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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방문
By Robert Militello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일을 기뻐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음을 내가 알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임이라. 그의 뒤에 있을 일을 보게 하려고 누가 그를 데려오리요?”(전 3:22).
성령께서 사람을 먼저 만나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죄의 형벌, 곧 영원한 정죄를 피할 수 없다. 무덤 뒤편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려주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성령의 영감을 통해 이 책을 기록하여 여러분에게 주신 것에 감사하라. 성령께서 38년 전 나를 찾아오셨을 때 나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때 어느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내가 죽음 이후에 어디로 가는지 알려줬고 나는 회심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내 혼은 안식을 찾았다.
1843년, 나이 31세의 재능 있는 작가 찰스 디킨스는 크리스마스 캐롤이라는 단편 소설 한 편을 발표했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이 빅토리아 시대의 유명한 작품인 이 소설에 나오면서부터 유명해졌다. 그 주인공 에베니저 스크루지의 회심 이야기는 크리스마스의 필수 요소가 되다시피 했다. 스크루지 이야기는 수없이 영화들로 만들어졌고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미국 도처에서 연극으로도 공연된다. 그 이야기는 따뜻함과 정신을 고양시켜 주는 요소가 있기에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준다. 친절함이 이기심을 패배시키며 슬픔이 사라지고 상냥함과 사랑이 대신 채우는 줄거리 때문이다.
“내가 사람들의 아들들의 지위에 관하여 내 마음속에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드러내사 그들로 자신들이 짐승들이라는 것을 보게 하소서.” 하였도다”(전 3:18).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어떻게 자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겠는가? 찰스 디킨스는 유령의 방문으로 인해 스크루지가 회심하는 식으로 썼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나타난 크리스마스 유령은 에베니저를 자신의 무덤 묘석 앞으로 데려가는데 그 완고하고 늙은 죄인은 두려움에 빠진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만 죽음이 찾아오리라 착각하는 죄인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시어 깨닫게 하신다. 자신이 치유 불능 상태에 있다는 깨닫지 못한다면 죄인이 어떻게 심장 이식의 필요성을 깨닫겠는가. 에베니저 스크루지는 동업자였던 제이콥 말리의 유령에게 “나는 달라지기에는 너무 늦었어.”라고 말하며 자신을 그만 떠나 달라고 애원한다.
크리스마스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 오신 것을 기념하는 의미의 날이다. 특별히 그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어 말씀 하나님을 혈과 육이 되어 유대인 처녀에게 잉태되게 하셨다. 이 방문이 그런 의미가 있기에 세상은 한 해의 달력이 넘어가는 시점에 이 사건을 이벤트로 표기해 놓고 기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방해하고 삶에 개입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죄 가운데 죽은 채 희망 없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엡 2:1, 12). 수백만 이상의 사람들이 영광의 주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는다 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성령을 만나지 못해 잃어버린 상태로 살아간다.
꿈 이야기는 인류역사에서 항상 매혹적인 주제였다. 그러나 성경에 처음 언급된 꿈은 무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 밤에 하나님께서 꿈에 아비멜렉에게 오셔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가 데려간 여인으로 인하여 네가 죽은 사람이 되리니, 이는 그녀가 다른 사람의 아내임이라.” 하시더라”(창 20:3).
모닝콜로 이런 메시지를 듣는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유명한 꿈 이야기 중 하나가 요셉이 땅에서 하늘까지 닿는 사다리를 보았던 꿈이다.
“그가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이곳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 ! 이곳은 다름아닌 바로 하나님의 전이니, 이곳은 하늘의 문이라.” 하였더라”(창 28:17).
자신의 친숙한 현실과 사고방식에서 동떨어진 무의식의 생각이 꿈에 나타나면 누군들 놀라고 두렵고 떨리지 않겠는가? 분명히 여러분은 결코 잊지 못하는 꿈 한 두 개는 갖고 있을 것이다. 롬 8:28을 보면 하나님께서 두려움을 통해 선을 이루시는 역사를 알 수 있다. 디킨스는 그 점을 깨달았고 꿈 이야기를 기술적으로 잘 활용해서 회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포기하는 주인공을 바꿔 놓는 데 성공했다. 에베니저 스크루지의 마음 속 신은 돈이었고 유령이 다녀간 후 그의 신은 사라졌다. 오늘날도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같은 일을 하실 수 있는가?
1823년 12월 21일, 트로이 센티널이라는 뉴욕 지역 신문에 “성 니콜라스의 방문”이라는 시가 발표되었다. 뉴욕 시에 위치한 성공회 신학교의 성경 교사 클레멘트 무어라는 사람이 그 시를 썼는데 그는 그 작품을 쓴지 14년이 지나서야 센티넬지에 실었다. 그는 자기 아이들의 요청으로 그 작품을 썼다고 말했다. 무어는 작품을 낼 여건이 되지 않아 오랫동안 시집을 출간하지 않았었다.
