24일 상당부원군 한명회가 성종을 찾아와 “중국 사신이 신의 압구정을 구경하려 하는데 이 정자는 매우 좁으니 말리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종도 우승지 노공필을 시켜 중국 사신에게 “압구정은 좁아서 놀기에 적합지 않다”고 전했으나 중국 사신은 굳이 “좁더라도 가보겠습니다”고 말했다. 사실 한명회가 느닷없이 “매우 좁다”며 말려달라고 한 것은 나름의 수 계산이 있었다. 그 수는 바로 다음 날 드러난다.
한명회를 넘어서지 못한 성종
1994년 KBS 대하드라마 〈한명회〉에서는 이덕화가 한명회 역을 맡아 열연했다. |
6월 25일 한명회가 다시 와서 이렇게 말했다. “내일 중국 사신이 압구정에서 놀고자 하니 신의 정자는 본래 좁으므로 지금 더운 때를 당하여 잔치를 차리기 어려우니 해당 부서를 시켜 정자 곁의 평평한 곳에 큰 장막을 치게 하소서.” 바로 전날 한명회의 이야기는 결국 중국 사신을 모시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압구정이 좁다는 이야기였다. 성종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경(卿)이 이미 중국 사신에게 정자가 좁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다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함인가? 그렇게 좁다고 여긴다면 제천정(濟川亭·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던 정자)에 잔치를 차려야 할 것이다.” 그러자 한명회는 한술 더 떠 성종의 지시는 무시한 채 압구정의 처마를 잇대어 정자를 넓히면 안 되겠느냐고 묻는다. 중국 사신의 위세에 기대어 성종에게 간접적으로 협박을 하는 것이다. 성종은 “내일 제천정에 사신들을 위한 오찬을 차리고 압구정에는 장막을 치지 말도록 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한명회의 대답이 걸작이다.
“신은 정자가 좁고 더위가 심하기 때문에 아뢴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아내가 본래 오래된 질병이 있는데 이제 더 심해졌으므로, 내일 그 병세를 보아서 심하면 제천정일지라도 신은 가지 못할 듯합니다.” 한명회가 물러간 즉시 승정원 승지들이 들고일어났다. 아내가 아프면 중국 사신이 구경하려고 해도 사양했어야 할 텐데 이제 와서 성종이 압구정 연회를 허락하지 않으니 아내의 병을 핑계 대며 ‘제천정일지라도 가지 못하겠다’고 한 것은 임금에게 대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성종은 한명회를 법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한명회는 이미 성종의 이 같은 유약함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한명회의 사리(事理)에 대한 통찰이 빛나는 사건이다. 한명회는 성리학의 교조에 얽매이지 않았고 거의 혼자 힘으로 왕조 시대 신하가 누릴 수 있는 정점(頂點)에 이른 독특한 존재다. 정승이 되는 길은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다.
“소박하고 솔직하여 다른 뜻이 없어 그 勳名 보전”
한명회는 전형적인 술가이다. 따라서 성종 시대가 안정되자 술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할 기회가 적었다. 어찌 보면 권간(權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명회는 선을 넘지 않았다. 졸기에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담겨 있다.
〈하루는 소대(召對·왕명으로 입시하여 정사에 관한 의견을 올리는 일)에서 흥학(興學·학교를 융성시키는 일)의 중요함을 진술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성균관(成均館)에 서적이 없으니, 마땅히 경사(經史)를 많이 인쇄하고, 각(閣)을 세워 간직하게 하소서”라고 하여, 임금이 그대로 따랐는데, 한명회가 사재(私財)를 내어 그 비용을 돕게 하였으므로, 사림(士林)에서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한명회는 70세가 되던 갑진년(1484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다. 유종지미(有終之美)를 아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뒤에 가서는 나태해지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 바라건대 그 끝을 삼가기를 처음과 같이 하소서.”
평범해 보이면서도 깊은 통찰을 담은 이 멋진 말은 1487년(성종 18년) 11월 14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풍운아 한명회가 자신이 임금으로 만들어 올렸고 한때 사위이기도 했던 성종에게 남긴 유언이다. 한상경이 즉위 초 태종에게 했던 말과 통한다.
졸기에 달린 사평(史評)은 지금 보아도 빼거나 더할 곳이 없다.
〈한명회는 젊어서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삼았으나 학문을 이루지 못하고, 충순위(忠順衛)에 속하여서, 뜻을 얻지 못하고 불우(不遇)하게 지내다가, 권람과 더불어 문경교(刎頸交)를 맺고, 권람을 통하여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알아줌을 만나[知遇], 대책(大策)을 찬성(贊成)하여, 그 공(功)이 제일(第一)을 차지하였으며, 10년 사이에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고, 마음속에 항상 국무(國務)를 잊지 아니하고, 품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 건설(建設)한 것 또한 많았다.
그러므로 권세(權勢)가 매우 성하여 추부(趨附)하는 자가 많았고, 빈객(賓客)이 문(門)에 가득함에도 응접(應接)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일시(一時)의 재상들이 그 문에서 많이 나왔으며, 조관(朝官)으로서 말채찍을 잡는 자까지 있기에 이르렀다. 성격이 번잡(煩雜)한 것을 좋아하고 과대(夸大)하기를 기뻐하며, 재물(財物)을 탐하고 색(色)을 즐겨서, 전민(田民)과 보화(寶貨) 등의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희첩(姬妾)을 많이 두어, 그 호부(豪富)함을 일시에 떨쳤다.
여러 번 사신(使臣)으로 명나라 서울에 갔었는데, 늙은 환자(宦者) 정동(鄭同)에게 아부하여, 많이 가지고 간 뇌물을 사사로이 황제에게 바쳤으나, 부사(副使)가 감히 말리지 못하였다. 만년(晩年)에 권세가 이미 떠나자, 빈객이 이르지 않으니, 초연(愀然)히 적막한 탄식을 뱉곤 하였다. 비록 여러 번 간관(諫官)이 논박(論駁)하는 바가 있었으나, 소박하고 솔직하여 다른 뜻이 없었기 때문에 그 훈명(勳名)을 보전(保全)할 수 있었다.〉
두 딸을 왕비로 만들어
아들은 한보(韓堡·1447~1522년)이고, 딸은 장순왕후(章順王后·예종비)와 공혜왕후(恭惠王后·성종비)이다. 한보는 기골이 장대하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였다. 13세 때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나아갔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1466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1469년(예종 1년) 낭성군(琅城君)에 봉해졌다.
1471년(성종 2년)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우윤, 1475년 공조참의 겸 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가 양모(養母) 조씨(曺氏)에게 불효하였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476년 복직되었고, 1492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5년 치사(致仕)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공신 아들이면서도 스스로 처신을 삼갔을 뿐만 아니라 자손에게도 몸을 삼갈 것을 주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