그가 쓴 그 시가 미국 사회에서 산타클로스의 친근한 대중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무엇보다 큰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존경 받는 신학자가 거둔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찰스 슐츠는 그의 연재 만화 <피너츠>에 등장하는 주인공 라이너스를 통해 누가복음의 그리스도 탄생 이야기를 재현함으로써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는 데 기여했다. 클레멘트 무어가 달콤한 크리스마스 환상을 창조해 냈다면 찰스 디킨스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데 성공했다(롬 6:23). 에베니저 스크루지에게는 기적이 필요했고 그는 크리스마스 선물 대신 그 기적을 받았다.
“에디오피아인이 그의 피부를 바꿀 수 있으며 표범이 그의 점들을 바꿀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악을 행하는 데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죄인은 자기 내면의 천성을 스스로 바꿀 수 없다. 죄인은 새 마음이 필요하며 성령께서만 그를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게 하실 수 있다. 결국 디킨스는 부활의 의미를 함축한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는 우리 모두가 가진 탐욕스러운 본성을 강조한 후 그런 사람은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한다고 동의할 만한 혐오스러운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스크루지를 떠올릴 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은 그처럼 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죄에 대해 설명하다 보면 나는 그 사람들이 자신은 연쇄 살인마 제프리 다머 같은 악한 부류가 아니라고 변명하는 인상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선함을 선언하나, 누가 신실한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요?”(잠 20:6).
내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그 위대한 영국 작가에게 성경 말씀을 통해 영감을 불어넣으시어 그 구두쇠의 이름을 에베니저라고 짓게 하신 것이다(삼상 7:12을 보라). 디킨스는 기적을 믿었고 그의 작품 크리스마스 캐롤은 그의 그 믿음을 증거한다.
죄인의 극적인 회심은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런 회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자신이 원하시는 때면 언제든 개입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이 길바닥에 쓰러져서 장님이 되었던 것은 그가 잃어버린 이방 죄인들에게 소망을 전파하는 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구제불능의 인간이 의로 돌이킬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존 뉴튼의 회심은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개인 구원을 주제로 한 위대한 찬송가를 낳았다. 샘 존스와 멜 트로터 같은 주정뱅이들의 회심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완전히 망가진 물건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증거하는 살아 있는 서신서들이다(고후 3:2). 이것이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저변에 깔린 진정한 매력이다. 1843년에 그 작품이 나왔을 때 저자는 자신의 “캐롤” 이야기가 태어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될 것은 알지 못했다.
“그가 말하기를 ‘그러면 아버지여, 내가 당신께 간구하오니 당신께서 나사로를 내 아비 집에 보내어 주소서. 나에게 다섯 형제가 있으니 그가 그들에게 증거하여 그들로 이 고통의 장소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니”(눅 16:27-28).
지옥에서 불타며 고통받는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부르짖기를 나사로의 유령을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 달라고 말한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인들이 지옥의 두려움을 깨닫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는가? 병의 근원을 수술해야 환자가 살 수 있다. 지옥에 간 부자는 자기 형제들이 지옥의 두려움을 알아야 하겠기에 시급히 유령이 그들을 방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부자의 청을 거절하면서 성경을 통해서만이 지옥불을 모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 부자가 자기 형제들에 대해 거는 기대가 헛된 것과 마찬가지로 죄인들이 성경을 보지 않는다면 유령의 출현은 무용한 것이다. 물론 유령이 나타난다면 충격적이겠지만 죽은 자가 나타난다 해서 성경이 없이 죄인들이 회심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디킨스는 자신의 픽션에서 그런 제약에 묶이지 않은 채 이야기를 펼쳤다. 스크루지를 찾아온 유령들은 성경 없이 그들의 임무를 완수했다. 크리스찬들 가운데 자신의 방식이 하나님의 방법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러 자신의 방식대로 행한다면 그 일에 선한 결말을 맺을 수 없다, 아멘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권유하노라”(고후 5:11). 많은 사람들은 주와 두려우심이라는 말을 연결짓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슬프지만 우리는 자주 패역한 생각 가운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말씀을 “우리 하나님은 소멸케 하시는 불이심이라”(히 12:29)는 말씀보다 앞세우려 한다. 내가 교회사에서 읽은 사실은 부흥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주의 두려우심”을 전파하는 설교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흥겨운 축제 분위기 가운데는 잃어버린 죄인들의 두려움이 부가되어 있다. 그것은 세속 사회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간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주께서는 오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오셨고 세상 죄값을 지불하심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하셨다. 세속 역사가들조차 주께서 2천년 전에 이 땅에 실존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모든 사람에게 이것은 두려운 사실이지만 그들은 “베들레헴의 갓난아기”가 그들의 혼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믿지 않으려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진노 가운데 세상 죄인들을 멸하지 않으시려고 사랑의 증거를 이 땅에 보내셨다. 대부분의 크리스마스 카드들에는 이런 사실이 증거되어 있지 않다. 우리 사회는 떠들썩한 분위기, 연말 축하로 이 시기를 보낸다. 명백히, 디킨스 소설의 스크루지 캐릭터는 애정의 표현으로 개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스크루지의 유명한 대사인 “망할 크리스마스!”는 그에게 있어 크리스마스 축하는 아주 성가신 일이고 그가 크리스마스를 하층 노동자들이 일하지 않고 일당 챙기는 날로 여긴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 사람이 단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만 듣고 회심할 수 있겠는가? 찰스 디킨스는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공포는 현명하게 사용된다면 기적을 만들 수 있다.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을 써도 부자는 거친 말로 대답하느니라”(잠 18:23).
정직하게 돈을 번 것이라면 부자가 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또 절약은 미덕이기도 하다. 벤 프랭클린은 이렇게 말했다. “한 푼 아낀 것은 한 푼 번 것이나 마찬가지다.” 크리스찬은 자신의 지출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하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의 물질을 맡은 현명한 청지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의 자녀들 중 잃어버린 죄인들은 절약이 지나쳐 “자린고비 유대인”이라는 말을 듣는다. 슬프지만 우리들도 죄인이므로 종종 자신의 편견으로 사물을 판단한다. 에베니저 스크루지는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방식 때문에 혐오스러운 인물이 된 것이지 1실링도 벌벌 떨고 아끼는 절약 정신 때문이 아니었다.
디킨스는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대조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크리스마스는 넉넉한 인심, 친절, 자선, 그리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영적으로 모두가 고양되는 시기이다. 에베니저 스크루지는 크리스마스의 영과 상극을 이루는 인물이다. 모든 소설은 독자들을 “흡족하게” 하기 위해 권선징악의 결말을 제시하곤 한다. 스크루지를 회심시키기 위해 디킨스는 네 명의 유령을 사용한다: 제이콥 말리의 유령,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의 크리스마스 유령들이다. 그 냉정한 늙은 죄인은 크리스마스의 유령이 그를 무릎 꿇리기 전에 먼저 순화되어야 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막 8:36).
좋은 질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뉴욕의 월가와 나소가에서 점심 시간에 복음을 전할 때 뉴욕의 증권 거래소에 출입하는 행인들에게 이 구절을 사용한다. 다우존스지수의 오르내림 하나에 매일 수천 명이 생사를 오고 간다. 이 나라의 어느 곳보다 이 곳에서 여러분은 탐욕과 부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잘 목도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 유령이 에베니저를 그의 무덤 앞으로 인도하기 전에 먼저 런던 증권 거래소로 데려간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거래소 방문이 스크루지를 괴롭힌 까닭은 그가 평소에 머물던 시계 아래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니”(딤전 6:10). 증권 거래소 장면에서 두 남자가 최근에 죽은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장례식에 참석할지 의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사업가가 말하기를 죽은 사람이 자기 전 재산을 회사에 남겨놓았다고 언급한다. 스크루지에게는 그의 허락 없이 결혼한 조카가 한 명 있었는데 그래서 조카에게는 유산이 한 푼도 돌아가지 않게 해 놓았었다. 얼마나 더럽혀진 마음이기에 자신의 유일한 친족마저 부인하고 그에게 일전도 남겨주지 않으면서 회사를 더 아낄 수 있는가? 어떤 수를 써야 그런 죄인을 돌이킬 수 있단 말인가? 불가능하다. 찰스 디킨스가 크리스마스 유령이라는 장치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악한 죄인도 개심시킬 수 있는 영을 알고 있다. 존 뉴튼은 그 영을 만났다. 뉴튼이 만난 성령께서는 뉴튼 같이 망가진 온갖 종류의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부유하건 가난하건, 젊거나 늙었거나, 교육받았건 무식하건 상관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지내면서 단지 자신의 삶에 종교적인 냄새를 약간 곁들이려 한다. 그것은 성령이 아닌 다른 영의 작품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라"(요일 4:1).
세상에 밀착해 있고 죄 가운데 편안함을 느끼는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에 두려움을 느끼는데 이는 주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입으로만 크리스찬이라 고백하는 사람들이 흥청대며 즐기는 크리스마스 파티장들에서 성령은 두려움의 대상이며 환영 받지 못한다.
지옥으로 향하는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있어 2015년 크리스마스는 2014년 크리스마스와 다를 게 없다. 성령께서 기록하게 하신 그 책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거나 더 나쁜 경우 조롱 당할 것이다. 약 2천년 전 베들레헴에서 일어났던 상황은 다시 반복될 것이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캐롤을 부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구주”(요일 4:14)이신 분이 자기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자리를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이 수없이 반복해서 일어나는가? 그에 대해 여기 간단한 답이 있다.
“이것이 정죄라. 즉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보다는 오히려 어두움을 더 사랑하니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라”(요 3:19).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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